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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빈 목사 편 ∙∙∙∙∙∙∙∙∙
●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졸업(18기)
●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70기)
● 워싱톤 침례신학대학원 D. Min 학위 취득
● 서울장로회 신학대학교 총동문회장
● 現 동부제일교회 담임목사
◈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 심판의 표 (살후 1:5)
경기도 하남시 덕풍2동 산 46번지
동부제일교회(예장)
전화 (0347) 791-7883-5
FAX 791-7886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장사된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약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셨고 제자들에게 열 한번을 나타나셨습니다. 두세 명 있는 자리뿐만 아니라 오백여 성도가 있는 곳에서도 일시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리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기 이전에는 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고 예수님 앞에서 고백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심문 받는 장소에 따라갔다가 계집아이 하나가 묻는 말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묻는 말에 그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평생 새벽닭이 우는 소리만 들리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 받고 난 이후에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세례를 받아야 주님이 원하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나를 보아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걸음걸음이 승리의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부르짖고 간구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믿고 기도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었고, 분명한 맛이 있었고, 분명한 색깔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약속을 믿고 간구하고 기도해서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여기서 말하는 권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종전에 생각하던 권능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 권능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안에 오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권능입니다. 이것은 능력 그 자체인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안에서 바로 그렇게 주님이 역사를 하셨습니다. 바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 안에는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 안에서 다시 사신 주님의 능력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이 역사하시면 그 사람이 바로 능력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주님의 능력이 믿음으로 역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 모두 다 복음증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됩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우리가 사는 이곳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있는 이곳이 어떤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살기 좋은 도시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어떤 도시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도시는 내가 잘사는 내가 원하는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내가 원하는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도시를 만들어 가려고 하면 뭘 만들겠습니까? 황폐한 도시, 퇴폐의 도시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은 지금까지 전부 그러한 것들입니다. 파괴하는 도시, 망쳐놓는 도시, 퇴폐를 조성하는 도시, 그런 것 밖에는 생각해 내는 게 없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그 현장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원하는 도성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시를 만들어 가도록 힘쓰셔야 합니다.
유대는 어디입니까? 당연히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내가 그 일역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사마리아는 어디겠습니까? 사마리아는 어디일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일본일까요? 아니면 중국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사마리아는 북한입니다. 여러분 북한이 저렇게 기근(饑饉)으로, 한해(寒害)로 어려움을 당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은 그냥 우연히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만약 통일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북한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으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이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전한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못먹고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당신들은 보고만 있었습니까? 외면하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내 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을 달라고 목을 놓아 울고 있을 때 그리고 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피눈물을 쏟고 있을 때 당신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그런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가는 통일이 되어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저렇게 굶주리고, 저렇게 헐벗고,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나누어주고, 빵을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어 줄 때 어떻게 되겠어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들어가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미 사랑으로 뿌리고 다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막중한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저는 바로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죽기까지 충성을 해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서 내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 충성을 다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과 나를 위해서 피를 쏟고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부끄럽지만,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미 내 안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성령을 제한시키고, 성령을 소멸시키며 살아서 마치 성령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성령님 앞에 너무나도 죄송스러운 죄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성령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을 소멸하고, 제한하고, 근심시키며 살아온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이제 성령님께 다시 붙잡아 달라고,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내가 되고, 주님이 내 안에서 마음껏 역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정말로 내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이북뿐 아니라 온 세계에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나를 증인으로 써달라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만족스럽지 않는 나로 이렇게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인생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실패자로 끝날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실패자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만족스럽지 않은 나의 생을 살아간 그 생애의 끝날이 바로 실패자의 인생이지 어떻게 성공자의 인생입니까? 그것은 끝입니다.
오늘을 여러분에게 영원히 기억에 남는 날로 잡아놓으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로 결단을 하세요. ‘주님 이제는 진짜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정말로 주님의 자녀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집사다운 집사가 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장로가 되겠습니다.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먹어도 주를 위해서 먹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셔도 주를 위해서, 일을 해도 주를 위해서 일을 하겠습니다. 기도를 해도 주를 위해 기도하겠고, 말씀을 봐도 주를 위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제 정말로 주님의 사람되렵니다.’ 결단을 하고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또 성령께 용서를 받고 나를 다스려달라고 인도를 받으세요.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돌아오기를, 진짜 돌아오기를 그래서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심판의 표
살후 1:5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시적인 심판입니다. 일시적인 심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멸망과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심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내용으로 심판을 하려고 하니 준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표'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랐는지 자라지 않았는지를 심판하십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심판의 표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 사랑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저는 하나님에게 빚진 자 입니다.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었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표입니다. 세 번째는 여러분들과 제가 믿음의 길을 가면서 얼마나 인내했는지 심판을 하십니다. 이상과 같이 세 가지로 심판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 심판에 대해서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첫 번째 표는 믿음의 성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난 이후에 몇 년 전보다 내 믿음이 자랐는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나려면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주일을 거룩히 지켜라! '아멘. 알았습니다. 제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었으면 영혼의 양식이 되어서 삶으로 나타나야합니다. '아 그래 내가 주일날 자꾸 외도하는 것이 있구나. 주일을 범하는 것이 있구나', '이것은 끊자'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어 보니까 믿음이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중 ‘십일조를 드려라 그러면 네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복을 주리라’는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는 대로 실천해야만 믿음이 자라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읽었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새겨놓았습니다.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저의 믿음이 자라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심판의 표’, ‘심판의 기준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자랐으면 칭찬과 상급이 있고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책망이 있고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밑에 있었습니다. 그때 밑에 한 아버지가 간질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기도부탁을 합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만 간질귀신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좇아옵니다. 그리고는 “할 수 있거든 제 아이를 깨끗케 해 주옵소서. 고쳐주십시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을 하시고는 귀신을 좇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거뜬하게 낫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왜 우리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없느니라!”
이것은 기도 외에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이 없느니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이 얼마만큼 자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더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먹고 인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하늘은사를 체험하고, 믿음이 죽죽 자라나서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역사가 나타나는 일꾼이 되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성장이 첫 번째 표입니다.
처음에는 십일조만 드리다가 감사함을 깨달아 감사헌금을 하고 더 나아가 선교헌금, 구제헌금을 드리고 교회에 봉사할 것이 없나 찾아봐서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믿음이 성장한 일군입니다. 그 사람이 심판의 표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2. 사랑이 풍성해야합니다.
이것이 심판의 표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삶에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가. 이것이 심판의 표의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사랑의 빚진 자라.” 자기가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데 찬성하는 그런 못된 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절 참으시고 자기를 불러 주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그것만이 자기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평생을 몸부림치며 살아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사회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볼티모어에 있는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이백 명을 조사해서 보고서를 내라고 하니까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전혀 장래가 없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이런 보고를 합니다. 세월이 흘러 25년이 지난 다음에 다른 사회학교수가 그 연구 보고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25년 전의 이 결과가 지금 어떻게 나타났는지 학생들에게 조사하게 했습니다. 사망한 사람 20명을 빼고 나머지 180명이 다 그 지역에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에 178명이 전부 상류층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변호사, 의사 등 각계 각층에서 성공을 했습니다. 너무 놀라서 그 178명을 한사람씩 찾아가서 질문을 했습니다. 25년 전에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우지도 못했던 당신들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하나같이 대답한 말이 저희에게는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 때문입니다. 아직 생존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형편없는 환경속에서 어떻게 가르쳤기에 아무 희망이 없어 보였던 아이들이 오늘날 이토록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그 교육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사람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그저 갖고 있기만 하면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어 기갈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나눠줄수록 여러분들의 삶은 사랑으로 풍성해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자라나면 누구에게 축복이겠습니까? 바로 나에게 축복입니다. 사랑이 풍성하면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배려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랍게 섭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3. 믿음으로 인내했느냐 인내하지 못했느냐가 심판의 표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난 이후에 천성을 향해서 믿음의 길을 곧게 갔느냐 아니면 세상의 명예, 지위, 향락에 흔들리는 삶을 살았느냐. 이것이 심판의 표다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돈이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소망은 과연 무엇입니까? 영혼이 목표이고 초점이면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육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형편없는 길을 가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생활의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고난의 길을 저 천성을 향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다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가기만 하면 된다’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새문안 교회에 나실필 이라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박정희 장군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 같이 참여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혁명이 성공한 후 박정희 장군이 혁명에 참여했던 동지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열었습니다. 나실필 장로님은 그 당시 집사였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술을 한잔 따라 집사님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밝히고 끝까지 거부합니다. 마침내 박정희 의장이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화가 치밀어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상태로 파티는 끝나버렸습니다. 집사님은 집에 돌아와 불려 갈 때를 기다렸습니다. 불려가면 바로 군복을 벗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불려갔습니다. 도착하니 박정희 의장이 예상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자네의 믿음을 존경하네. 믿음의 절개를 존경하네. 자네 같은 사람이 나의 동료라는 것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네. 고맙네.” 그러더니 오히려 집사님을 준장에서 소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을 심판의 표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돈을 봐도 흔들리지 않고,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슬퍼도 흔들리지 않는 이런 믿음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사랑이 넘쳐나야 됩니다.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가는 그 모습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환봉 목사 편 ∙∙∙∙∙∙∙∙∙
● 고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Th.B.)
●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Th.M.)
● 남아Potchefstroom University 대학원 졸업 (Th.D.)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교의학)
▣ 저서와 논문 ▣
◉ 현대 복음주의 성경관
◉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 : 현대인을 위한 개혁신앙과 윤리
◉ Historical Criticism of the Bible :
A critical examination of its validity as a recognized priniciple for biblical hermeneutics. 그외 다수 논문
◈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25-37)
606-701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149-1
☎ 400-2114, 총동문회(400-2235) FAX:403-5349
http://www.kosin.ac.kr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한 유대인 율법사의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하는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사실상 이 율법사의 질문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옳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질문이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즉 “나의 사랑을 받고 나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는 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편협된 민족적 선민사상의 우월감과 종교적 위선으로 가득 차있던 이 교활한 율법사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 “이웃”을 자신의 동족과 친족이라고 말한다면 당당히 자신의 지혜로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 이웃에 세리와 죄인들을 포함시킨다고 한다면, 반(反)율법주의자로 예수님을 몰아서 궁지에 몰아 넣을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율법사의 질문에 우문현답(愚問賢答)으로서 지혜롭게 율법사의 양심을 힐난하셨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시기보다는 “그들 중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이웃에 대한 참된 정의이자 올바른 이웃에 대한 신앙적 가치관일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이웃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본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웃에 대한 정의는 바로 내 자 신이 이웃의 대상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들 중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이 질문은 “이웃”은 자격을 따라 결정되는 내 주변의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 이웃은 바로 내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인에게 강도 만난 그 유대인은 전혀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나 생각에 있어서나 특히 민족적 감정으로 보아도 분명 그렇게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위급한 경우에 처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유대인에게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서 그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자비심은 민족적 감정의 한계를 넘어 뜨거운 인류애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도움은 때와 장소와 경우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달려가 도움이 됨으로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선한 이웃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은 되어 주는 것이요, 스스로 내 자신을 그 선한 이웃으로 계속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라고 질문하는 이 율법사는 자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어떤 대상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할 사랑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먼저 찾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의 주체로 보셨던 것입니다. 부언하자면, 이웃이란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본질적 생각은 이웃이란 그 자격적인 조건에 따라 항상 고정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던진 질문은 이웃은 항상 새롭게 계속 만들어지는 존재로서 자격 여하에 의하여 결정되는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현재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행함으로써 너 자신을 계속해서 그들의 선한 이웃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율법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율법사는 자신이 바로 그 사랑을 실제 베풀어야 할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꾸로 자신 밖에서 자격을 두어 자기의 이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이웃의 한계를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사랑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다”(눅 7:34)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친족과 민족에 대한 이기적인 그 사랑만으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이웃을 그 자격 여부를 따라 선정하려고 한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라고 한 그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의하여 사랑의 대상을 자기 동족과 친족에게만 국한시켜 거짓된 자신의 의를 과시하려고 하였던 실로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산재해 있다는 것을 각종 방송매체나 지면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니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주위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많은 부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사처럼 내 자신과 가족, 주변의 대상자들에 대한 사랑에만 사로잡혀 만족해하고 자랑만 한다면, 우리 역시 영적 교만과 종교적 위선에 사로 잡혀 있는 이 율법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2. 이웃사랑은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말과 혀로서만이 아니라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실제적입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동정심은 결코 사랑을 가장한 위선과 가식일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실로 온전한 사랑의 실천을 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면에 레위인과 제사장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의 그 절박한 요구보다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종교 의식상의 절차를 더 우선시켰던 비겁한 위선적인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커다란 계명 두 가지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첫째, 수직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수평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워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이제는 회당에서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조하며 가르쳐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한 어려움에 처한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사랑의 이상은 제 아무리 지고지순한 이상일지라도 진실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실상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약 2:15-17, 요한1서 3:17-18).
우리의 사랑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은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의 결론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실제적 행함이 있는 진실한 사랑으로 진정한 선한 이웃이 되어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영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우리의 영원한 선한 이웃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의 명령이자,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혹은 다른 원인으로 인해서 불행 속에 처하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무모한 행위로 사경에 처하였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행자처럼 스스로 자신의 불행을 초래한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 주변의 수많은 노숙자(露宿者)들의 초라한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참담한 고통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책임을 논하기 전에 과연 우리 교회는 이 모든 불행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과연, 우리는 이 나라의 영적 제사장과 정신적 파수꾼 그리고 물질적 청지기들로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하여 왔는지? 스스로가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실천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이 고통은 지난 날의 성장과 부요 가운데서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였던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이기도 하며,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진정한 회개와 새로운 순종을 시험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마태복음 25장과 신명기 15장을 주석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것과 같은 죄악이며, 그러한 죄에서 떠난 우리의 새로운 감사와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대리인과 수령인들로 임명하여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의 대리인과 수령인들로 생각하면서 참으로 그들을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우리 자신과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고 새롭게 순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고통은 나누어 질 때, 그 짐은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한국의 기독신자들이 부지런히 많이 벌어서 내가 적게 쓰고 필요한 자에게 많이 나누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며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하여 가난해지셨다고 하셨습니다(고후 8:9).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가난해지심을 생각하시면서 우리도 조금씩 가난해진다면 우리도 조금씩 나누어줄 수 있는 참으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조그마한 사랑의 실천이라도 그 도움을 기다리는 손길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불행에 처한 그들이 도움과 사랑받기 원하여 손을 펴고 나에게 달려오기 전에, 먼저 내가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신자들끼리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은 하나님의 사랑만큼이나 넓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 어떤 민족, 그 어떤 지역, 그 어떤 형태의 사람이던 간에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오늘의 선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에 불러모으신 것은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로서 우리를 이 세상 속으로 파송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진정 오늘 우리의 사랑은 말과 혀로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오늘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선한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해 오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