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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송강 정 철(鄭澈) 그리고 포옹 정양(鄭 瀁)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포옹 정양(鄭瀁)은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사이로 알려져 있다. 본래 정 양의 조부 송강 정철(鄭 澈)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예전의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었으나, 1665년에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현재 충북 진천의 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포(鄭浦)가 지금의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로 이장(移葬)하였다. '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묘자리를 구하다가 이곳의 지형(地形)을 보고 '고기'가 숨어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어은(魚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송강 정철의 묘를 천묘(遷墓)하면서 지은 글이 ‘송강집(松江集)’에 수록되어 있어 덧붙인다. (참조: 국역 《송강집》, 송강유적보존회, p.664)
是非自有當(시비자유당) 시비는 저절로 정당에 돌아갔는데
宅兆今始臧(택조금시장) 택조는 이제야 비로소 장을 정했네
天上三光照(천상삼광조) 천상에는 삼광이 비추이는데
人間萬事荒(인간만사황) 인간에는 만사가 황량하구료
凄凉辰巳歲(처량진사세) 처량하다 진사의 해를 어쩌리
驚怪虎惺章(경괴호성장) 놀랍고 괴의하다 호성의 장이 ……
何以稱明德(하이칭명덕) 무엇으로 명덕에 바치오리까
寒流薦一觴(한류천일상) 찬물로 한 잔을 올리옵니다
다음은 포옹 정 양의 친필 편지다
입욕 금기구 상궐인편일후 불심/영감섭리 체후하여 문뉴세전한질
상미향득치결하회배절구구/내념불궤오부지/명 차기부지 이소래우용 상/
필무가불 우문거론종사지청 인/ 혹이차위려운 미지차오여하이치 시야 부득면리 가탄 양차사입 / 상래 유 용의사 명발동귀 가심 장망 불비재배 게묘 십일월 우 /양 돈
<주해>
속리산으로 들어간지 지금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 인편을 통해서 한번 안부를 여쭙는 것 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영감의 섭리와 체후가 어떠신지요. 듣건대 세전에 앓으시던 한질이 아직까지 다 낫지 않았다고 하는바 그것을 생각하노라니 구구한 저의 마음이 배는 더 간절해집니다. 이어서 생각컨대 백부(사헌부의 별칭임)에 제수하는 명에 나아가지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이미 제마음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소가 올라 온 지 반달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가부를 결정 않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데 종사 하라는 청을 거론한데 대해서 사람들이 혹 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평소의 내용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물을수가 없으니 탄식스럽습니다.
저 양은 차임하는 일로 올라온 뒤에 달포가량 일을 보았으나 일을 다 마치고 내일 출발해서 동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는 심정을 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만 줄이며 재배하고서 올립니다.
계묘년 3월 21일에 비가 오는 중에 양은 절을 하고 올립니다.
<참고>
정양의 자 정보연의 글씨
풍일 불화장정차험/안향누일/기력하심 복모하회불승구구 자/ 수일지전 득문변애지술 심혼/ 명취질래차 상여확곽론 즉/ 의론명쾌 비복육성지배야 이차/개지경행 이탁차이위침구/불비복유/하람 상백시/경자삼월십구일 자 보연/신환 경중역사갈 복행
<주해>
바람과 날씨가 ㅈ화롭지 않고 긴 일정에 길조차 험한가운데 여러날 동안 말고삐를 잡고 길을 가시니 기력이 어찌 감당하시겠습니까 삼가 저의 그리운 마음은 몹시 간절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못난 아들은 며칠 전에 변야의 술이 몹시 어둡다고 들었습니다. 내일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서로 더불어 논의해 본다면 의론이 명쾌해져 다시는 육성의 무리가 아닐것입니다.
이 때문에 참으로 서울로 가는 것을 중지하였으며 이것을 핑계로 침을 맞고 뜸을 뜰계획입니다. 이만 줄이오니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상백시
경자년 3월 19일 아들 보연 올림
취만득문/형미부행재이귀 미지즉금/환우 도력문여하 치문 하회 유재/
미미 제경환학질 화열참작 극이익/ 중 기부득지 이행경수일지후 재/
작야 우환마 사이득갱 기력위철/공불능과금하 보역방대 이치세 여허영극극
내품보책 사상욕견지/고송상 회소견 공가첨입 여도백/여부 감품주인알품 행/감시여하 위차주인천리 가지중차/사 불감경지의부 질현요초불비/
<주해>
아주 늦게 형께서 행재소로 가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도로 집으로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력이 어떠하신지요? 아부를 묻노라니 저의 마음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기만 합니다. 저는 지난번에 학질을 앓았는데 화열이 몹시 심하게 뒤엉켜서 더욱 중해져 거의 죽을 지경이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 요행이 살아났습니다. 엊그제 밤에는 또다시 광란증이 일어나 죽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저의 기력이 간당간당하는바 아마도 이번 여름을 넘길수 없을듯합니다.
족보를 만드는 일은 이제 막 시작하였는데 돌아가는 형세가 이와 같으니 역시 몹시 답답합니다. 이어서 사상께서 족보 책을 보시고자 하시기에 올려보냅니다. 소견을 보내주시면 아마도 첨가해 넣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우러러 여쭈니 살펴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일을 위하여 천리길에 사람을 보내니 이일을 중하게 여기면서 감히 경시하지 않는 뜻을 잘 알수가 있습니다. 병으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 대충 쓰고 이만 줄입니다.
추신: 앞서 월형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인쇄한 종이를 부쳐 보냈는데 살펴보셨습니까? 이현로는 소흘히 말고 찾아서 보내라고 삼척에 패자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간절하게 말씀드리지 않고 애둘러서 말씀드리지만 범범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판각수 아홉 사람이 판각하는 일을 시작한지 3일이 되었습니다. 새로 판각한 주석 한판으로 올려 보냈는데 엉성하고 치밀함과 글자의 크고 작음이 어떻습니까? 회답을 주시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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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절공 정양
영일정씨의 원류는 지백호(智伯虎)이나, 연대가 오래되고 또한 고중이 없으므로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어, 지백호의 원손 정종은(鄭鍾殷)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호장을 지낸 뒤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는 신라 때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이며 그 후손(後孫)인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중조(中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監務) 정극유(鄭克儒)를 중조(中祖)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이 양파(兩派)는 시조(始祖)를 같이 하면서도 그 중간계보(中間系譜)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寸數)를 헤아리지 못한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에서는 정몽주(鄭夢周)가,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정철(鄭澈)이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배출(輩出)한 상신(相臣) 5명과 대제학(大提學) 3명 가운데 정유성(鄭維成:현종 때의 우의정)만이 정몽주(鄭夢周)의 후손(後孫)일 뿐, 정홍명(鄭弘溟:인조 때 대제학)· 정호(鄭澔:영조 때 영의정)· 정우량(鄭羽良:영조 때 우의정) 등은 모두 정철(鄭澈)의 집안이다. 이 밖에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로는 정유성(鄭維成)의 손자(孫子)인 양명학(陽明學)의 거성(巨星) 정제두(鄭齊斗),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의병(義兵)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 효종(孝宗) 때 학자(學者) 정극후(鄭克後), 고종(高宗) 때 산수화(山水畵)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監務公派)로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오천군(烏川君)에 봉(封)해진 정사도(鄭思道) 등을 들 수 있다.본군(本郡)에느??? 선조(宣祖) 때 학자(學者)며 좌의정(左議政)을 역임(歷任)한 송강 정철(송강 鄭澈)과 그 아들 문절공 정양(문절공 鄭瀁)의 후손(後孫)과 방후손(傍後孫)이 상운설매(祥雲雪梅) 소천승부(小川乘府)에 살고잇고 또한 19대 정기문(鄭起門)은 난을 피하여 인조(仁祖12년에 강원도 양양(江原道 洋洋)에서 물야오전(物野梧田)흰돌바위으로 옮겨앉아 현제까지 12대를 살고있다. 정양(鄭瀁) 1602~1668 자(字)는 안숙(安淑) 호(號)는 우익(宇翼) 경외(敬畏) 포옹(抱翁)으로 송강 정철(송강 鄭澈)의 손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江華島)에 갔으나 성(城)이 함락(陷落)되니 자살(刺殺)하려다가 뜻을 못이루고 그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기용(氣勇)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현창주부(縣倉主簿) 수군판관(水軍判官)등을 거치고 지방(地方) 수령(首領)을 나갔다가 치석을 올려 장렬에까지 이르렀다. 태백산(太白山)에 은거(隱居)한 오현(五賢)의 한분이다. 이조판서(吏曹判事)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절이다. 저서(著書)로는 유고(遺誥)가 전한다. 정택기(鄭澤基) 1807~1892 자(字)는 국서(國瑞)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다. 정필용(鄭弼鎔) 1823~1903 자(字)는 의청(意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였다. 정연철(鄭然哲) 1911년생(年生)으로 물야오전(物野梧田)에서 출생(出生)하여 만주간도공업중학교를 졸업(卒業)하고 동흥토건주식회사(土建株式會社) 사장(社長)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연수(鄭然洙) 1922년생(年生)으로 상운구천(祥雲九泉)에서 출생(出生)하여 면장(面長)를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동원(鄭東元) 1932년생(年生)으로 법전소천(法田所天)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학교법대(大學校法大)를 졸업(卒業)하고 농촌진흥청공보관, 법무관, 농수산부유통과장, 국립수산물검사소장, 국립수산기술훈련소장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소성(鄭昭盛) 1944년생(年生)으로 상운하눌(祥雲下訥)에서 출생(出生)하여 서울대학교(大學校) 물리대학(物理大學) 대학원(大學院) 졸업(卒業)하고 물리박사학위(物理博士學位)를 취득(取得)하여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교수(敎授)를 역임(歷任)하고 있다. 정원교(鄭源敎) 1952년생(年生)으로 봉화도촌(奉化都村)에서 출생(出生)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韓國外國語大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선경직물 관리부장(선경織物 管理部長)을 역임(歷任)하고 있다.
영일정씨 문절공 포옹 정양 선생에 대하여>
문절공 포옹 정양은 송강 정철의 둘째 아들인 강릉공 정종명의 넷째 아들이다.
문절공 정양은 병자호란이후 세상을 등지고 태백산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태백산 주변에 같이 운거했던 선비를 태백 5현이라고 한다. 그 이후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제천 금성면 월림리에 세거하였는데 이때 부터 제천에 있는 영일 정씨를 월림 정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제천의 영일 정씨는 이분으로 말미암아 충북 제천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문절공 정양은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 끓고 절하는 치욕을 당하자 서울 출신 선비 5명이 봉화의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인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인 잠은 강흡,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이 그들이다. 이들을 테백산에 은거한 다섯명의 현인이라는 뜻에서 태백오현이라 한다.
태백오현은 춘양 노리, 도심, 모래골, 버정이, 뒤뜨물 등에 터를 잡아 정착했는데 서로 간에 거리는 멀어야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와선정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영남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끈끈한 유대이다. 다섯 사람의 그때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가사문학의 巨星 송강 鄭澈 先祖
송강 鄭澈 선생은 정치인으로 보다는 국문학의 귀중한 자료를 남 긴 문인으로 더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시문학의 대가로, 가사문학의 거성으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 국민이 추앙하는 인물이시 니 자손 된 한사람으로 어찌 자랑스럽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송강(松江) 정철(鄭澈)선조께서는 1536년(중종 31년)에 나시어 1593 년(선조 26년)에 돌아 가셨다. 자는 계함(季函), 호는 송강, 부친은 돈 녕부판관(敦領府判官) 유침(惟沈 )이시며 조부는 정위(鄭渭 )이시다. 증조 인 정자숙(鄭自淑)은 김제군수를, 고조인 정연(鄭淵)은 병조판서를 지 내셨으며 5대조 정홍(鄭洪)은 시호가 공간(恭簡)이고 6대조는 대제학 을 역임하신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이시다. 뒷날 증조는 이조 판서, 조부는 좌찬성(左贊成), 부친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셨다. 송강은 대대로 청백의 가풍을 이어왔는데 특히 부친 정유침(鄭惟沈 )
은 효행과 우애로 유명하셨다. 어머님 죽산안(竹山安氏)씨 역시 효행 이 대단하셔서 외조부인 대간공(大諫公) 팽수(澎壽)는 매양 칭찬하기 를 ‘내 딸의 효행은 열 아들 못지않다’고 한 기록이 있다.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나신 송강의 가계를 보면 맏형인 자(滋)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지만,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로 인해 경원으로 장류(杖流)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 하셨
226 청풍명월 충절의 표상고 둘째 형인 소(沼)는 을사사화에 실의하여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은거 하신다.
셋째 형인 황(滉)은 명종조(明宗朝)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에 음보 되었다가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된다.
세분의 누님 중 맏누님은 인조의 귀인(貴人)이 되고 둘째 누님은 부 제학(副提學)을 지낸 최홍도(崔弘渡)의 부인이 되며 막내 누님은 종실 인 계림군(桂林君) 유(溜)에 출가 한다. 그런데 계림군 유가 무고에 의 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송강 일가는 참혹한 화를 입게 된다. 부친 유침께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남방으로 유락된 것은 송 강께서 열살 때이다. 관북, 정평, 연일 등 유배지를 따라 다니신 것도 이때다.
1551년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시자 그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 에 급제할 때 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 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 을 배우셨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 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고 진주 유씨 (晉州柳氏)를 측실로 두시니 슬하에 적출소생 4남 3녀와 측실소생 1남 1녀 등 5남 4녀를 두셨다. 문화 유씨 강항의 딸과 혼인함에 따라 사 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처 외숙으로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이 처 외재당숙으로 된다.
적출 4남중 큰아들 기명(起溟, 화곡공)은 진사로서 31세에 일찍 세 상을 뜨고 둘째 아들 종명(宗溟, 강릉공)은 문과에 장원하여 강릉부사
제5부 알고 보는 門中 사록 227를 지냈는데 형제 중 후손이 가장 번창하신 나의 11대조가 되신다. 셋째 아들인 진명(振溟, 운봉공)은 진사로서 벼슬에 나가지는 않지만 독서는 그치지 않은 것으로 전하며 넷째 아들 홍명(弘溟, 기암공)은 문 과를 거쳐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형제들 중에서 가장 학문과 벼슬이 높았다.
세딸 중 큰딸은 이기목(李基穆)에게 출가했지만 일찍 세상을 떴고 둘째 딸은 최오(崔澳)에게 출가 했으나 일찍 과부가 된지 10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셋째 딸은 목사(牧使) 임희(林檜)에게 출가하는데 임 회는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금호(錦湖) 임사수(林士遂)의 조카이다. 서출 1남 1녀중 아들 지명(之溟)은 함흥에 살았다고 하지만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딸은 무사인 권경(權暻)의 첩이 되었으나 일찍 세 상을 뜬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잠간 을사사화 등 당시의 정치상황을 살펴봄으로서 송강께 서 어린 시절 집안전체가 곤경을 치러야 했던 사연을 상기해볼 필요 가 있다.
일찍이 중종(中宗)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仁宗)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은바 있다. 1545년 중 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를 하게 되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 임(尹任)이 크게 득세한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게 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문정왕후의 동생 인 윤원형(尹元衡, 소윤)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윤임(尹任,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화옥(禍獄)을 일으킨다.
이를 일컬어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하는데 이때 윤임의 생질이며
송강의 매부인 계림군도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된다. 따라서 계 림군의 처가인 송강 일가는 을사사화의 소용들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을사사화로 아버지 유침은 관북의 정평으로, 당시 이조정랑이었던 맏형 자는 광양으로 유배된다.
2년 후인 명종 2년(1547년 송강 12세) 9월에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 어나면서 송강의 일가는 또 한 차례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정미사화 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전라도 양제역에서 조정을 비난하는 벽서 를 발견하며 비롯된다. 이를 기화로 아직도 을사년 역모의 뿌리가 남 았다고 하여 다시금 화옥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부친은 잡히어 구금이 되었다가 영일로 귀양을 가고, 맏 형 또한 잡히어 구금이 되었는데 끝내는 매를 맞고 유배도중에 타계 한다. 둘째형은 대과를 준비하던 중 통분과 환멸 끝에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은둔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송강은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 1등을 하셨고 이듬해 별시문과 에 장원급제, 첫 벼슬은 사헌부(司憲府) 지평, 이어 좌랑, 현감, 전적, 도사를 거쳐 31세에 이르러 정랑, 직강, 헌납에 이르신다. 후에 함경 도 암행어사를 지내신 뒤 32세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사가 독서를 하신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 리, 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시다가 40세인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 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으셨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 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가셨다. 이어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 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제5부 알고 보는 門中 사록 2291580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 (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의 재질을 발휘 하셨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도승지(都承旨),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승진하셨다가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셨으나 동 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사직, 고향인 창평 으로 돌아가 4년간 은 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 별곡(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시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린다. 다음에 좌의정(좌의정)으로 오르셨고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로 건저(建저) 문제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계락에 빠져 光海君의 책봉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 던 왕의 노염을 사서 파직당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로 강계로 이배되셨다.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에 사은사(謝 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셨다. 다시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 화의 송정촌에 우거 하시다가 1593년 12월 18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서거 하셨다.
처음은 고양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진천으로 옮겼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 4편의 가 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 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編)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 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에 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 품집인 송강가사가 있고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하고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 의성본, 관록본, 성주본, 관서본의 다섯 종 류가 알려져 있으나 그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일부만 전한다.
또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가 있으며 한시 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 서원, 연일의 오천서원 별사에 제향 되셨다.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 시다.
비문에 쓰인 송강선조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수충익모(輸忠翼謨) 광국추충(光國推忠) 분의 협책(奮義協策) 평난공신(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光輔國崇錄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영 경연사(兼領 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 秋館事)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공(鄭公) 신도비명(神道碑銘)
1994년 송강 선조 돌아가신지 4백년, 이해 4월 5일을 기해 대대적 으로 추모행사를 가지니 추모행사 집행위원(종친회 부회장)의 한사람으 로 그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한 일은 여간 보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송강 선조께서 지으신 訓民歌는 만고불후의 명작이다. 또다시 그 몇 수를 옮겨 적는 감회가 남다르다.
제5부 알고 보는 門中 사록 231松江 鄭澈선생 訓民歌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끝없는 은덕을 어이 다해 갚으리까
어버이 살아 신제 섬길 일은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에 애통한들 무엇 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라
뉘손에 태여 났길래 모양조차 꼭 같은가 한 젖 먹고 자랐으니 딴마음 먹지마라
한 몸을 둘에 나눠 부부로 태내시니 살았을 때 함께 늙고 죽으면 같이 간다 어디서 망녕의 것이 눈 흘기려 하는가
아!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할꼬
아! 저 아저씨 옷 없이 어찌할꼬
험한 일 다 말하여라 도와주려 하노라 이 고진 저 늙으니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으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다 하거늘 짐을 조차지실까 오늘도 날이 샜다 호미 메고 가자꾸나
내 논 다 매 며는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 길에 뽕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꾸나
비록 못 입어도 남의 옷을 빼앗지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빌리지 마라 한때도 때 묻어 지면 다시 씻기 어려우리라
송강 鄭澈의 억울한 누명
- 기축옥사 진실 밝혀지다 * 기축옥사란
서기 589년 기축년 겨울에 벌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 전과 후 조선 정치 풍토를 갈라버린 참혹한 사건이었다. 논리로 싸우던 당쟁 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으로 변해버린 사건이다. 기축옥사는 서 인이었던 정여립이 하룻밤 새에 여당인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그 가 반역을 꿈꾸다 발각돼 벌어진 사건이다. 역적 토벌을 빌미로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가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참극이 라고 전해진다.
당시 선조의 명을 받아 정여립 사건을 수사한 책임자는 서인의 당 수 송강 정철이었다. 또한 정철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조사하면서 호남지역 선비들에게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상소를 올리게 해 이를 이용했다는 소문을 두고는 우리나라 최초로 ‘투서문화’를 만든 장본인이 정철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이어져 온다.
이런 가운데 최근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기축옥사의 진실을 기 록한 ‘선비 1000명 학살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왕 선조’란 제하의 기 사에서 己丑獄事 때 선비 1000명을 학살한 주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 왕 선조였다는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종인 기자는 이 기사에서 과연 정철이 주범(主犯)인가라는 화두 를 던지고 수사를 빌미로 정적을 떼로 제거하기는 했지만 주범은 아 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범은 선조라고 단정한다.
* 기축옥사의 사건의 시작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는 기축옥사의 시작을 1589년 10월 2일자 선 조실록에 의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589년 음력 10월 2일 황해감사로부터 임금에게 비밀 서장이 접수 됐다. 이를 친람한 선조는 그날 밤 정승과 승지를 모두 소집시켜 회 의를 열었다. 그리고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와 선전관(왕명을 받 은 무관)을 파견했다.
동인 정여립의 반역 첩보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이르는 동인이 죽거나 유배당한 대 참극이었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에 있는 죽도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꾸리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전라도 진안현감 민인백이 토역 대장으로 죽도에 은거하던 정여립 세력을 토벌했다. 관군에 포위된 정여립은 땅에 칼을 세워 목을 스스 로 찔러 죽었다. 정여립 시신은 서울로 압송돼 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다른 역당도 마찬가지였다.
옥사를 지휘한 서인 당수 정철은 21세기까지도 학살극 총책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런데 여러 기록은 자기 권력을 위해 정철을 조종한 당시 최고 권력자 선조를 주범으로 가리키고 있다.
* 기축옥사의 주범은‘선조’
박 기자는 선조를 주범으로 단정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열거했다.
정여립이 자살하고 동인으로 구성된 역적들이 대거 처형된 다음에 도 선조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역모 적발 한 달 만에 선조는 전국 에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렸다. ‘초야에 사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각 각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을 펴서 숨기지 말고 극언하여 나로 하여금 위아래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라.’(1589년 11월 1일 선조수정실록) 구언교지는 상소 내용이 그 무엇이든 벌하지 않겠다는 면책 선언 이다. 대개 구언교지는 국정에 대한 충언을 구해야 마땅했지만, 이번 교지는 섬뜩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경고에 다름없었다. 봇물 터지듯 상소가 몰려왔다. 그 가운데 우의정 정언신과 이조참판 정언 지가 정여립과 친하다는 상소가 있었다. 정언신은 정여립 사건을 조 사하는 재판장, 위관(委官)이었다. 11월 7일 정언신은 위관에서 즉각 사퇴했다.
다음 날 선조는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을 불러들여 우의 정에 임명했다. 사양하는 정철에게 선조는 세 번이나 내시를 보내 입 궐을 명했다. 정철이 병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자 선조가 “가마에 실 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고 일렀다. 결국 서인 당수 정철이 정여립 역모사건의 특검단장이 됐고 향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됐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3년 동안 조선 정계를 휩쓸었는데도 그 실 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부터 이 모든 수사 과정을 과연 정철이 지휘했는지까지, 동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을 천하의 모사꾼으로 표현했고 서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 철이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이를 변호했다고 기록했다.
서인은 오히려 정철에 이어 위관에 임명된 류성룡이 이발 가족을 포함한 거물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록 또한 북인이 쓴 ‘선조실록’과 서인이 쓴 ‘선조수정실록’ 기록이 각기 다르다. 이긍 익이 쓴 사서 ‘연려실기술’은 아예 ‘동인 기축록은 파란 점(靑點)을, 서 인 기축록은 붉은 점(紅點)을 달았다’고 구분해놓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의 전말이, 4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몸통이 따로 있 었기 때문이다. 토역관으로 파견된 진안현감 민인백은 토역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내려 보낼 때 적가문 서를 압수해오라고 명했다.’적가문서(賊家文書)’는 역적 집에서 나온 문서 일체다.
정여립이 쓴 글은 물론 정여립이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도 포 함돼 있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친히 명을 내려 그 문서들을 수거 해오라고 지시했다. 수사 독려를 위해? 아니었다. 선조는 그 문서를 추국청에 넘기지 않고 본인이 독점하고서 친국(親鞫), 직접 수사를 한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우의정 정언신은 이들을 따로 만나 자기 이름 이 있는 문서는 없애달라고 청했다. 정언신은 정여립의 먼 친척이었 다. 선전관 이용준은 정언신 이름이 있는 문서는 다 파기해버렸다. 하지만 글자를 몰라 형 정언지(이조참판)의 호인 ‘동곡(東谷)’과 ‘집안 연장자’를 뜻하는 ‘종로(宗老)’가 적힌 편지는 없애지 못했다.
선조가 수사 회의에서 ‘종로’ ‘동곡’이 있는 편지를 흔들며 물었다.
236 청풍명월 충절의 표상“이게 누구냐!” 정언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조가 대로했다. “내가 일찌감치 이 편지를 꺼내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고 염려되는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다. 이런 미욱한 놈이 정승을 한다 는 말인가!”
선조는 정언신에게 중도부처형(일정 장소에 안치하는 형)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선조는 적가문서에서 정언신이 쓴 편지 19장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나를 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인가?”
수사관들은 파직되고 정언신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죽었다. 전 병조참판 백유양이 혐의를 부인하자 선조는 그를 친국하 며 역모가 가장 심한 편지를 골라 보냈다. 곡성현감 정개청 또한 임 금이 보낸 편지로 혐의가 드러났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최영경은 선조 친국 때 역적과 서로 통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가 선조가 내민 편지 두 장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매사가 그러했다.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국왕 앞에서 그 어떤 위관(재판장)도 그 어떤 추관(심문관)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동인 당수 이발을 친국할 때 이발의 편지 9장을 흔들던 선조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 모든 신하가 오들오들 떨었다. 비 판 세력을 철저히 도태시켜 왕권을 절대화하려 한 왕이었다.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목적을 달성했다. 유배를 보낼 사람을 사약 을 내려도 감히 대들지 못했고, 사약으로 마땅할 자를 찢어죽이라고 해도 위관과 추관은 우물쭈물댔다.
선조가 그들에게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