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행로
문희순
매년 6월이 가까이 다가오면 그냥 이유 없이 우울해진다. 아버지의 기일도 있고 남편 기일도 있고 그야말로 좋아하는 가족 둘이 6월 햇살에 사라진 기분이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슬픔 6.25 전쟁까지 경찰관의 신분으로 참여하셨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 곁을 떠나신 지도 42년이 되셨으니 긴 세월의 바람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몇 달 전부터 아버지(남평문씨)의 뿌리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대구에 남평문씨본리세거지가 있었다. 아버지 본적도 경북 청도였기에 내 마음을 훅 끌어 당겼다. 마치 그곳에 가면 아버지의 훈김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세거지로 들어가는 낙동강코스 대구시티투어는 목요일과 일요일뿐이라서, 나는 목요일 날을 예약하고 다음날 아침 8시 38분 무궁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텅텅 비어있는 좌석들 그래도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까만 머리가 듬성듬성 보인다. 나는 왜 이 적적함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가는 것도 호사였나. 구미 역에서 승차한 멋쟁이 할머니 한분이 내 옆에 앉으신다. 그리고 시작되는 재산 자랑이 늘어지신다. 구미에 남편사업체가 있고 본인은 대구에서 엄청 큰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땅도 여기저기 있다고 입이 마를 정도로 자랑을 하신다. 참 넉살도 좋으시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혹시 말이 많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바로 대구역이라 못다 한 이야기의 아쉬움을 남기시고 떠나셨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저런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스치게 된다.
드디어 동대구역에서 내려 바로 시티투어 승강장에서 낙동강코스 버스에 승차했다. 목요일 평일인데도 외국인, 내국인 분들로 좌석의 절반 이상이 채워졌다. 나는 앞자리에 자리를 정하고 짐을 풀었다. 해설하시는 분은 한국어, 중국어로 안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버스는 대구의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서 시원스럽게 달려 사문진나루터에 도착했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 이곳 사문진나루터다. 그 당시 피아노를 운반했던 마을사람들은 피아노를 보고 '귀신'이라고 했다. 피아노는 최초 1900년 3월 26일 대구지역 교회로 부임했던 미국인선교사 사이드보탐 부부가 낙동강을 통해서 배편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물류의 최대 중심지였다. '귀신통' 그때 사람들이 붙인 피아노 이름이 재미있다. 네모난 상자에서 소리가 나니 그럴 만도 하다. 낙동강에 위치한 이곳은 화원유원지로서 봄꽃들이 알록달록 예쁘게 피어 자태를 뽐내며 관광 온 손님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산책코스까지 정돈이 잘되어 있어 점심을 먹고 둘러봐야겠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봄 햇살이 친구가 되어 바삭하고 고소한 부추전과국수로 점심식사를 하니, 참으로 행복해서 부러울 것이 없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아버지의 뿌리가 있는 곳, 한가로운 농촌길로 접어들면서 멀리 보이는 소담한 산자락을 지척에 둘 거리가 되면 옛스러운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인흥 3길 18~5(본리리 373)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 도착했다. 오기 전에 사진으로 봤을 때는 넓은 들판에 목화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노란 유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세월의 흔적이 곱게 느껴지는 인흥마을, 정말 그림같이 아름답다. 인흥마을은 남평문씨들이 200여 년간 세거해온 곳으로 문익점의 후손들이 터를 잡아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고려 말의 충신 문익점의 18세손 문경호가 19세기 중엽 터를 잡아 만든 마을로 현재 조선말기의 전통가옥 9채와, 재실 1채, 정사 1채, 문고 1채가 들어서 있다. 정전법 구도로 형성되었으며 대가족 생활양식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이 마을은 잘 보존되어 지금은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의 대표 건물로는 광거당과 수봉정사 그리고 인수문고를 들 수 있고, 또한 세거지 맞은편에는 1866년에 세워진 인흥서원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수봉정사는 인공미가 절제된 정원과 함께 근대 한옥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일제시대 1936년에 지어진 수봉정사는 남평문씨본리세거지의 대표적 건물로 후손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해 지은 교육장소다.
문중도서관 인수문고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1910년, 본격적으로 서책을 모은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인흥의 남평문씨들은 우리 학문의 계승과 서책수집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당시 사들인 서책들 중에는 중국책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서원으로 알려진 도산서원의 장서량이 약 4,400 책이라고 하니 인수문고의 장서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이 엄청난 양의 장서는 오랜 세월 광거당과 수정사에 모셔져 있다가 1982년 지금의 인수문고로 옮겨졌다.
인자하면서도 지엄한 우리네 전통마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어른 키 높이를 훌쩍 넘는 흙내음 가득한 토담 길을 천천히 걷다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6월이 오면 주황색 능소화가 담벼락에 늘어져 아름다고 황홀한 매력에 손님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훔친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운수사업을 하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4살 때 일본으로 가셔서 24 살이 되는 해 한국으로 오셨다. 한국말을 배우며 경찰시험을 보셨으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셨을까. 인정이 너무도 많으신 아버지에게는 경찰이라는 직업이 힘이 드셨으리라. 유도로 다져진 몸으로 대민 봉사에 앞장서셨고, 사건이 생길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맡겨진 일을 열정으로 불태우셨던 분이다. 더욱이 6.25전쟁 중에는 지리산 토벌작전에 성공한 공로로 대통령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셨다. 수많은 상장과 훈장들이 늘어갈수록 아버지 몸은 약해져만 갔다. 급기야 중풍이라는 어둠의 그림자는 서서히 아버지 몸을 무너뜨렸다.
인흥마을 초입지에 경주 안압지를 연상케 하는 인흥원 연못주변에 핑크빛 꽃 잔디가 예쁘게 지도를 그리고, 물빛을 바라보니 내 얼굴에 4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겹쳐진다. 그림도 잘 그리시고 문장력도 뛰어나셨던 아버지, 잘생기시고 풍채도 좋으셨다. 마음이 여리셔서 빚보증에 도장을 찍어 마음고생을 크게 하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아들을 믿고 의지하셨다.
기대고 싶고 매사에 확실했던 오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되어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희망이었던 오빠도 정년퇴직을 하신 지가 몇 년이나 지났다.
세거지의 좌우 양면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100년이 훨씬 넘은 노송들이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아버지가 버팀목처럼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는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고택 밖에 노란 물감으로 물들여진 유채꽃물결 저 끝에서, 경찰
관 정복차림의 아버지가 아련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어 주시는 것 같다.
첫댓글 『화양연화』 /이든북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