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각자의 고유한 생각이 전제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덕규범과 기본 생활예절을 습득하고 기본적인 도덕적 판단력과 실천능력을 함양하여,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 갈 수 있는 도덕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제시한 초등학생을 위한 도덕교육의 목표이다. 다시 말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가치판단이라고 하며 가치판단을 잘 했을 때 나도 행복하고 내 이웃도 행복해진다. 대다수 사람들은 단지 규범과 질서를 잘 준수하는 것을 도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선 그런 가치판단을 잘하려면 그 원리나 근거를 묻는 것과 더불어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행복이란 ‘사람이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사회제도와 구조적인 관점보다는 개인의 욕구실현에 집중하는 인상이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우리 사회에 욜로(YOLO)족이 등장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영어 이니셜을 모아 만든 신조어인데,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행태를 반영한 말이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현대 젊은이들은 왜 욜로족이 되기를 자처했을까?
이러한 현상은 인간 욕구의 단계성을 구분한 매슬로우(Maslow)의 논의를 통해 적절히 이해할 수 있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사람은 다섯 가지 욕구를 만족하려 하되, 우선순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욕구부터 차례로 만족하려 한다. 즉 사람은 가장 기초적인 욕구인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를 맨 먼저 채우려 하며, 이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안전해지려는 욕구(safety needs)를, 안전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사랑과 소속 욕구(love&belonging)를, 그리고 더 나아가 존경 욕구(esteem)와 마지막 욕구인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를 차례대로 만족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존에 직결되는 욕구부터 문명 생활에 대한 욕구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청년들은 어떤가? 생활고를 호소한다. 계속되는 취업난, 학자금 대출, 주거 문제 등이 청년들의 삶을 위축시킨다. 매슬로우가 지적했듯이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는 흔히 의식주다. 하지만 고시원 살이를 하는 공시생들과 주거비로 월 소득의 1/5이상을 소비하는 도시 직장인들의 주머니가 넉넉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의식주에 대한 염려를 안고서는 상위의 욕구인 존경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로 옮겨가기는 힘들다.
#손에 잡히는 쾌락적 행복의 추구
더욱이 현대는 가치 혼란의 시대다. 각계각층에서 주장하는 소위 ‘가치 있는 것’은 수없이 많은데, 그것을 평가할 기준은 찾기 어려운 시절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조차 힘들다. 대개 청년기라고 한들 아직 사유의 힘이 굳세지 않아 고등한 욕구, 즉 이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랄지, 미덕을 행함으로서 도달하는 사회에 대해 숙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반면에 당장의 쾌락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으로 그 유혹에 빠지기 쉽다. 결국 청년들은 윤리적이라거나 지적인 것을 존경하는 수준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당장의 손에 잡히는 쾌락적 행복을 좇는 욜로족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일자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기본적인 욕구수준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국가 시스템을 통해 추구해야 할 바이다. 그 다음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 탐구하는 단계에 있는 청년세대들이 ‘내가 따라야 할 고귀한 가치라는 것이 진정 존재하는가?’를 물을 때 개인이 얻는 만족스러운 상태가 타자를 배제한 채로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는 가치판단은 사적 도덕이며, 개인의 행복과 직결된 선택을 의미한다. 어떤 가치판단이건 책임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개인의 몫이므로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욜로의 길을 선택한 청년들을 비난할 순 없다. 다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행복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조건 안에서 가장 적절하게 스스로를 실현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행복이 그 자신보다 사회제도와 구조에 더 많이 의존한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행복을 다루는 윤리학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학으로 관심사를 확장해갔다.
#공동체의 미덕 ‘품앗이’
지난 33호 ‘지식인의 밥값’에서 밝혔듯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안에서 우리의 공동체 지수는 최하위 수준이다. 우리는 실제로 선조들이 누렸던 여러 좋은 공동체의 미덕을 잊어간다. 그러한 제도 가운데에서 오늘만의 쾌락이 아닌 존경 유형의 행복을 생각해보도록 ‘품앗이’를 제안한다. 품앗이는 일을 하는 ‘품’과 교환한다는 ‘앗이’가 결합된 말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두레’와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방법으로 가장 오래된 노동 문화로 꼽는다. 한쪽이 베풀고 다시 그것을 보답하는 쪽을 전제하지만 반드시 갚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서로를 동료와 이웃으로 보며 성장해야할 때 서로를 경쟁자로 의식하며 성장한 탓인지 청년세대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공동체 의식이다. 물론 그런 공동체 의식은 노동을 임금을 통해 보상받는 방식의 전면화로 인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 관혼상제의 경우에 그러한 협동의 단초가 남아있다. 그러한 단초마저 사라지기 전에 품앗이의 미덕을 되살리는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다.
http://www.mdilbo.com/detail/b8U39D/58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