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봉필훈 전주대학교 교수 / 채규호 전남대학교 교수
심상철 박사님께서는 1937년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 539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죽곡은 석곡에서 압록으로 가는 보성강변 도로 사이에 있고 죽곡에서 약 10 km 정도 더 들어가면 봉정리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교수님께서 태어나신 생가가 있다. 이 마을은 30 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교수님은 큰 아들로 태어났으며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여럿이 있었고 초등학교는 죽곡면의 초등학교에 다닌 것으로 생각된다. 박사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부친께서 이점을 알고 중․고등학교부터는 큰 도시인 전주에서 다니도록 하셨다. 시골에서 넉넉하지 못한 생활형편인데도 불구하고 부친께서는 박사님을 큰 도시로 보내서 공부하도록 했는데, 박사님께서 큰 인물로 성장하는 데는 이와 같은 부친의 배려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곡성군은 산이 많아 산골이 많고 그 중에서도 봉정리는 더 깊은 산골이었다. 지금은 석곡에서 압록까지 가는 좋은 도로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학교를 다니기 위해 광주까지 오려면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되기 때문에 광주로 학교를 다니기가 적합하지 않았다. 곡성에는 호남선이 있기 때문에 곡성역에서 기차를 타면 전주까지 통학이 가능하여 전주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전주 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수가 5~6번째 정도 드는 우수한 학교였다. 봉정리에서 곡성역까지는 산길로 10km 이상 되는데 정말 이 길을 걸었을까 할 정도로 먼 길이었다다. 이 같이 먼 길이기 때문에 매일 통학하기는 어려워서 전주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고 누나들이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1956년에 전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전교특별상을 수상한 심 박사님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화학과는 동숭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50년대 말의 대학교의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그 때의 우리나라는 전쟁이후라 변변한 산업시설도 전무하고 국민소득은 수십 달러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였다. 학부실험은 대학교 옆에 위치한 공업시험소에서 실시했는데 가열기가 없어서 화로에 숯불을 피워 실험을 했을 정도로 매우 열악하였다고 한다.
심 박사님은 대학 재학 중에 병역을 마치기로 결정하고 카투사에 입대하여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된다. 카투사란 한국 군인이 미군부대에 근무하며 미군과 국군의 통역을 맡는 일종의 통역병다. 그 당시에는 군에 갈 경우에 모두 일반보병으로 가고 특수보직은 거의 없어서 카투사라는 특수병이 되기가 매우 어려웠을 때이다. 이때 근무하면서 얻은 영어실력이 미국 유학을 가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하여 학교에 다녔는데 4학년 재학시 제 1회 삼일장학금을 받으셨고 1962년 졸업식에서는 영예의 서울대학교 수석졸업으로 대통령상을 받으셨다. 대통령상은 단과대학 별로 돌아가면서 수석 졸업자에게 수여하는데 심 박사님 졸업하는 해에 대통령상이 문리대 차례여서 대통령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교수님은 젊었을 때부터 상을 달고 살았다.
원래 서울대학교 문리대는 순수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를 길러내는 대학이며 문학부와 이학부가 같은 대학에 있으면서 두 분야의 정서가 서로 어우러져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리대 정서를 만들어 냈다. 일본 강점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된 후 초창기의 이학부 교수님들은 여건은 매우 열악하였지만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사명감에 차 있었고 학생들을 깨우쳐 선진국의 앞선 과학기술을 공부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도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의욕으로 열심히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이때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 갔고 유능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 일부는 그 나라에 남고 일부는 돌아와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심 박사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8월에 Fullbright 장학금을 받아 Califonia Institute of Technology (CIT)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 때만해도 동양인은 미국에서도 보기 어려웠고 동양인이 지나가면 신기해서 아이들이 줄줄 따라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CIT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일류 대학이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운 대학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 달러 미만으로 유학을 가려면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야 갈 수 있었으며 아주 우수한 선택된 사람만 갈 수 있는 시절이었다. 심 박사님은 CIT에서 연구조교 및 실험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고 1967년 6월에 유기광화학분야의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유기광화학은 빛을 사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학문분야로서 60년대에 급격하게 발전하였고 1970년대에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기초가 되는 포토레지스트의 제조에 이론적 배경이 된 학문분야이다. 심 박사님의 학위논문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는데 하나는 전형적인 유기광화학분야의 연구논문으로서 β-styrylnaphthalene의 cis ⇆ trans 광이성질화 반응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DNA의 피리미딘 염기의 모델화합물로서 pyridone의 광화학에 관한 내용이다. 지도교수는 G. S. Hammond 교수 (1921 ~ 2005)로서 유기광화학에 관한 연구업적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 Hammond 교수는 1947년에 Havard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Iowa 주립대학, CIT (1958 ~ 1972) Santa Cruz (1972 ~ 1978)대학교수로 봉직했으며 유기화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Hammond 가설”로 유명한 사람이다.
박사학위를 받으신 심 박사님은 1967년부터 1969년 8월까지 Iowa State 대학의 O. L. Chapman 교수 실험실에서 post-doctorial research associate를 하시게 된다. O. L. Chapman 교수도 전통적인 유기광화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모두 9권으로 된 ‘Organic Photochemistry’의 editor로 이 분야에서는 잘 알려진 분이다. 이 실험실에서 하신 일은 치환된 styrene과 olefin과의 광고리화 반응의 입체화학에 관한 실험으로 전형적인 유기광화학 반응에 관한 논문이다. 이년 동안 post-doc.과정을 마친 심 박사님께서는 Polytech. Institute of Brooklyn에서 교수자리를 얻어 1969년 9월부터 1971년 8월까지 조교수로 연구생활을 계속하셨다.
1960~70년대 한국과학원이 설립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 연구여건이 열악하여 대학원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은 전무하였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도가 겨우 국내에 논문을 낼 수 있을 정도였으며 외국학회지에 논문을 내는 일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 때 대학원이란 유학가기 위한 전단계로서 유학시험 준비를 하는 시기로 토플이나 GRE 공부를 하고 대부분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갔다. 교수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어서 대학졸업자 초봉 봉급이 교수보다 높았고 지방대학에는 고등학교에 있다가 대학에 들어와 교수가 된 사람도 흔했다.
1966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발전 첫 단계로 1966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고 외국으로 인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고급 이공계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1971년 9월에 이공계 대학원으로서 한국과학원 (KAIST)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일인당 국민소득은 일, 이백 불 정도로 생각되는데 한국과학원 교수에게는 일반 국립대의 두, 세배 정도의 봉급과 아파트 및 귀국비용 제공 등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해외과학자를 유치하였다. 한국과학원의 개교는 1973년 3월 서울의 홍릉캠퍼스에서 총 7개학과의 석사과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심 박사님께서는 1971년 9월에 한국과학원의 부교수로서 부임하셨고 개교 사전 준비단계에서 재외 과학자 유치 차원에서 귀국하시게 된 것이다.
필자가 심 박사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일학년 때였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이태녕 교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유기화학분야의 세미나가 있다고 해서 다른 대학원생과 함께 참석하였는데 누군가는 모르겠지만 대학원생은 아닌 것 같고 키가 약간작고 눈이 초롱초롱하며 머리가 좀 커 보이는 사람이 질문도 하고 세미나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았다.
그 당시 필자는 대학원에 다니기는 하지만 군대도 가야 되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되고 장래도 불투명한 고민이 많은 시절이었다. 병역은 젊은 시절에 해결해야 될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1972년 말, 한국과학원에서 석사과정 학생을 모집한다고 하는데 석사 입학생에 주어지는 혜택은 3주 훈련으로 병역을 해결할 수 있고 전원 기숙사 제공, 학비 면제에 월 2~3만원 정도의 장학금이 지급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그래서 군대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한국과학원에 지원하였다.
한국과학원 입학시험 면접날, 홍릉 캠퍼스에서 면접시험을 보러 들어갔는데 전에 서울사대 세미나에서 본 분이 거기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그래서 그 분이 과학원 교수인줄 알게 된 것이다. 면접시험 때 유기화학분야에 박달조, 최삼권, 심상철 세 분의 교수님이 계셨는데 심 박사님께서 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신 것으로 생각되고 또 과학원에 합격하게 되어 심 박사님과의 인연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후에 심 박사님께서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인 것을 알게 되었고 지도교수로 선택하게 되었다.
1973년 전반기에는 학생들은 3주 동안의 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산업시찰, 세미나 등으로 전학기를 보냈고 강의는 후학기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원이 개교되면서 심 박사님의 국내에서의 연구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유기화학은 대부분 열을 이용하는 반응이었고 빛을 이용하는 유기광화학이란 분야는 심 박사님께서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한 참신한 새로운 연구분야였다. 1974~1975년도에는 아직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총설을 주로 쓰셨는데, ‘크라운 에테르의 구조, 합성 및 응용’, ‘새로운 합성 감미료’, ‘NMR shift 시약’ 등의 총설을 화학과 공업의 진보지에 발표하셨고 1975년에서 1976년에는 대한화학회지에 10편의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과학원 초창기의 실험시설은 국내에서는 최고였으나 아직 국제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실험실의 연구여건에서 수행 가능한 ‘아미노산의 광화학적 합성’, ‘고분자의 광분해반응’ 등을 연구하였고 미국에서 완결하지 못한 논문을 발표하셨다.
심 박사님의 연구실에는 책상위에 항상 많은 서류와 문헌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저렇게 많은 논문을 모두 읽을 수가 있을까 하는 정도로 많았는데 이것은 심 박사님께서 읽은 논문, 빠르게 처리한 서류 등을 쌓아 놓은 서류들이었다. 그렇게 서류가 많이 쌓여있었지만 필요한 서류는 금방 찾아내셨고 학생들과 관련된 논문이면 학생 이름을 써서 읽으라고 가져다 주셨다. 또한 심 박사님께서는 항상 쾌활하고 매우 활동적이셨다. 계단을 올라가실 때도 두 개씩 건너서 뛰어다니다시피 하고 주말이면 거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셨다. 강의는 매우 정열적으로 가르치셨는데 수업시간 내내 칠판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를 하시고 항상 힘이 넘쳤다. 점심시간은 40분간 식사를 하고 나오시면 과학원 중앙정원에서 학생들과 환담을 나누시고는 하셨는데 금방 점심시간이 종료되면 대화의 아쉬움을 남기곤 하셨다.
심 박사님께서는 성격이 소탈하시고 제자들을 항상 자상하게 이끌어주셨다. 과학원 실험실에서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실험을 계속하였는데 저녁에는 가끔 학생들과 함께 시내로 진출하였다. 박사님을 따라 모두 버스를 타고 장충동에 있는 족발집을 갔었는데 이런 음식도 있구나하고 족발이란 것을 처음 알았고, 외국어대학교 또는 청량리 쪽에 있는 생맥주집도 가끔 갔었는데 박사님께서 흥이 나시면 야자타임을 갖자고 하면서 먼저 제의를 하셔서 그래도 되나하고 내심 당황한 적도 있었다. 디스코는 담배를 비벼 끄는 식으로 추면된다고 시범을 보이셨고 노래를 부를 기회가 되면 ‘토요일 토요일밤에’를 활달하게 큰 소리로 부르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필자는 매우 수줍어하는 학생이었는데 심 박사님께서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석사과정 이년 차에 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단체로 속리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학생들과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경쟁하면서 등산을 하셨고 내려오다가 가게에서 함께 격의 없이 동동주를 마신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과학원 초기에는 화학 및 화학공학과로 되어 있었고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수는 한 학년에 11명 정도여서 학생들은 화학과 교수님뿐만 아니라 화학공학과 교수님과 도 가깝게 지냈었고 설날이 되면 여러 교수님댁을 방문하였다. 전학제 교수님 댁을 방문했을 때는 교수님께서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주셨고 심 박사님과 이현재 교수님 댁에서는 미국에서 생활하시던 내용을 비디오로 보았고, 그때 보았던 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였습니다.
1975년 봄에 과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개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당시 국내 박사학위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박사과정을 개설하느냐 마느냐 말이 있었지만 과학원이 발전하기 위해서 개설하기로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석사과정 졸업하고 3년간 대학, 연구소, 또는 산업체에 근무한 다음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기본적으로 국내 연구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국내의 대학, 연구소에서는 외국의 박사학위를 선호하였다. 필자는 그리 진취적이지 못해서 국내의 박사학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있었지만 외국 유학보다 과학원 박사과정을 택하였다.
박사과정에서도 석사과정과 같은 실험실에서의 생활은 계속되었고 우수한 학생들도 많이 들어와 실험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때의 연구내용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를 발전시킨 bispyrazinylethylene의 광이성질화 반응에 관한 연구였고 다른 하나는 N-methyllutidon이라는 화합물의 광화학인데 피리미딘 염기의 모델 화합물인 pyridone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N-methyllutidone의 경우, 화합물의 삼중상태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용기 있게 미국화학회지 (J. Amer. Chem. Soc.)에 제출하였지만 많은 질문과 국내에서 수행할 수 없는 실험내용을 요구하여 포기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에는 연구여건이 매우 열악하여 국내에서 연구하여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외국에서 연구하는 우리나라 과학자의 이름이 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학원에서는 해외저널에 논문을 내야 학위를 주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연구하여 국제 학술지에 논문이 발표되는 경우는 과학원에서부터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1977년도까지 국내학회지에 연구논문과 총설을 내셨지만 1978년도에는 실험시설의 수준도 상당히 올라서서 처음으로 미국학술지인 Photochem. Photobiol.에 논문을 내셨고 1979년도부터는 국제학술지에 본격적으로 논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박사과정에 들어와 일 년차 때의 실험주제는 coumarin의 광이합체화 반응의 salt effect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실험이 잘 풀리지 않았다. 방학 중에 심 박사님께서는 미국의 Texas Tech. 대학의 송필순 교수님 실험실에 가끔 방문하셨는데 그때 박사님께서 흥미를 가지시게 된 화합물이 5,7-dimethoxycoumarin (DMC)이라는 화합물이었다. 무화과 또는 파슬리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피부염에 잘 걸리고 이런 식물들에게는 해충들이 없다. 그것의 이유는 곤충들이 이 식물을 먹고 햇빛을 쪼이게 되면 죽기 때문이다. 또 이 화합물은 백반증의 치료제로도 옛날부터 사용되었다. 이러한 식물들의 잎에는 psoralen이라는 화합물이 들어있는데 이 화합물이 광독성을 나타내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DMC는 psoralen 보다 구조가 간단하고 반응성이 좋기 때문에 반응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한 모델화합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화합물이었다. 따라서 심 박사님께서는 DMC를 가지고 psolalen의 광독성을 분자레벨에서 연구하게된 것이다.
심 박사님께서는 이 연구주제를 가지고 미국 NIH에서 연구비를 받으시게 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우리나라 과학자가 한국에서 미국의 연구비를 받은 일은 처음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는 197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외국학술지에 논문 발표가 시작되었고 1996년까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구되었으며 약 54편의 논문이 이 주제와 관련되어 발표되었다. 초기에는 모델화합물인 DMC를 가지고 광화학 반응을 연구하였는데 이 화합물이 [2+2] 광고리화 반응이 잘 일어났고 DNA의 염기와도 광고리화 반응이 잘 일어났으며 psoralen도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DMC와 psoralen의 물리적, 광화학적 성질, 유도체들의 합성 그리고 이들과 염기와의 반응 등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논문이 발표되자 국외의 과학자들도 관심을 보여 이와 관련된 외국학자들의 논문들도 많이 발표되었다. 결국 미국의 Herst 그룹에서는 DNA와 직접 psoralen과 반응시켜 DNA와 광고리화 반응이 일어남을 증명하였다. 이 실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DNA와 psolaren과의 광화학 반응을 밝히는 것인데 먼저 연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보다 연구여건이 뒤떨어져 궁극적인 목적을 외국인에게 빼앗긴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찌하든 이 연구로 인하여 교수님께서 광화학 분야에서 유명하시게 된 발판이 되었다.
심 박사님께서 또 다른 연구주제는 bispyrazinylethylene (BPE)계 화합물의 광이성질화 반응이다. 교수님의 학위논문 주제를 좀 더 확장시킨 개념인데 스틸벤계 화합물에서 벤젠고리를 질소로 치환시킨 화합물의 광화학반응을 연구한 것이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누룽지향의 성분연구를 수행하였는데 누룽지에 포함된 화합물의 구조가 pyrazine 그룹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심 박사님께서는 아마도 이것에 착안하셔서 잘 알려진 스틸벤의 벤젠고리 대신에 피라진 그룹을 도입시켜 BPE를 합성하였고 이것의 광화학반응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하였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44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화합물의 합성과정에서 누룽지의 성분에 들어있는 화합물이 포함되어 있어서 실험실에서는 구수한 숭늉 냄새가 풍겼다.
1978년 가을 필자의 박사학위 과정도 거의 끝나가고 이제 졸업을 할 때가 가까워왔다. 그 당시 국내 박사학위는 전혀 인정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교수자리를 구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고 결국 지방대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디나 대학교수 자리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그 당시 지방대학은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대학에 교수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 박사님께서는 화학공학 특성화 대학인 전남대학교의 화공과에 자리를 알선해 주셨고 전남대학교에서도 교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 전남대학교에 가기로 되었다. 1979년 2월 박사과정 졸업식에 교수님께서 직접 박사학위 가운의 후드를 달아주셨는데 매우 뿌듯해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1979년 3월에 취직이 되어 전남대학교로 내려왔고 당연히 박사님을 뵐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 당시 지방대학에서는 실험시설이 전무하여 연구를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밤에 불이 켜 있는 연구실도 대학 전체에 한두 군데 정도였으며 밤에 불을 켜는 것도 전기세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필자는 실험을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실험설비도 없었고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개인적인 일 때문에 연구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연구 활동에 계속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1979년도에 9편, 1980년도에 12편, 1981년에 11편의 논문을 계속 발표하셨다. 이때는 psoralen과 BPE의 광화학반응과 이 화합물들에 관한 분광학적 연구, 들뜬상태에 관한 이론적 연구와 같이 연구 분야가 좀 더 확대되었다. 이때 심 박사님께서는 연구뿐만 아니라 바쁘신 중에도 공군과학, 한국화약, 삼양사, 제일약품 등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원 학생처장, 한국과학재단 연구심의위원 등을 지내셨다.
1979년 연말에 필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1980년 8월까지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필자가 물리치료를 받고 지내던 어느 날 심 박사님께서는 실험실 학생들과 함께 병원으로 병문안을 오셨다. 병실에서 공부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필자에게 병실에 주간지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시고는 “이제 많이 아픈 것 같지는 않고 지낼 만 한 것 같으니 논문을 읽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필자가 논문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심 박사님께서는 항상 공부하는 자세로 삶을 사신 것으로 생각된다.
1982년 초, 필자는 심 박사님의 주선으로 미국의 Johns Hopkins 대학에 박사후 연구원 (post doctor)으로 가게 되었다. 필자는 결혼을 서둘렀고 심 박사님께 주례를 부탁하여 주례를 서 주셨다. 그때 심 박사님의 연세가 46세셨는데다 동안이시다보니 “주례가 너무 젊네”하고 사람들이 말할 정도였다. 일년 반 동안의 박사후 연구원 시절 필자는 미국생활에 젖어 국내의 일들을 거의 잊고 있었고 원래 편지를 잘 쓰지 않는 성격이라 장기간 동안 심 박사님께 연락을 못 드렸는데 후에 돌아와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섭섭함을 토로하셨다.
필자가 미국에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었던 1982, 83년 2년 동안 심 박사님께서는 25편의 논문을 발표하셨다. 주로 전에 연구하던 주제를 발전시킨 내용과 광화학적으로 유기화합물을 합성하는 방법 등을 개발하셨다. 이 기간에 특이한 것은 인삼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구조의 polyacetylene 화합물을 알아내는 연구였다. 어떤 계기로 인삼연구를 시작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인삼에 관한 연구로 인삼학회와 연결되어 고려인삼학회 이사. 위원장, 부회장 (1990 - 1992)을 지내신 계기가 되었다.
1984년 여름, 심 박사님께서는 필자를 일본의 분자과학연구소의 Yoshihara 교수 실험실에 보내 BPE의 nanosecond lazer flash photolysis 실험을 하도록 하셨다. 그 당시에는 국내에 이 실험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고 일본에서도 흔치않은 실험장비였다. 한국과학원과 분자과학연구소 간에는 상호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이 분야에서 유명한 Yoshihara 교수님 연구실에 보내 공동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Yoshihara 교수님댁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는데 방명록에 심 박사님의 친필이 있어서 반가웠다. 필자는 2개월 동안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몸무게가 감소하여 혁대 구멍이 두 개나 줄어들었다. 실험의 결과로 세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화학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학술지인 J. Amer. Chem. Soc.에 논문을 실었고 매우 알찬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1985년부터는 필자도 대학원생을 지도하였고 연구 분야를 고분자로 점차 바꾸었기 때문에 심 박사님을 뵙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고 매년 초 심 박사님 댁에서의 신년하례식과 과학원 캠퍼스에서의 home coming day, 그리고 가끔 학회에서 뵐 수 있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공적인 일 또는 사적인 일로 가끔 광주에 들리셨고 사적인 심부름도 시키고는 하셨다. 언제인가 광주에서 화학회를 개최하였을 때인데 심 박사님께서 화학회 간사장을 맡으실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학회전날 심 박사님께서는 열 댓 명의 화학회 임원들과 광주에 오셨는데 저녁에 저를 불러내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심 박사님께서는 연속 좌중의 대화를 이끌어나가셨고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흥미롭고 다양한 이야기들에 모두들 즐거워하셨다. 교수님 주변에는 소위 ‘심 마피아’라는 화학분야의 핵심 멤버들이 항상 따라다녔는데 왜 사람들이 저렇게 따를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심 박사님을 학문적인 면에서도 존경하지만 소탈하고 쾌활한 성격과 박식함 등이 사람을 따르게 하는 매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심 박사님의 연구 분야는 BPE, psoralen, 인삼성분의 polyyne의 광화학반응과 같은 기초적인 광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광화학반응을 이용한 유기화합물의 합성, 고분자 등 기타 여러 분야에도 많은 논문을 발표하셨다. 초창기의 고분자의 광분해반응과 polyacetylene의 광화학반응을 발전시켜 전도성이 있는 graphite와 같은 고분자를 합성하고 성질을 연구하였는데 광화학반응을 이용하여 전도성 고분자를 제조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도성 고분자는 2000년도에 노벨화학상이 이 분야에서 나올 정도로 과학기술에 미치는 영향이 큰 연구 분야이다. 또한 광화학반응을 이용하여 유기화합물을 합성하는 연구 분야도 흥미로운 분야인데 예를 들면 현재 인공 감미료로 사용하고 있는 aspartam 또는 propellane과 같은 이론적으로 흥미 있는 화합물 등을 광화학적으로 합성하는 연구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셨다. 심 박사님께서는 유기광화학이라는 유기화학의 한 분야를 국내에 처음 도입하셨고 일천했던 화학분야의 연구수준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다.
심 박사님께서는 의욕적인 학술연구 활동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일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셔서 1980년대에는 대한화학회 이사, 간사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 등과 같은 학회활동은 물론, 한국과학원의 학생처장 등을 역임하셨고, 1990년대에는 한국과학원의 대학원장, 서울분원장, 원장, 대한화학회 부회장, 회장, 한국광과학회 회장 등의 굵직한 보직을 두루두루 지내셨다. 특히 학술활동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일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일을 열성을 갖고 철저하고 빠르게 처리하시는 능력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여러 해가 지나갔다. 심 박사님께서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셨고 변함없이 의욕적으로 연구를 수행하셨다. 대한화학회의 중요한 임원, 이사, 회장직을 맡으신다는 소식, 여러 가지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 그리고 과학원 원장을 맡으셨다는 소식 등 간간히 박사님에 대한 소식이 필자에게 들려왔다. 1996년 6월 홍콩 과학기술대에서 열리는 ‘Asian Photochemistry Conference’에 심 박사님과 함께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초청강연 연사로서 유창한 영어와 활력이 넘치는 강연내용으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필자는 같이 참석한 한국 사람들과 함께 뿌듯해했다.
드디어 1997년 심 박사님께서는 회갑을 맞이하셨고 제자들은 회갑기념 논문집 봉정식을 준비하였다. 심 박사님의 뛰어난 업적들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와 제자들 부인, 친구들, 동료, 등 150여명이 회갑을 축하하기 위하여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모였다. 먼저 심 박사님께서 지나오신 이력이 슬라이드 사진을 통하여 소개되었다. 중학생 시절의 교복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 치악산 등산 때 학생들과 동동주를 마시는 장면, 테니스 치는 장면, 학술상 수상, 원장 취임식, 이스라엘의 사해에서 진흙으로 전신 팩을 하는 장면, 학술회의에서 외국인 학자와 찍은 사진, 그리고 교수님의 캐리커처 등이 소개되었습다. 그리고 이어서 심 박사님의 기념강연이 있었는데 세미나 하실 때마다 즐겨 사용하시는 "광화학반응이 일어나려면 먼저 빛이 있어야 됩니다" 하시고 첫 번째 슬라이드는 해뜨는 사진을 찍기 위하여 일부러 일찍 일어나 찍으셨다는 그랜드 캐년에서의 일출사진을 시작으로, 필자가 과학원 박사과정 시절 녹는점 측정 장치가 없어 DSC로 녹는점을 측정하던 일 등, 그 동안 수행해오신 연구내용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국의 오대호 근처의 어느 호수가에서 찍은 일몰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이제는 해가 져서 빛이 없으니 더 이상 광화학반응을 시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마무리를 하셨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젊음을 유지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심 박사님께 회갑기념 논문집을 드리는 것으로 기념식을 마쳤다. 회갑기념 논문집은 모두 1579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고 1000권정도 인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월이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필자가 과학원 초창기에 심 박사님댁을 방문하였을 때 방안에서 보행기를 타던 자제분들이 대학에 다니고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과학원 원장직에 재출마했다가 선거에서는 선출되었지만 여차여차해서 실패하셨다는 소식도 들렸다. 심 박사님을 뵙는 것이 한동안 뜸했었는데 언젠가 뵈었을 때 “오랜만에 보네”하고 악수를 청하셨는데 약간 섭섭해 하시는 눈치셨다.
2001년 여름, 정년의 전해 Home Coming Day 때 “나나 제자들이나 다 함께 늙어가는구나”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셨고 “내년에는 정년퇴직이니 내년의 Home Coming Day는 한국과학원에서 할 수가 없으니 다른 방도를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막내 대학원생 소개도 있었다. 필자를 포함한 제자들은 심 박사님께서는 워낙 유능하시니 정년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실 수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심 박사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셔서 수술을 하셨고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퇴원을 하셨다. 제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다시 건강을 되찾은 심 박사님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심 박사님께서는 다시 학회에 참석하셔서 건재하심을 보이셨다. 좀 피곤해 보이시긴 하셨지만 전과 다름없이 학술회의 강의도 들으시고 학회의 여러분들과 인사도 나누고 간친회에서 건배제의도 하셨다. 제자들은 이제 완쾌되심을 축하드렸고 예전과 다름없음에 내심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어느 가을 날 심 박사님께 인사차 들리기 위하여 약속을 하고 시간이 남아 벤치에 않아 있었는데 박사님께서 연구실에 들어가시는 뒷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건강해 보이셨고 내심 괜찮으시구나 하고 안심하였다. 그날따라 심 박사님께서는 중요한 약속이 있으셨는지 좀 서두르셨고 이내 악수를 하고는 헤어졌다. 필자가 좀 느긋하게 굴었는지 한편으로는 죄송했고 “이제 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사셔도 될텐데...”하면서 돌아왔다.
2002년 초, 제자들은 교수님의 정년퇴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퇴임기념식장으로서 호텔을 결정하였고 최종적으로 계약하려는데 심 박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계약을 미루고 정년퇴임 기념식을 여름에 하자”고 하셨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그래서 계약을 중지하였다. 후에 심 박사님께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문안을 갔었는데 수술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초췌하신 모습으로 누워계셨다. 누워 계시면서도 학교일이며 연구와 관련된 말씀을 하셨는데 같이 간 도영규 교수께서 “이제는 연구며 학교일은 그만 잊으시고 마음 편히 병조리나 잘 하십시오”하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나고 심 박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박사님은 우리 제자들이 존경하고 닮고 싶어 하는 학문적인 지주였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돌아가시다니. 그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으면 그렇게 되었나 싶었고 역시 스트레스에는 견딜 장사가 없구나 하고 모두 애석해 하였다.
장례식 날,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이었고 여러 가지 봄꽃들이 만발한 때로 생각된다. 장지는 심 박사님의 생가가가 있는 곡성군 봉정리였다. 생가는 옛날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시골집으로서 토담집이고 재래식의 마루가 있고 흙으로 지어진 집이었다. 이때 온 조문객들은 백 여 명이 되는 것 같았고 그곳에는 옛날식의 상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상여하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었는데 그 날의 상여는 수십 년 만에 보는 것으로 생각보다 훨씬 운치가 있었다. 상여로 동네를 몇 바퀴 돌면서 고인을 떠내 보내는 것을 모두 아쉬워하였다. 그곳에서 심 박사님의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필자의 선배이신 두 분을 만났는데 “자네가 첫 번째 제자인 아무개인가?”하고 처음만난 필자를 알아보셨고 “이제 언제 다시 만나지?”하면서 아쉬워 하셨다. 후에 일본 분자과학연구소의 Yoshihara 교수도 심 박사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로부터 1년 뒤 화창한 봄날 심 박사님의 제자들과 지인, 그리고 가족들은 심 박사님의 산소를 다시 찾아 일주기 기념식을 갖고 참배를 하였다. 마을을 흐르는 시냇물은 예나 지금이나 맑게 흐르고 있었고 심 박사님께서 마을에 지어주셨다는 정자와 동네를 둘러보고 교수님의 생가에도 들렀다. 그리고 섬진강변의 압록에서 참게탕을 먹고 헤어졌다.
이스라엘 학회에 참석하고 학회에서 주선해준 여행을 하며 사해 근처를 지나면서 잠깐 쉰 적이 있는데 “심 박사님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다른 외국인 학자들과 함께 머드팩을 했던 장소겠다”하고 심 박사님께서 회갑기념 때 보여주신 사진이 생각났다. 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5년마다 씩 한번 열리는 Pacifichem 2005에 참석하였을 때, 초록의 앞 페이지에 3명의 학회 창설멤버의 소개가 각각 한 페이지씩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 한사람의 사진이 눈을 끌었는데 심 박사님과 비슷한 얼굴이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일본사람이 심 박사님과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하고 무심코 지나쳤다.
후에 누군가 심 박사님이 초록에 소개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보니 심 박사님의 사진이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사진이어서 많이 달라지신 모습에 알아보지 못했다. “한국 화학 연구의 선구자며 유능한 외교력으로 대한화학회를 Pacifichem 2005의 후원학회중의 하나로 만든 심상철 교수께서 2005년 4월 11일에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표제와 함께 교수님의 경력과 업적에 대한 소개였다. 심 박사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의 학문적 표상이셨지만 우리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외국학계에 널리 알려진 유능한 인재였다고 생각된다.
언제인가 지나는 길에 심 박사님의 묘지를 방문하였다. 묘지 옆에 큼지막한 검정 비석이 있고 쓸쓸한 바람소리 뿐...
심상철 박사님 주요업적 개요
심 박사님께서는 한국과학기술원에 재직하면서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화학계의 국제적 수준향상이라는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셨다. 특히, 당시 선진국에서는 이미 중요한 학문 분야로 보편화되어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연구가 전무하였던 유기광화학 분야를 최초로 개척하여, 다량의 수준 높은 연구결과를 국내외의 여러 저명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특히, 지난 31년간의 꾸준한 연구 끝에 무려 33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게재된 논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순전히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행해진 연구결과로서, 이중 과반수 이상을 미국화학회지 (J. Am. Chem. Soc.), 미국유기화학회지 (J. Org. Chem.), Tetrahedron Letters, Photochemistry and Photobiology, Organometallics, Macromolecules 같은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유명학술지에 발표하여 한국화학의 학문적 수준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조: 발표논문 목록)
그동안 괄목할만한 연구업적을 남긴 분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Photochemistry of Conjugated Polialkynes
선형 poliyne들이 빛을 받으면 세포막의 상해를 통해 광독성(Phototoxicity)을 보이는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하기 위한 연구이다. 이 분야는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새롭게 시도된 분야로써, 다양한 선형 poliyne들을 합성하고, 이 물질들의 구조에 따른 여러 가지 특이한 광반응성을 연구하여 위의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15년여 동안 국내외 유명 학술지에 7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최근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의 왕립화학회에서 발행하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인 J. Chem. Soc., Chem. Commun.에 Invited Feature Article을 게재하였다. [J. Chem. Soc., Chem. Commun., 1996, 2609]. Feature Article이란 1996년부터 J. Chem. Soc., Chem. Commun.에서 학술지의 질을 더욱 높이고 독자를 늘리기 위하여 시작한 총설 형식의 논문으로써 각 권마다 저명한 화학자의 독창적인 연구결과 및 향후 그 분야의 연구방향을 게재하여 다른 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글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컨쥬게이트된 poliyne들과 다양한 올레핀들과의 광고리화 반응에서 생성물의 구조와 그 위치 및 방향 선택성은 말단기의 종류, 삼중결합의 수, 그리고 올레핀에 의존한다. 이 반응은 일반적으로 cumulene형태의 삼중 여기상태를 통해 진행된다. 1-아릴-4- (펜타메틸디실라닐) 부타-1,3-디인을 메탄올이나 아세톤 존재 하에서 광반응시키면 흥미있는 중간생성물인 실라사이클로프로펜을 통해 부가반응이 일어난다. 1-아릴-1,3-부타디인의 광수화반응과 알콜에 대한 광부가반응은 다른 말단기와, 아릴 기의 치환체에도 영향을 받는다.....” 또한 미국의 저명한 출판업체인 Marcel Dekker Inc.에서 최근 발행한 단행본인 「Molecular and Supramolecular Photochemistry I」에서는 이미 J. Org. Chem., Tetrahedron Letters, Photochemistry and Photobiology 등의 저명 학술지에 발표된 내용을 요약하여 한 Chapter를 장식할 만큼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2. Photochemistry of 1,2-Bis(heteroaryl)ethenes
오랫동안 전세계적으로 물리화학자 및 광화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고, 아직까지도 광화학적 반응 메커니즘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스틸벤 계열 올레핀의 광화학반응에 관한 연구이다. 기존에 행해지던 연구에서는 스틸벤의 광반응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한 다양한 실험 방법의 모색에 치중한 데 반하여, 이 연구에서는 반응 메커니즘을 에측할 수 있는 모델화합물들을 논리적이면서도 밀도있게 선정하여 이들의 광이성질화 반응, 광고리화 반응 및 다른 여러 올레핀들과의 광부가반응들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기존 스틸벤의 광화학 반응 메커니즘을 역으로 규명해내는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모델 선정의 창의성, 연구방법의 독창성, 연구결과의 기여도를 국제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연구 성과는 이미 화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알려진 미국화학회지를 비롯한 여러 학회지에 게재되어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대표적인 모델화합물을 예로 들면, 1,2-비스피라지닐 에틸렌 (J. Am. Chem. Soc. 1986, 108(5), 1006, 5(E)-스티릴-1,3-디메틸우라실 (Chem. Lett. 1987, No. 1, 45; Bull. Chem. Soc. Jpn. 1986,59, 3257), 스티릴 퀴녹살린 (J. Photochem. 1987, 40, 381)....등으로써 스틸벤의 벤젠고리에 도입된 질소원자의 효과를 극대화시킴으로써, 광화학 메커니즘을 예측할 수 있도록 설정되었는데 이러한 창의적인 연구방법은 시설과 경제적 여건 면에서 뒤져있는 우리나라에서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연구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수차례에 걸쳐 국제학술회의에 초청되어 그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다. 여러 가지 독창적인 모델화합물들에 대하여 그 광화학적 반응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이러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광화학반응 메커니즘 규명에 노력하였다.
3. Photochemistry of Furocoumarins
홍반이나 백반과 같은 피부질환의 치료제로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소랄렌계 화합물들을 자외선으로 쬐어줄 때 나타나는 광독성과 이에 관련된 광화학적인 반응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로써, 이들 소랄렌 화합물들의 광증감 활성도는 핵산의 염기들과의 광반응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이 알려졌으며, 이러한 관찰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소랄렌 화합물들과 약리효과 및 세포의 돌연변이, 발암 및 피부 광독성들의 부작용 등이 광화학 반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알려져 왔다. 그동안 이 연구수행을 위해 미국 NIH 산하에 있는 국립 암연구소 (NCI)로부터 독창적인 연구임을 인정받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광화학 분야에서 7년간 연구비를 지원받아 왔으며, 그 연구결과는 국제적 전문학술지인 ‘Photochem. Photobiol.’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수의 연구논문으로 발표되어, 그 창의적인 연구결과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이들 연구결과를 통해서 DNA의 염기와 소랄렌과의 자외선하에서의 광화학적 반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 작용 메커니즘이 핵산의 피리미딘 염기, 특히 티민과 [2+2] 광고리화 부가반응을 일으켜서 단일부가물을 생성하고, 이것이 다시 다른 핵산 이중나선의 서로 다른 면에 있는 티민과 광고리화 부가반응을 일으켜 이중부가물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임을 밝혀냈다. 최근에 의학계에서 이들 화합물들이 일부 피부질환에 대해 치료제로도 사용되고 있어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랄렌 유도체와 더불어 생물학적인 활성을 가지는 쿠마린 유도체들과 아데닌 염기와의 광화학적 반응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앞에서 기술한 3가지 커다란 연구업적 뿐만 아니라, 심 박사님께서는 상당히 많은 유기광화학적 반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 N-메틸루티돈의 광화학반응에 관한 연구, 신나모니트릴 유도체의 광화학반응에 관한 연구, 인데노인덴과 올레핀과의 광화학반응과 같은 여러 분야에 대해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여러 아세틸렌 화합물들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촉매를 이용한 독특한 중합방식을 이용한 고분자 연구 등에서도 우수한 업적을 내었다.
학술활동에 관한 업적
국내 학회에서의 활동을 살펴보면 1976년부터 시작되어 유기화학분야에서 매월 1회씩 열리는 유기 세미나를 조직, 운영하여 대한화학회 분과회활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 후에 다른 분과회 활동을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 확대된 개념으로 1년에 한 번씩 유기 심포지엄을 조직하여 유기화학자들 사이에 정기적인 학술교류활동으로 정착시켰으며, 한국과 일본의 유기화학자들의 학문적인 교류를 위하여 한․일 유기 세미나를 조직하였고 이에 따라 매년 한 번씩 양국학자들이 모여서 상호 학문적 관심사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적인 학문적 교류의 일환으로써 선진국에서 유명한 화학자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한국의 화학을 세계에 소개함과 더불어, 국내 학회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장, 발전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한화학회 편집간사, 국제협력위원장, 총무간사, 간사장, 감사, 이사, 유기화학분과회장, 화학올림피아드 위원회 위원장, 부회장, 수석부회장,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학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해왔으며, 고려인삼학회 부회장, 한국생화학회 평의원, 태양에너지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여러 관련 학회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 발전시킴으로써 국내에서 기초학문으로서의 화학 분야의 발전 및 정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듯 국내화학계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것과 더불어 매년 국내외의 우수대학 및 연구기관과 교류하여 광화학 분야의 학문적 관심사를 교환하여 국내에서의 광화학 분야의 확대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또한 국내 광화학계의 학문적 수준을 널리 외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학계에서의 활동 뿐 아니라, 정부기관 및 관련 산하 공공단체의 과학기술정책 수립에도 중요 자문 혹은 심의위원을 역임하면서, 국내에서의 자연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 민간기업체의 정밀화학 분야에서의 신규기술개발을 위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자문에 응하셨다.
교육 업적
심 박사님은 연구 및 학술활동 뿐만 아니라 고급 과학 인력의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셨다. 과학기술원에 재직하면서 석사 69명과 박사 36명을 배출하셨다. 1975년 첫 석사 졸업생 2명을 배출한 이래 100여명에 달하는 제자들은 현재 모두가 국내외의 학교, 연구소, 산업체 등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이고 있으며, 제자들 간의 교류 또한 활발하여 국내의 가장 모범적인 그룹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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