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아버지, 길을 가다>
아버지, 길을 가다
- 격전지 다부동에서
열여섯 새 각시를 빈집에 홀로 둔 채
보던 책 밀쳐놓고 끓는 피 총에 감아
퍼붓는 물동이포탄 그 속으로 뛰어들다
탱크와 자주포가
곡사포와 기관총이
마주보며 쏘아대는 승자 없는 불잉걸 속
밤마다 바뀌는 주인 유학산의 핏강이여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명命한 상관
그 앞에 몸을 던져 흩어지는 새파란 꿈
갓스물 볼 붉은 혼이 다부동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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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몸이야
바다에 묻혀
푸른빛을 토하지만
달구면
하얀 순정
별빛으로 오고 있다
물의 뼈
사리로 굳어
하얀 탑을 쌓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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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포의 새벽
먼 산은 흑백으로 고즈넉이 숨을 쉰다
물안개 피워 올린 선사의 맑은 입김
불그레 여는 하늘에 눈 비비는 늪의 문
통나무배 삿대 끝에 생업을 짚는 어부
길을 넘는 물길 속에 원시는 살아 있고
뿌옇게 젖은 산빛이 물속에서 눈을 뜬다
청둥오리 부초 헤쳐 보금자리 맴을 돌다
어미 따라 줄을 짓는 노란 부리 청록 깃털
새벽빛 긋는 파문이 광배처럼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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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척金尺
목숨 재는 신물로 이 땅에 내려와서
숨구멍 틔워주며 영혼을 불어넣던
금자[金尺]의 서라벌 춤판, 백성들은 환했다
탐욕을 잠재우려 숨겨 묻은 금척원金尺院*에
강산을 찢는 뇌성 조국의 시린 통한
동해의 푸른 숨결이 깨어나라 자[尺]질한다
경주시 금척리 고분군(사적43로)으로 50여 기였으나 일부 훼손, 멸실되어 현재 32기의 고분이 남아 있다. 신라초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금으로 만든 자를 숨기기 위해 여러 기의 가짜 무덤을 만들었으며, 왜인들이 무덤을 파헤칠 때 뇌성벽력이 쳐 금 자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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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 꽃
직지사 요사채에 때죽나무 지켜섰다
하얀 꽃 별빛으로 발아래 수놓는데
그 위에 독경소리는 나비되어 앉는다
장삼도 무거워서 던져놓은 정토인가
뻐꾸기 능선 따라 골을 파며 우는 한낮
머리 위 내려앉은 꽃 법어되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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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샘*
하늘이 지어놓은 금정산 금샘 안에
조각달 흰 구름도 몸을 적셔 건너가고
첫사랑
연붉은 사연
꽃잎 하나 떠 있다
짚어보면 겨운 삶도 한 모금 차가운 물
갈구하던 욕망마저 갈대마냥 흩어 놓고
봄바람
잔잔한 물속
얼굴 하나 떠 있다
부산 금정구 향토문화재 1호, 금정산 해발 600m에 위치한 바위 맨 꼭대기에 둘레 3m, 깊이 20cm 규모로 형성된 샘, 세종실록지리지에 위치와 크기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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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초당에서 길을 열다
승냥이 기웃대고 시린 달빛 밀려와도
한 길로 솟는 생각 송곳되어 달을 뚫고
찻잔에 가득한 별빛
주렴으로 드리운 밤
은하에 붓을 찍어 세상사 꿰뚫어도
실용치 않는 궁리 사치요 우상이라
날마다 벼리는 생각
정수리에 꽂힌다
길이 끝나는 곳에 새로운 길을 내며
유폐의 무게조차 지렛대로 들어올려
구만리 퍼지는 묵향
가는 길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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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얼음장 갈라놓는 계곡물 맑은 소리
노스님 번뇌 속에 법당마다 불이 피고
산짐승
목메인 울음
풍경인양 떨어진다
지워진 발자국에 낙숫물이 기척하고
꽃대궁 솟은 자리 무지개로 피는 법문
천년 꿈
이끼를 얹어
돌부처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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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鸚江灣
꾀꼬리 눈물바다 남해의 앵강만에
세상등짐 내려놓고 스스로 유배된 몸
한두 잎 뜰 앞의 박하
찻잔마다 띄운다
꽃무늬 찍고 간 새발자국 따라가면
달빛은 물을 뚫어 시어詩語를 낚고 있다
노老 화가 바닷물 찍어
붓 간대로 맡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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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어둠살 헤치면서 새벽이 홰를 친다
현무암 우렁이길 깨어나는 돌밭 너머
왕소금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선 어머니
자식들 콧물 닦고 허물 덮던 무명치마
풀 먹인 홑적삼은 갯바람에 선득해도
허리끈 질끈 동이어 힘주어 걷는 발길
야수처럼 몰려와 발톱을 드러내면
절벽으로 막아서며 삼키는 하얀 울음
생애는 세월의 더께 소금보다 짠 것을
허기 채운 짭짤한 땀 서둘러 오는 길목
길섶의 질경이 신발소리 홀로 듣고
올레길 굽은 등 위로 초승달만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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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름을 짜며
돗자리 깔아놓고 참깨를 터는 한낮
감치는 시절 맛을 아릿하게 그려보면
굴곡진 세상살이도 눈 녹듯이 스러진다
깨를 볶는 화덕에는 진한 향이 넘쳐나고
봄나물 버무리면 자배기에 햇살 가득
천리향 만리향 해도 이만 못한 입맛인 걸
베보자기 둘러쓰고 소신공양하는 건가
골수를 뽑아내어 골고루 나누시던
어머니!
깻묵 되셨네
텃밭에서 웃음 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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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두레상 모여앉아 끓인 된장 먹기도 전
임진년 악령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무참히 내리친 칼날 베어지는 생목숨
팽개쳐진 팔다리가 발버둥쳐 우는 산천
귀와 코 소금 절여 바다 건너 버려졌네
적들의 전리품들이 눈물비에 젖는다
불인들 뜨거우랴 치솟는 분노 앞에
산을 이룬 한이거니 새길수록 저린 통증
끓는 피 삭일 수 없어 얼어붙는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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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깊고도 먼 곳에서 휘돌아 솟아올라
새벽을 깨우는 곳 홀로이 귀를 연다
하이얀 때죽나무 꽃
떨어지는 꽃비 소리
한 모금 시린 물로 어리석음 씻어내면
내 안에 고여 드는 맑고 깊은 옹달샘
뜨겁던 여름 한낮이
소리 없이 잠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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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고라니
콩밭을 작살내고 고구마 밭 으깨다가
속이 찬 알배추를 해작질이 웬말이냐
그렇지!
울타리 치면 네 한계를 알겠지
유려한 몸짓으로 울타리 훌쩍 넘어
이제는 주인인양 밥상을 즐기다니
옳거니!
올무 아님 덫으로 너를 보복하리라
희붐한 새벽녘에 몸부림치는 너를 보러
울을 따라 덫을 찾아 한 바퀴 돌고 있다
아이쿠!
콱 찍은 발등 내가 바로 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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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얹히듯
개구리밥 펼친 자리 학익진의 한산대첩
분노의 불길 앞에 펄럭이던 깃발처럼
물방개
거북선 되어
새 물길을 열었다
부평초 뜨내기가 자리 잡은 아파트에
한 동이 맑은 물로 개구리밥 띄워놓고
청산에
구름 얹히듯
내가 떠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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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검은 불꽃을 타고 가다
조선의 꿈을 딛고 우진각 날아올라
금강송이 받친 하늘 절개 높아 더 푸르고
징소리 울렸던 도성에 당당하게 앉았다
푸른 꿈 펼치려던 선비의 잰걸음도
장원급제 나팔소리 드높던 말발굽도
한바탕 유배길마저 여닫으며 지켰는데
기왓장 튈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고
잠 못 이룬 시름마다 눈시울 젖어 오네
대들보 다시 올리고 새 천년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