2022 월드컵 경기가 막이 올랐다. 온 세계가 흥분의 도가니로 치닫고 있다. 16강 진출로 대한민국과 포르투칼 경기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후반전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겨두고 한국의 극적인 승전보는 밤잠을 설치기에 충분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맥주 한 잔으로 진정시킨다. 기분이 하늘을 날아 오르니 술맛도 달다.
지난 2002 월드컵은 국민을 도로로 광장으로 뛰쳐나오게 했다. 대한민국과 터키의 4강 진출을 앞둔 경기를 어찌 방안에서만 볼 수 있었겠는가. 식당가에서도 손님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음료를 서비스 하는가 하면, 집으로 돌아가기를 잊은 사람들이 밤이 새도록 술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3개 동으로 복도식 10층 건물이다. 한국과 터키의 4강전을 보려고 거리 응원을 나간 50대 아저씨가 술에 만취하여 집을 잘못 찾아들었다. 동은 다르고 호수가 같은 집에는 그날따라 문이 열려있었다. 새벽 운동을 매일하는 주인 아저씨는 하필이면 그날따라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 술 취한 남자는 비틀비틀 의심도 않고 그 집 문간방 서재에 들었다. '대한민국'을 흥얼거리다가 응원복 빨간 티셔츠도 홀라당 벗어버렸다. 남의 집에서 팬티만 만 입고 잠든 꼴이라니!
한 시간 쯤 흘렀을까. 안주인이 잠에서 깨었다. 어딘가 모르게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현관 앞에는 낯선 신발 하나가 놓여 있었고, 닫혀 있어야 할 서재의 문도 빼꼼히 열려있었다. 새벽마다 운동을 가는 남편이 서재에 있기는 만무할 터 안주인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았다. 낯선 남자가 침대에서 팬티만 입고 코까지 골며 잠자고 있는게 아닌가.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안주인은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여차하면 외간 남자를 남편이 없는 사이에 불러 들인 오해의 소지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경비원이 출동했다. 잠에 곯아 떨어진 남자를 흔들어도 보고 꼬집어도 보았지만 행설수설 주정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우리집으로 쫓아와 도움을 청했다. 눈을 비비며 도착한 그곳에는 술냄새가 진동했다. 난감했다. 그녀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주문했다. 나는 얼음까지 동동 띄운 물을 남자의 얼굴에 확 뿌렸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제서야 눈을 떴다. 주위에 둘러싼 이방인을 정신을 놓고 쳐다보더니 그제서야 벌떡 일어났다. "어! 여기가 어디지"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가슴조이며 참고 있던 안주인의 고함소리가 남자를 당황하게 했다. 남편이 오기전에 빨리 나가라고 삿대질을 했다. 남자는 경비원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그녀의 배란다에는 이불 빨래로 가득찼다. 잠시라지만 그녀에게 낯선 남자의 방문은 큰 충격이었다. 빨래가 햇볕에 말라갈 즈음 남자가 양 손에 음료수 박스를 들고 찾아왔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눈꺼풀이 무겁다. 잠이 올 것 같지 않다던 부자도 어느새 단잠에 빠진다. 며칠 후 축구 강국 브라질과 대한민국의 경기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