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생각하며, 비우며
- 금정산 둘레길, 범어사에서 금강공원까지 -
김 덕 남
한 해를 마무리하는 문산(문인산우회)의 송년 산행을 금정산 둘레길로 정했다. 2012년 12월 15일 10시 범어사역 5번 출구에서 출발하였다. 일행은 18명. 산행엔 참가할 수 없는 정정희 사무국장이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대단한 열정이고 그저 고맙기만 하다.(작년 가을 산행 시 바위 아래서 사진을 찍던 중 높은 바위절벽에서 떨어지는 동료를 자기도 모르게 팔을 벌려 받다가 발목이 부러져 병원에 오래 신세를 진 후 이제 겨우 퇴원함) 최연근 문산회장님은 대선관계로 서울에서 간밤에 내려와 피곤한데도 회원들의 후미를 책임지고.
날씨는 차가웠지만 배낭끈을 조이고 청룡동 상마마을 입구까지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20분 쯤 지났을까, 만성암 입구에 들어서니 목련이 꽃눈을 틔우기 위해 벌써 자리를 잡았다. 어린 처녀 젖멍울 마냥 볼통한 것이 만지면 찌르르 아파올 것 같다. 그 목련 나무 밑을 그냥 못 지나치고 천성수 시인이 막걸리 병을 흔들었다. 땀이 날려는 찰나 한 잔씩 걸치는 시원함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서릿발도 차보고 나뭇등걸에 엉덩이도 걸쳐보며 쉬엄쉬엄 금정산 둘레길에 들어섰다.
김지하 시인은 ‘지리산’을 읊으면서,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고 했다. 눈 쌓인 산은 아니지만 금정산의 소나무, 너덜겅은 부산시민의 위안이자 활력의 모체이다. 금정산 자락에 안겨 수 십 년을 살다보니 하루라도 오르지 않으면 궁금하고 그리운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인생은 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먼저 나무꾼들이 이 길을 갔을 것이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우리의 선조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이렇게 자연스레 생긴 길을 이어 붙여 둘레길이라 이름 붙인 금정산 자락 길을 묵묵히 걸으며, 생각하며, 비우며, 문산의 벗들이 가고 있다. 발자국을 남기며.
발밑의 낙엽이 아야앗하고 제 몸을 부수니 청설모 한 마리가 급히 나무 우듬지로 내뺀다. 바위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사는 때죽나무의 매끈한 몸통을 어루만지다 “참 잘 생겼다”며 모 시인이 혼잣말로 얘기한다. 여인도 벗은 여인이 좋듯이 나무도 역시 벗어봐야 안다며.
한 걸음 지나다 졸참나무의 아랫도리를 슬쩍 건드리며 참나무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그리고 구별하는 방법까지. 상수리나무는 잎에 바늘 같은 침이 있고 연한 녹색이라고, 떡갈나무는 잎이 가장 넓고 크며 잎자루가 짧고 잎 뒷면에 갈색 털이 있다고. 알고 보니 숲 해설가였다. 흔한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습관인데 나무의 이름을 알고 보니 흔하게 서 있는 저 나무가 귀하게 다가온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니까.
소나무뿐만 아니라 사이사이 서어나무, 오리나무, 떡갈나무도 하늘을 가린다. 3,40년 전만 해도 나무가 듬성하고 키도 낮아 햇볕을 온통 받고 산에 올랐는데 이젠 어느 길로 들어서도 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인간의 축복이고 새들의 축복이다.
죽어서 나무가 되겠다던 가을동화의 은서가 생각난다. 키워준 엄마와 생모 사이를 오가지 않아도 되는 나무로 살겠다고 했지 아마. 평생을 붙박이로 있는 나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 불쌍하단 생각은 없어진 것 같다.
외줄로 늘어서서 죽 걷다보니 남산동 외국어대학 신축 공사장까지 왔다. 수년 동안 동네 주민의 운동장으로 사용하던 빈 땅이었는데 건물이 제법 많이 올라갔다. 이런 숲 속에 대학이 들어서니 대학이야 좋겠지만, 부산시민의 입장에선 숲이 줄어드니 아쉬움이 크다.
숲길 아래 구서동을 바라보며 고령자 쉼터(평상)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일행 중 반쯤은 도로로 내려가 차를 타고 가고, 반쯤은 내쳐 걷기 시작했다. 물망골 약수터를 지나 오솔길, 바윗길을 걸으면서 최 회장이 지쳐가고 있었다. 대선캠프의 언론특보라는 중책을 맡아 밤낮없이 일을 하니 지칠 만도 하겠지. 나머지 이말라 시인 등 6명이 끝까지 걷기를 작정하고 부산대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택했다. 기숙사인 웅비관을 거쳐 제2사범관 옆 쪽문으로 빠져나와 식물원을 지나 금강공원 입구까지 줄기차게 걸었다. 오후 5시 정도에 민속한정식에 도착하였으니 좋이 6시간은 걸은 것 같다. 걷기에 좋은 길이지만 오르락내리락한 그 거리를 계산해 보니 대략 10㎞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길을 간다. 길이 있는 한 걸을 것이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걷겠지. 그리고 그 길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 《文山》 2013. 제5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