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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寶城宣氏) 연원(淵源)
선씨(宣氏)의 연원(淵源)은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손인 선왕(宣王ㆍ姬靜), 문왕의 넷째 아들 주공(周公ㆍ姬旦)의 후손인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5세손
선백(宣伯.叔孫僑如), 송나라 선공(宣公ㆍ商(殷)나라 子太乙의 후손으로 이름은 子力)의 후손들이 ‘선(宣)’으로
성을 삼았으니 BC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제곡(帝喾)의 직계이며, 황제[黃帝ㆍ姬姓]의 후손들이다.
우리나라
선씨(宣氏)들은 ‘한서(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한(漢)나라 말에 많은 선씨(宣氏)들이 해동(海東)으로 피난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선씨 족보에
의하면 백제(百濟) 이전부터 복호촌(伏虎村ㆍ복흘<伏忽>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전남 보성)에서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AD원년 전후부터 한반도로 꾸준히 이동해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선씨(宣氏)는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하는 도촌파와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하는 갈몰파로 양분되어 있는 보성 선씨(寶城宣氏)를 비롯하여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이 알려지지 않은 광주 선씨(光州宣氏)와
밀양 선씨(密陽宣氏)가 있지만 모두
동원(同源)으로 보고 있다.
●호구첩(戶口帖)과 원문
기록한 호구첩(戶口帖)과 원문(클릭!).
도촌파시조 선용신(宣用臣)에 대해서는 세종 3년(1421년) 호조(戶曹)에서 생성한
호구첩(戶口帖)에 중의(仲義ㆍ1358~1423)의 증조부며 진사(進士)로 등록되어 있다. 이 호구첩(戶口帖)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호구첩(戶口帖)을 병란으로 유실하였기에 중의(仲義)가 증빙서류를 붙여 보성군에 재발급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보성군은 엄밀한 실사를 거처 전라도
도관찰출척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에게 진달해 세종 3년(1421년) 호조(戶曹)의 공인을 받은 공문서로 후손들이 600여 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훈된 사람들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증서인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는 8명의 도촌파를
포함한 28명의 보성 선씨(寶城宣氏)의 이름이 올라 있다. 보성군 득량면 호음동 마을에는 도촌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인 1등공신
여경(餘慶)과 2등공신인 그의 아들 해수(海壽)ㆍ인수(麟壽), 종제(從弟)들인 필백(弼伯)ㆍ경백(敬伯)ㆍ청원(靑元)을 기리기 위한
‘보성선씨육충절의비(寶城宣氏六忠節義碑)’가 세워져 있다.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인 여경(餘慶)은 자는 경숙(敬淑), 호(號)는
도암(道庵)으로 명종 14년(1559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ㆍ주부(主簿))ㆍ도사(都事) 등의 직을 수행하다가 1591년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중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이하여 종군하게 되었다. 불효를 무릅쓰고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서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말하자 종형제들도 앞다투어 “사나이가 죽어야 할 때가 이때이다” 하면서 모두 종군하였고,
여경(餘慶)은 선전관(宣傳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다 평양전(平壞戰)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여경(餘慶)의 장자(長子)인 해수(海壽)는 자는 성관(聖觀), 호는 덕재(德齋)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다. 적의 무기를 빼았아
수십 급을 죽이고 부친(父親)이 순절(殉節)하자 비통함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찌 살 것인가 하고 떨처 싸우다 절사(節死)하였으며, 당시
전리품(戰利品)이 후손의 집에 보관되고 있다. 한편 그의 아우 금군(禁軍) 인수(麟壽)도 부형(父兄)과 함께 평양성 전투(戰鬪)에서
순절(殉節)하였다.
그외에 참봉(參奉)인 필백(必伯)ㆍ경백(敬伯) 형제와 훈련봉사(訓練奉事) 청원(靑元)도
순절하여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청원(靑元)의 형인 봉사(奉事) 백원(伯源)도 순절하여 보성 선씨를 충절의 가문으로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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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갈몰파의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보성선씨족보(寶城宣氏族譜)’에 의하면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로 고려 우왕 8년(1382년)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한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한다. 그후 그는 고려에서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어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倭寇)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남 보성(寶城)에 은거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寶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성 선씨(寶城宣氏)의 도촌파와 갈몰파는 조선 숙종
7년(1681년) 관산(冠山) 보림사(寶林寺)에서 두 파가 모여 선중의(宣仲義) 호구첩(戶口帖)을 근간으로 모든 보성 선씨의
가승(家承)ㆍ기안ㆍ비망록을 모아서 ‘신유보(辛酉譜)’ 초안을 완성하였다. 그후 영조 14년(1738년) 보성 개흥사(開興寺)에서
‘신유보(辛酉譜)’의 수정본을 만들 때 선윤지(宣允祉) 후손 중 몇 사람이 선대(先代) 2대(宣用臣과 宣儒)를 의조(疑祖ㆍ의심스러운 조상)로
몰아부쳤고, 영조 25년(1749년) 도촌파의 시조 선용신(宣用臣)을 삭제하고 선원지(宣元祉)의 후손들을 제외한 채 별보(別譜)를 하므로써 두
개의 보성 선씨(寶城宣氏)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근에 시조에 대한 견해는 달리하면서도 분명한 형제 혈족임을 인정하고 계속 합보(合譜)를 위해
노력 중이다.
갈몰파시조 선윤지(宣允祉)는 호는 용암(龍菴)ㆍ퇴휴당(退休堂)으로 명나라 때 명전(明殿) 시책(試策)에 장원급제하고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로 있다가 고려 우왕 8년(1382년)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으며, 고려 조정에서는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를 제수하여 우리나라에 영주(永住) 귀화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안렴사(按廉使)를 겸하면서 전라도 해안 지방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여 가문을 열었고 후손들은 보성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선윤지(宣允祉)는 안경(安景)ㆍ안혁(安赫)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안경(安景)의 장남 구령(龜令)은 부사공파(副使公派)이며,
◆안경(安景)의 차남 학령(鶴令)은 선전공파(宣傳公派)이다,
◆안혁(安赫)의 장남 광유(光裕)는 참판공파(參判公派),
◆안혁(安赫)의 차남 명유(明裕)는 참의공파(參議公派),
◆안혁(安赫)의 삼남 청유(淸裕)는 순무사공파(巡撫使公派)
모두 5개 파로 분류하여 무오보(茂午譜)를 제작 분질하였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4세 화(和ㆍ호조참판 광유의 아들)는 태종 때 여산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특히 그의 아들 형(炯)을 비롯하여 거이(居怡ㆍ형의 증손)ㆍ세강(世綱ㆍ시조의
9세손)ㆍ약해(若海ㆍ시조의 10세손) 등이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충절을 다함으로써
사람들은 이들을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라 일컬었다.
형(炯)의 증손 거이(居怡ㆍ1550∼1598)는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도사(都事) 상(詳)의 아들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비장(飛將)’으로 지략(智略)이 출중해 크게
명성을 떨쳤다. 선조 2년(1569년) 선전관(宣傳官)에 등용되고, 다음해 무과(武科)에 급제, 선조 19년(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선조 20년(1587년) 녹둔도(鹿屯島)에서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같이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女眞族)을 격퇴시켰으며, 성주목사(星州牧使)ㆍ전라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이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에 부원수(副元帥)를 겸하고, 행주(幸州)ㆍ운봉(雲峰)
싸움에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왜군을 격파한 후 계속 전공을 쌓아 7도의 병마사(兵馬使)를 겸했고,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함대에
종군하여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선조 31년(1598년) 울산(蔚山) 싸움에서 명나라 군사와 함께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추봉(追封)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선씨오충신(宣氏五忠臣)’을 모신 보성 오충사(五忠祠).
부사(府使) 의문(義問)의 아들
약해(若海ㆍ1579∼1643)는 자는 백종(伯宗), 호는 강의재(剛毅齋)로 선조(宣祖) 38년(1605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인조 9년(1631년) 비변사 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에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했다고 추천되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했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品階)가 승진되고 금변(金鞭)ㆍ초구ㆍ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으며, 이때의 일을 ‘심양일기(瀋陽日記)’로 남겼다.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르러 임지에서 죽었으며, 보성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8세손 극례(克禮ㆍ1556~1597)는 자는
예중(禮中), 호는 의재(義齋)로 선조조(宣祖朝)에 가선대부 겸 훈련도정(嘉善大夫兼訓練都正)을 지낸 여침(汝沈)의 아들이다. 선조
9년(157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친 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행대호군(慶行大護軍)으로 임명되어 부산포(釜山浦)ㆍ웅천(態川)ㆍ마진(馬津)ㆍ울산(蔚山) 등 여러 전투를 치루시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선조
21년(1598년) 신령면(新靈面) 전투에서 퇴진하던 적군 잔멸(殘滅)을 진두에서 독전하다 순절(殉節)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어 울산 충의사(忠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약해(若海)와 함께 충절(忠節)로 가세(家勢)를
드높인 세강(世綱ㆍ1576∼1636)은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으로 봉장(鳳章)의 아들이다. 선조 36년(1603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벽단진 첨사(碧團鎭僉使)를 거쳐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을 감축(監築)했다.
홍주영장(洪州營將)을 거쳐 안동영장(安東營將)이 되어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허완(許完)과 함께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대전 중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선조 4위와 더불어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