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바깥세상 엿보다>
치술령
높은 재 헛디디며 넘다넘다 되돌아 와
울다 지친 코흘리개 끌어안고 울던 당신
산등성 검은등뻐꾸기 살·아·보·자 같이 울고
풋잠 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치맛자락 뒤집어서 콧물 닦고 허물 닦던
그 손길 조금씩 풀려 가는 길을 찾는다
속엣말 다 하지 못한 젊디젊은 내 어머니
볼 붉은 아버지를 만났을까, 얼싸안았을까
오늘은 검은등뻐꾸기 보·고·싶·다 내리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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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팔자걸음 뒷짐으로 그렇게 걷는 거야
울퉁불퉁 자갈길을 맨발로 가는 거야
사는 길 얼룩덜룩해도 더러는 웃는 거야
쨍쨍한 햇살 아래 등껍질이 타들어도
대숲처럼 일어서는 장대비를 맞더라도
헌 집이 새 집 된단다, 무지개도 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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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과 여자
- 오릉에서
뉘 고르듯 잡풀 뽑는 왕릉 위의 저 여자
켜켜이 쌓인 시간 호미질로 불러낸다
한 생이 소금꽃 피어 속살이 내비치는
솔 향 담뿍 풀어 어질머리 앓는 한낮
베이고 뜯겨져도 감싸는 풀잎처럼
비바람 끌어안는다면 다시 천년 못 가랴
굽 높은 접시 가득 제단에 올리는 땀
스란치마 한 자락을 찰찰 끄는 그날 바라
덩두렷 봉분에 앉아 알 하나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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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시대
화장하는 남학생의 머릿결이 찰랑하다
찢어진 청바지에 색깔 다른 선글라스
인생은 가볍디가볍다고
한 다리를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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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저 눈깔, 오죽하면 범의 아재비일까
그러니까 호랑이보다 항렬이 높다는 말
겁 없는 반골의 기질, 낫을 들고 덤비네
혁명을 꿈꾸는가 위장과 위협으로
밑바닥 뒤집고픈 게릴라성 폭우처럼
오금도 달싹 못하는 나비를 덥석 무는데
슬금슬금 다가오는 회심의 저 두꺼비
눈앞의 성찬이다, 찰나의 혀를 보라
그러게, 나는 놈 위에 노리는 눈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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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동백
- 소록도 수탄장愁嘆場*에서
오 미터 사이 두고 하염없이 타는 핏줄
사발동백 뚝뚝 진다 너울이 섬을 친다
아가야 모가지 꺾지 마라
이건 죄가 아니야
갈매기 울어울어 종소리 밀어낸다
콧등이 내려앉아 너의 냄새 맡을 수 없네
손가락 다 떨어지기 전
널 한번 안았으면
* 소록도 수탄장愁嘆場 : 한센병 부모와 미감아동이 5m 거리에서 일렬로 마주 서서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하며 탄식하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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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싸움을 보는 이유
뿔깨나 쓰신다는 이 땅의 금수저님
붉은 카펫 내디디며 발자국 찍고 있다
팽팽한 설전 너머로 뿔치기 한판이다
뒷발로 앙버티며 들이박고 밀어내다
떼 지은 삿대질에 화면이 어지럽다
튕기는 불티를 피해 돌아앉아 먹는 밥
청도로 와 보시게 응원석에 앉으시게
옥뿔로 비녀뿔로 산이 들썩 맞붙어도
깨끗한 한판 승부에 갈채 받는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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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솥
아궁이 앞 꿇은 무릎, 죽은 불씨 살려놓고
'하안 많은 이 세-사아앙' 울 엄만 노래하고
부뚜막 올라앉은 넌
소리 내어 대신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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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봉인을 뜯는 순간 내장이 쏟아진다
질주의 본능 뒤로 풍경은 사라지고
당신의 검은 음모가 꼬리 물고 재생된다
삿대질 맞고함에 꽁꽁 막힌 여의도 길
출구는 오리무중 비상구도 막혔는데
의사당 철문을 걸고 종이꽃만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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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첩霞帔帖
1
안부 글 차마 못 쓰고 다홍치마 보냅니다
촉루 너머 강진 향해 글썽글썽 젖습니다
한숨 진 개밥바라기 머릿결이 하얗습니다
2
받은 치마 펼쳐 놓고 아픈 마음 오린다오
캄캄한 적소에는 달빛만 기웃하오
희뿌연 새벽녘에야 한 점 획을 긋는다오
3
서리꽃 아찔해도 물길 낸다, 아들아
만 갈래 뻗는 생각 하나로 묶는다면
첫울음 들을 수 있으리, 매운 시도 얻으리
* 하피첩(霞帔帖) : 노을빛 치마로 만든 서첩. 강진에 유배중인 다산에게 부인이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를 보내옴. 다산은 그 치마로 서첩을 만들어 한양의 아들에게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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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샘
자꾸만 헛보는 동공 눈물관이 역류한다
발꿈치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막다른 바람벽인가 그렁그렁 앞을 막네
뜨겁게 녹이면서 뼛속까지 내려가면
어둠을 씻어내는 밝은 별 내게 올까
침침한 수정체 너머 마음으로 읽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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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똥구리
곁눈 하나 팔지 않는 필생의 걸음걸음
하루의 창을 여는 신성한 노동이다
아슬한 경계를 넘는
행간 너머 그 곳에
물려받은 붉은 기억 피땀으로 뭉친 사리
신전에 올리려나 더운 숨결 보탠다
어둠도 오래 응시하면
가는 길이 트이듯
땡볕도 마다않고 비바람도 맞받으며
더듬이 바짝 세워 길을 닦는 오체투지
매운 말 고이 받들어
지평선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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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매
색 바랜 단청 아래
묵언이 고여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꽃망울 터지는 소리
선홍빛
해산을 한다
산자락이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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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눈빛
밤하늘 바라보면 아스라이 뜨는 얼굴
별빛을 헤쳐 가며 불러보는 이 밤에
당신도 날 보기 위해 뜬 눈으로 새웁니까
날마다 수척해가는 하현달 가리키며
왔던 길 돌아간다고 눈으로 말씀하신
어머니 까끌한 손을 가슴에다 묻습니다
서서히 달이 차는 만삭의 여인처럼
산고 끝 꽃을 피워 보름달로 찾아오신
그 눈빛 애달픔에 젖어 가슴 한쪽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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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소금 되기까지
홀쭉한 통깨들이
확 달군 프라이팬
모로 눕다 돌아눕다 바깥세상 엿보다가
한번쯤
튀어보는 거야
통통하게 부푼 꿈
꼬투리 벌기도 전
쳇바퀴에 갇힌 청춘
어디로 튈지 모를 덜 여문 생깨들아
조금만,
조금만 참자
깨소금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