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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단법인한국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시조미학
정완영 시조의 고전적 풍격과 원융
정수자/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
1. 머리말
백수(白水) 정완영( 鄭椀永)은 현대시조문학사에서 독보적 예술성을 확보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국적 정서를 정한의 어조와 고전적 격조로 아우르는 시조세계 구축에 따라 ‘신고전(新古典)’이라는 자리매김도 따른다. 시조의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내용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이루어내는 구조화가 현대시조의 문학성으로 구현된 것이다. 특히 한국어의 결과 율을 정형 구조에 천연스럽게 조율하는 형식 운용은 백수 시조의 독보적인 성취이자 문학적 위의로 인정받는다.
백수는 현대시조가 문학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문학적 성취에 주목한 박재삼은 작품의 양과 질 양면에서 현대시조의 개척자인 이병기를 능가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백수 정완영의 출현부터가 “한국시조에서는 획기적 거사”라며, 그의 등장에 따라 시조문학이 “문학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일어나게” 됐는데, 무엇보다 “시(詩)가 있는 시조(時調), 가락이 있는 시조(時調)”를 추구한 백수의 문학적 성취라고 본 것이다. 이숭원 또한 백수 시조가 “전통적 선비의식이 현대적 예술 감각과 결합된 상태”에서 도달한 시세계이자 “현대시조의 문학성과 예술성” 획득으로 백수의 문학적 의의를 평가한다. 이러한 진단과 평가는 현대시조에서 일가를 이룬 선배 시인들과도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인 백수 시조의 현대문학적 지평을 환기한다.
이러한 문학성과 예술성 확보에는 시조를 민족시의 종가(宗家)로 삼은 백수의 시조관이 크게 작용했다. 백수가 시조의 강령처럼 말한 시조관은 ‘첫째 정형을 지키고, 둘째 가락이 있어야 하고, 셋째 쉬워야 하고, 넷째 근맥이 닿는 시조라야 하고, 다섯째 격조가 높아야 한다’고 요약된다. 이에 입각한 백수 시조는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비롯한 초기시조부터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나타났다. 등단 이전 20년의 습작을 거친 시조 쓰기가 초기부터 문단의 이목 집중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즈음 백수는 여러 지면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는데, 시조는 1960년 시조 「해바라기」의 <국제신보> 신춘문예 당선, 《현대문학》에는 1960년 「애모」 1회 추천, 1961년 「어제 오늘」 2회 추천, 1962년 「강」으로 3회 추천 과정을 마쳤다. 동시에서도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골목길 담모롱이」 입선,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해바라기처럼」 당선 등을 보여준다. 등단 전의 긴 습작 기간을 적시한 데서도 드러나듯, 이미 기성시인이나 진배없는 창작 활동으로 완숙한 작품들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백수의 문학적 출발점인 초기시조를 중심으로 특유의 미학적 요소들을 살피고자 한다. 백수 시조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통한 문학성 성취라는 점에서 그 시조세계에 이르는 양면의 특성을 조명할 것이다. 형식면에서는 백수율로 평가되는 고전적 율조와 풍격을 집중적으로 보고, 내용면에서는 눈물과 정한의 심상으로 이루는 원융의 세계를 살필 것이다. 이러한 방향 설정에 따라 고찰 대상은 초기시조의 수월성을 평가받는 첫 시조집 『채춘보(採春譜)』 (동화출판공사, 1969)와 두 번째 시조집 『묵로도(墨鷺圖) 』 (월간문학사, 1972)를 중심으로 하되, 인용 작품들은 비교적 최근에 간행된 『정완영 시조전집-노래는 아직 남아』에서 확정한 표기를 따르기로 한다.
2. 백수율의 특성과 고전적 풍격
백수는 일찍부터 가락의 천연스러운 실현에 따라 ‘백수율’이라는 별칭을 받은 바 있다. 백수가 형식의 자유자재한 운용을 특유의 미학으로 발현하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러한 백수 시조의 문학성을 높이 산 박재삼은 “절로 솟아나는 가락 안에 시(詩)를 담”아내는 것은 물론 “내용과 형식의 두 측면에서 고루 반죽”하는 힘을 중요한 바탕으로 평가했다. 여기서 “반죽”이라는 표현은 백수가 자신의 시조 작법으로 쓴 “주물주물”과 통하는 점이 있어 특히 주목을 요한다. 2000년경 “초정은 옥을 깎듯, 나는 주물주물”이라고 백수 자신이 두 시인의 시적 개성을 꿰어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백수가 손으로 주물거리는 모양까지 직접 재현하며 “주물주물”로 요약한 시조 작법은 백수율이 어디서 비롯되고 자연스럽게 발휘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백수의 율을 독자적인 가락으로 만드는 요소나 기법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중 먼저 주목할 것은 구(句)의 자유자재한 운용으로 이루어가는 고전적 가락과 풍격이다. 백수는 “조부로부터 ‘한학과 주문(朱門)의 學’을 배웠”다는 사실을 연보에 명시하는데, 이는 시조에 나타나는 구법에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백수가 한학이나 한시에 친숙한 환경이었음은 평소 한시를 줄줄 외우던 시적 취향이나 향유에서도 나타났다. 그런 고전 소양의 영향으로 보이는 특성은 초기시조부터 구의 자연스러운 운용과 대구(對句) 활용에서 드러난다. 또한 한문 혼용이 많던 그즈음 글에서도 잘 쓰지 않던 한자, 그리고 한시에나 나올 법한 어려운 한자어를 자주 쓰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짐작은 『채춘보(採春譜)』와 『묵로도(墨鷺圖)』라는 시조집 제목이나 시조집 속의 한자 제목 빈도수만 봐도 가능한 추정이라 하겠다. 게다가 ‘불소지년(不少之年)’, ‘춘소우(春宵雨)’, ‘불각춘(不覺春)’, ‘일편 현월(一片 弦月)’, ‘음우(陰雨)’, ‘담담수(淡淡水)’, ‘천증세월 인증수(千增歲月 人增壽)’처럼 널리 쓰이지 않던 한자 시어(숙어처럼 굳은 표현들 포함) 같은 표현들을 취향처럼 골라 쓰는 데서도 한학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내면화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백수 시조의 구법(句法)은 일상화된 것처럼 보이는 대구에 의미와 율격의 조화로운 구현으로 집약된다. 대구라는 기법은 ‘뜻이 상대(相對)되는 말이나 어조가 비슷한 문구를 나란히 벌리어 그 격조의 균제로써 병렬·대치의 미를 표현하는 수사법’으로, 한시(율시)에서는 시적 완성도를 가늠할 만큼 중시하는 표현이다. 그런 대구를 백수는 초기의 거의 모든 시조에서 형식에 녹여 담듯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다. 한시와 시조의 구는 다소 다른 면이 있다 해도, 시조의 6구를 정확히 실현하며 가락도 유려하게 만드는 백수의 구법은 득의의 면모를 지닌다. 특히 2음보와 3음보 사이에 독립적인 의미 단위를 두면서 리듬의 휴지와 가락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점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음보와 3음보 사이에 소유격 조사 ‘~의’를 쓴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백수 특유의 세련된 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를 쓸 경우, 첫 구와 둘째 구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시조의 형식적 요건에서 짚어보면 백수는 정확한 구법으로 가락을 유려하게 만들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점에 유념하면 백수 시조의 대구에 따른 미적 효과는 더 확연해진다. “오는 줄 몰랐던 봄이 / 가는 정은 서러워서”(「봄은 가고」) 같은 구절의 “오는”과 “가는”의 대치를 통한 의미의 부조가 두드러지는 것이 그런 예다. “산은 산대로 앉고 / 물은 물대로 흘러라”(「淸秋에」), “부르면 청산이 가고 / 대답하면 강이 오고”(「명탄자(名彈者) 가고 나니」), “때로는 슬픔이 오고 / 때로는 한이 가도”(「들녘에 서서」)등의 작품에서도 “가고 / 오고”나 “오고 / 가도” 등은 앞 구와 뒤 구에 마치 일상의 말투처럼 쉽게 배치하는 대구를 볼 수 있다. 이와 조금 다른 방식에 속하는 대구 즉 어조가 비슷한 문구의 활용으로 병렬과 대치의 미를 살리는 구법도 많은 작품에 나타난다. “어제가 오늘 같고 / 오늘이 어제 같은”(「병처(病妻)에게 주는 시」), “매양 오던 그 산이요 /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직지사 운(直指寺 韻)」)에 나타나는 것처럼 무심히 툭 놓은 듯싶은 대구들이 많은 시조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는 백수의 체화된 구법은“의미를 집중시키고 시의 내용과 정서를 밀도 있게 해 주는” 시적 효과로 집약된다. 또한 가락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유려한 율의 구현에도 구법의 작용이 크다는 사실을 활인할 수 있다.
백수율을 이루는 또 하나의 특성으로 조사 덧붙이기 방식을 들 수 있다. 백수의 남다른 조사 사용법은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지만, 다음의 인용 시조처럼 ‘~나’라는 조사를 독특하게 배치하는 방식은 특이한 점이 있다. 조사 ‘~나’는 ‘모음으로 끝나는 일부 명사나 부사 뒤에 붙어, 그 정도를 강조하는 뜻을 더하여 부사를 만드는 말’로 쓰이는데 백수는 이를 아주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사를 붙여 쓰지 않는 단어에 “~나”의 덧붙이기를 통해 백수 시조의 어조와 의미를 독특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은 아니다
두메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으로 실려 꿈으로나 익는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 천년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나 가는 거다.
-「감」 전문(굵은 표시: 인용자)
이 시조에서는 조사 ‘~나’가 각 수의 종장에 의도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나”는 여러 작품에서 쓰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조사의 배치에 따라 리듬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그 둘레 달빛으로 실려 꿈으로나 익는 거다.” “돌담 위 시월 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세월도 팔짱을 끼고 정으로나 가는 거다.”처럼 쓰인 “~나”는 그 문장 앞의 언명을 눙치거나 말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으로 비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는 “~나”를 빼고 읽어보면 뭔가 단정하는 느낌으로 시적 여운이 감소하는 것에 비해 “~나”를 붙여 읽으면 그 반대의 뉘앙스로 여운이 풍부해지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더욱이 “~나”는 일상 속에서 ‘농사나 짓고, 책이나 읽고’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에 덧붙여 쓰는 경우가 많은데, 백수는 이런 조사를 배치함으로써 가락을 보다 느슨하고 부드럽게 하는 편이다. 이와 비슷한 조사 활용의 예는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사나이 불소지년(不少之年)을 바람에나 부치랴”(「만경평야(萬頃平野)에 와서」), “새재 아흔아홉 구비 주막 한 채나 앉혀둬라”(「령(領) 타령-조령(鳥嶺)」), “인생도 조국도 말고 백구(白鷗)로나 살고 싶다”(「바다의 시-2.남해를 건너며」), “실개천 울음을 모아 바다로나 보내면서”(「천하 추(天下 秋)」) 등으로 ‘~나’의 효과적인 활용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백수는 조사의 특이한 사용을 여러 편에 걸쳐 다양하게 보여준다. “하 그리 목숨이 정(情)이 병(病)인 양도 하여라”(「버들꽃 날리는 날」)에서 ‘~도’의 경우가 그렇고, “끝내는 가슴을 쏟아도 다는 못할 사연일레.”(「화사집-복숭아꽃」)의 ‘~는’을 덧붙이는 경우, 혹은 “두보(杜甫)는 강촌에 살아 하는 일 마다가 詩였던가”(「夏日長」)에서 ‘~가’의 덧붙임도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조사의 활용이라 하겠다. 이렇듯 문법을 초월하는 백수의 조사법이 백수율의 자유자재한 리듬으로 발현된 후, 시조단에서는 한동안 우려할 만큼 모방이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공소한 아류로 끝났다는 점에서 봐도 백수의 조사법과 그에 따른 리듬 효과는 독보적인 면이 있다.
다양한 종결어미도 백수율에 고전적 풍격과 리듬을 실현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백수는 종결어미를 매우 다양하게 구사하는데 그 배치가 시조의 가락이나 격조의 변주로 나타난다. 그 중 현대어에 쓰지 않는 고전적 종결어미 사용도 많은데 리듬에도 변화무쌍한 여운을 부여한다.
목숨이 부지(不知)턴 것을 하마 깨워 줍소서.
-「춘소우(春宵雨)」 부분
탓 없이 고향 길 가듯 또 한 봄을 가리까.
-「조그만 날의 곡조」 부분
소쩍새 우는 밤이란 달로 무릴 쓰더이다.
-「사모곡(思母曲)」 부분
한가람 창창(蒼蒼)한 뜻을 내가 미처 몰랐어라.
-「사모곡(思母曲)」 부분
내 살아 간곡한 뜻을 헤아리고 싶고나.
-「실솔(蟋蟀)과 더불어」 부분
강물을 멀기도 해라 끝 간 데를 모르네.
-「살얼음」 부분
옛 님도 이 밤을 홀로 어이 새고 갔던고.
-「부석사 야도(浮石寺 夜禱)」 부분
잠 다 든 이 아닌 밤에 매화여, 등을 켰던가.
-「매화야(梅花夜)」 부분
한 치 봄 필부(匹夫)의 땅에 정(情)은 한 만리(萬里)로고.
「채춘보 2(採春譜)-인증수(人增壽)」 부분
부루룽 문풍지 운다, 눈보라가 치려나.
-「겨울밤에 쓰는 시」 부분
다음날 설청(雪晴)의 은령(銀嶺)을 다시 뵈려 또 옴세나.
-「산이 나를 따라와서」 부분
골골이 메아리 불러 못을 박아 예노니.
-「탑(塔)」 부분
한가슴 벅찬 새 봄을 외려 선사 받누나.
-「채춘보 1(採春譜)-봄의 수인(囚人)」 부분
저 언덕 할미꽃 하나 고개 들라 함이라.
-「채춘보 1(採春譜)-종달새와 할미꽃」 부분
입어서 외로운 것은 목숨이요 꿈일레.
-「찻집 순례-분목(盆木)」 부분
소소히 꽃씨가 익듯 시인 하나 외로 사오.
-「편력시초(遍歷詩抄)-한읍 김천(寒邑 金泉)」 부분
봄조차 고향의 봄은 절도(絶島)인양 아득테.
-「고향의 봄-5. 앗아간 봄」 부분
한밤 내 눈보라 치면 이 낭자(狼藉)를 어이료.
-「동야초(冬夜抄)-풍설도(風雪圖)」 부분
긴 사슴 목을 늘여서 저녁놀을 보리다.
-「병처(病妻)에게 주는 시」 부분
먼 후일 휘날릴 나의 백발 또한 꽃일진저.
-「애생 무한(愛生 無限)」 부분
이 밤엔 끊겨진 거문고 마냥 잠이 들란다.
-「천하 추(天下 秋)」 부분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되듯, 백수 초기시조집에는 거의 매 편 새로운 종결어를 찾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어미를 보여준다. 백수만 찾아 쓸 법한 고전적 소양의 종결어미가 특히 많은데, 그 작품의 정서나 어조에 어울리는 선택으로 배치한 듯한 종결어미도 상당히 많다. 위의 인용 시조들에서도 고전에 주로 쓰이는 종결어미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종결어의 변화가 어조나 시적 여운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말맛이나 시적 분위기를 위한 생략과 줄임으로 짐작되는 것도 종종 보이는데, ‘아득테’ ‘어이료’ 같은 종결어가 그러한 에에 든다. 이렇듯 당시에도 흔히 쓰지 않을 법한 종결어의 다양한 구사는 정형의 어조나 리듬에 변화를 꾀하는 효과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작품들에 현대 한국어의 종결어미로 자리 잡은 ‘다, 네’를 대입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해진다는 점도 백수율을 이루는 특징으로 종결어미의 다양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백수의 독특한 구법과 조사법 그리고 다양한 종결어미 구사는 백수율을 이루는 미적 자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수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정형 구조에 다양성을 부여하거나 어조에 변화를 부여하며 고전적 격조를 이루어낸다. 시조 형식에 부합하는 구와 율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백수율의 독보적인 풍격을 구현한 것이다.
3. 눈물과 정한의 상보적 원융
백수의 초기시조는 눈물과 정한의 주조 속에서 정화에 이르는 원융을 보여준다. 많은 작품을 관류하는 것으로 고향 관련 심상이 있는데 정한의 눈물을 동반한 서정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고향 상실이나 조국의 식민지 경험에서 연유하는 정한으로 애조 어린 시조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정의 근저에는 백수의 남다른 고향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백수가 “내 사상의 태반(胎盤)은 고향이고, 내 사유(思惟)의 탯줄은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명시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런 만큼 백수의 시조도 고향에서 받아 기른 몸과 마음의 시적 실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고향은 자신의 뿌리이고, “장소와 인간의 관계는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구조”이듯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곳으로서는 더 중요한 장소다. 게다가 그곳이 현실적 사정으로 떠나며 상실한 고향이라면 정신적 상흔이나 향수가 더 깊이 뿌리내렸을 수도 있다. 고향에 의미를 크게 두는 사람일수록 “장소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존경”도 깊은 것으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향을 대하는 백수의 마음과 자세는 여러 산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내 고향 마을이 내 이승의 성지(聖地)이고, 그곳을 향해 서면 나는 속죄양의 아주 어리고 순한 순례자가 되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산 사람들과만 사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세상 뜨신 조상님들과 더 많이 세월을 산다. 조상님들은 작고는 했을망정 결코 죽지는 않으 셨기 때문이다. 산자락 산자락마다 말씀이 계시고, 교훈이 계시고, 존안(尊顔)이 누워 계시기 때문에, 슬픈 일, 기쁜 일들을 고유(告由)드린다”
이 글에서 백수는 유교적 세계관의 선비 중에도 고향 인식이 특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고향 관련 시조가 유독 많으며 그것이 여러 작품에서 눈물과 정한의 어조로 발현되는 까닭일 것이다. 특히 그곳의 산하나 부모 등을 그릴 때 뒤따르는 눈물은 고향 상실의 애통함과 회한이 더 크게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초기시조의 고향 관련 심상은 후기 작품에서도 간간이 나타나는데, 다음 시조가 그런 작품의 완결판을 보여준다.
세월은 저물었는데 노래는 아직 남아
돌아온 옛 마을에 덮고 누운 하늘 한 장
열무 씨 새로 뿌린 듯 별빛 총총 돋는다.
『정완영 시조전집』 책머리에 실린 이 시조는 백수 시조 일생의 압축판이라고 할 만하다. 그간의 시적 추구와 미적 구현의 여정을 단 석 줄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조를 여전히 “노래”로 보는 인식과 “돌아온 옛 마을”에 담긴 향수의 서정, 그리고 “열무 씨”에 함축한 고향으로의 회귀 정서다. 그런 시인의 평생 “노래”이자 중심 이미지로 그려온 “고향”과 “열무”에 백수 시조의 처음과 끝을 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열무 씨”에 연상되는 “별빛” 심상은 한국시사에서도 보기 드문 백수의 독창적 형상력이다. 두 대상이 지닌 색상(노란 빛깔)과 크기(별도 멀리서 보면 작게 여김)의 유사성에서 비롯됐을 법한 앞 구 “열무 씨 새로 뿌린 듯”을 “별빛 총총 돋는다”고 받아 맺은 뒤 구는 백수 시조 중에서도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의 발화라 하겠다. 참외 등속의 여름걷이 후에 뿌리는 열무 씨가 농경사회의 먹거리(열무김치) 마련이라는 점에서 보면, 하늘과 땅의 일이 맞물리며 자연의 역사(役事)에 임하는 고향의 소임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 시조는 초기작 「고향 생각」과 여러 면에서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핵심 이미지로 작동하는 “열무”가 고향의 정서와 그리움의 감각적인 재현으로 다음 시조에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洞口) 밖 키 큰 장승 십리(十里)벌을 다스리고
풀 수풀 깊은 골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 드리운 낙조(落照)에 한 폭 그림이던 곳.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마는
버들피리 언덕위에 두고 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 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이 뜨네
꽃가마 울고 넘은 서낭당 제 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 줄에 피가 감겨
청산 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는 억만 시름
고래 등 같은 집도 다락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어라.
빙그르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 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밖에 저문다.
-「고향 생각」 전문
이 시조는 회한과 눈물의 성소이자 “이승의 성지”로 거듭나는 고향 시조의 서사적 종합편이라고 꼽을 만하다. 고향으로 포섭되는 상징적 이미지들에 가족의 역사까지 엮는 구성이 시상을 병풍처럼 펼쳐 놓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도드라지는 것은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라는 공감각적 비유,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으로 압축하는 빛과 맛의 감각적 표현,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마는”처럼 향수를 견인하는 서정적 심상의 집약들이다. 특히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어라.”고 탄식하는 들판 모습은 당시 농촌 현실의 응집이자 고향에 대한 해석으로 시적 여운을 극대화한다. 마치 변사의 어조로 읊조리는 듯한 가락 또한 시적 감응을 고조하는 동시에 눈물을 다독이는 흐름으로 심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리 까마귀 울고 간 북천(北天)은 아득하고
수척한 산과 들은 네 생각에 잠겼는데
내 마음 나뭇가지에 깃 사린 새 한 마리.
고독이 연륜(年輪)마냥 감겨오는 둘레 가에
국화 향기 말라 시절은 또 저무는데
오늘은 어느 우물가 고달픔을 긷는가.
일찍이 너 더불어 푸르렀던 나의 산하(山河)
애석한 날과 달이 낙엽 지는 영마루에
불러도 대답 없어라 흘러만 간 강물이여
-「애모(愛慕)」 전문
이 작품에는 고향의 지명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향수의 애틋한 표출임은 곳곳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척한 산과 들은 네 생각에 잠겼는데”에서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너 더불어 푸르렀던 나의 산하(山河)”에서 누구나의 고향으로 보편성을 띠며 확대된다. 떠나온 곳이나 지난 시절을 그리는 회한과 탄식의 정서는 이 작품에서도 주조를 이루며 애모에 깊이를 더한다. 마지막에 배치한 “불러도 대답 없어라 흘러만 간 강물이여” 같은 대목은 감정의 과잉으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진행형의 향수를 환기하며 그 여운을 길게 만든다. 자신의 서정적 발원지가 고향이듯, “세월이란 산맥 속에 병(病)만 같은 고향을 두고”(「어머님 가신 후로」) 사는 시인은 늙은 부모만큼이나 고향도 마음 아픈 곳임을 환기한다.
백수 시조의 눈물 심상은 고향과 가장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느 여성지의 고향에 왜 가느냐는 질문에 “좀 슬퍼보려고” 간다고 답한 대목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슬퍼보려고 고향에 간다는 말은 향수를 넘어 시인의 고향관을 다시 보게 한다.
“연(戀)은 애(愛)를 낳지만 자칫 잘못하면 증(憎)이니 원(怨)을 낳기가 일쑤다. 미움과 원망은 죄를 낳고, 죄는 악까지를 낳는다. 정은 낳을 것이라고는 한(恨)밖에 없고, 한은 눈물이나 낳는다.
눈물은 하나의 요해(了解)이며, 용서이며, 인생의 지하수일 따름이다. 눈물은 주고파만 하는 것인지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용문은 백수 시조에 유독 빈번한 눈물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 발원을 환기한다. 눈물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독특한 해석도 주목되는데, 눈물 많은 사정의 해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을 낳는 게 한밖에 없다거나 한이 눈물이나 낳는다고 단정하는 데서 백수의 눈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주고 싶어만 하는 것이라고 본 눈물의 본질 해석도 독특한 시각이라 할 것이다. 눈물이 받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 역시 백수 시조에서 눈물이 감당하는 역할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조세계의 한 실현으로 「조국」은 의미 있는 작품이다. 백수가 이 시조의 창작 시기를 1948년(신춘문예에 당선된 1962년보다 14년이나 앞섬) 작으로 밝히는 것도 문학적 무게감과 부담감의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조국」이 교과서에 실리며 문학성도 백수의 대표작으로 평가된 것과 달리 비판적인 글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윤식은 이병기와 이호우, 정완영의 시조세계를 논하는 글에서 정완영이 “조국에 대한 극히 막연한 감정만 있지 아직도 그 감정이 어떤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조국」을 예로 들어 비판했다. 시조를 넘어 문학 전반을 다루는 학술저서에서 ‘백수 시학은 가능한가’를 따져보는 대목에서 나온 비판이라 백수로서는 뼈아픈 지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즈음 백수 산문에는 눈물과 한의 상관성만 아니라 자신의 눈물에 대한 변(辯)으로 여겨지는 글도 보여준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체질에 대한 고백으로 “몸은 늘 잔병을 싸가지고 다녔고, 마음 또한 소심하여 눈물 콧물 마를 날이라곤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곤고(困苦)함을 면해본 적이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정감만은 백만 석이어서 일생을 두고 이 길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대목도 눈물의 곡절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고백과 자기 진단은 초기시조의 눈물 정서가 고향 상실에 중첩된 시인의 체질이며 성정에서 비롯된 특성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백수의 한학 소양과 한시의 영향을 가정해볼 수 있다. 한시에는 의외로 울음이 자주 나타나는데, 당나라 시에서 더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다. 당음에 주목하는 것은 백수가 어릴 때 할아버지들이 들려준 시를 “당음”으로 명시하는 점에서 그 세계에 더 친숙했던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당음(唐音)은 송음(宋音)과 달라서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는데, 백수 또한 당음과 비슷한 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수는 자신의 시조에 반영된 빈번한 울음을 개의치 않았을 거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시인을 “우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기뻐서도 울고, 슬퍼서도 운다”거나 “울음을 아름다운 언어와 노랫말에 실어 문자로 남긴 사람들”로 본 당대의 시인관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수는 시조 속의 눈물이 정감의 자연스러운 발로이자 시정의 표현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지 되짚게 된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조국(祖國)」 전문
이 시조에서 눈물의 출현 빈도를 보면 “애절히 우는”, “둥기둥 줄이 울면”, “흐느껴 목메이면”,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등으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세 수 9행에 등장하는 눈물 관련 심상만 봐도 감정이나 눈물의 과잉으로 비칠 측면이 있다. 거기에 “초가삼간 달이 뜨고”,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같은 대목도 회고 정서와 고답적인 감상의 우려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조국”을 우리의 전통악기인 “가얏고”에 빗대는 비유나 “피맺힌 열두 줄”에 집약한 눈물이 유가적 선비의 우국충정을 환기하며 호소력을 심화하는 측면이 크다. 당시 눈물에는 시대적 배경도 있으므로 이러한 백수 시조를 통해 위안이나 치유를 받는 독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
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아오매,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린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부자상(父子像)」 전문
은장도 매운 한(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복숭아 환한 눈물 삼춘(三春)은 치천금(値千金)을
소쩍새 우는 밤이란 달도 무릴 쓰더이다.
옷고름 고이 접어 한숨일사 잠재우면
오동(梧桐) 장롱 차곡차곡 수심(愁心)도 향(香)이온데
추풍령 자락 자락이 서리 앉아 타더이다.
청산(靑山)은 생각위에 생각을 포개 두고
세월의 먼발치로 흘려보낸 낙화(落花), 유수(流水)
한가람 창창(蒼蒼)한 뜻을 내가 미처 몰랐어라.
원(願)이야 은실머리 올올 마다 풀어 이고
백일(白日)에 정좌((正坐)하신 맨발의 백발(白髮) 관음(觀音)
어머니, 어머니시여, 내 눈물의 모토(慕土)시여
-「사모곡(思母曲)」 전문
아버지를 그린 「부자상(父子像)」, 어머니를 그린 「사모곡(思母曲)」에서 백수 눈물의 발원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 부자의 전형적 모습을 담고 있는 「부자상(父子像)」은 현대시의 한 원본처럼 재생산되는데 “눈물”이 큰 역할을 한다. 한 번밖에 안 나오는 단어임에도 시적 고양이나 성찰 같은 것을 견인하기 때문이다.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과묵한 모습과 그 뒤로 스미는 눈물에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을 확인하는 장면은 보편성을 띤다. 1970년대 즈음은 부자간의 만남과 헤어짐에 표현이 적었을 때라 아들의 마음을 실어 맑히는 눈물이 여운을 묵직하게 한다. 아래 시조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마음을 눈물에 잘 압축하는데, 전통 여성의 원과 한을 곡진하게 담아낸다. 여기서 어머니를 “내 눈물의 모토(慕土)”라고 부르는 구절은 백수 눈물의 원천이 고향이자 가족임을 상기시킨다.
백수의 초기시조는 고향 상실의 그리움을 극복하는 눈물과 정한의 심상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 근저에는 그런 인식과 체질에 따라 백수의 눈물은 “침잠, 관조, 체념”의 “달관”의 승화도 다. 그런데 눈물의 원인이나 상황에 대한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작품이 없는 것도 특이한데, 이는 수동적 수렴과 체념의 성정에 눈물의 역할이 더해진 까닭으로 보인다. 일종의 자기 수양처럼 견디는 눈물이 승화를 거치며 백수의 독보적 시조로 심화되기 때문이다.
백수의 눈물은 독특한 철학을 바탕으로 고향과 더불어 심화 확대됐다. “나는 ‘인간 최초의 언어는 울음이고, 최후의 말은 눈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언명처럼 그의 시조에는 한국적인 고향을 담보하는 눈물이 상보적인 역할로 원융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백수시조의 고향은 “시인만의 고향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다둑거리는 인정의 세계”라는 평에 부응한다. “음악이 빠져 나간 공백에 이 원형질적인 고향의 정서를 떡하니 버텨 놓음으로써 누구나 낯익은 느낌을 갖게 하고, 그 말이 내 말, 내 노래라고 생각하게” 만든 힘이 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수의 눈물은 시조와 진배없으며 고향과 등가의 존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수는 생의 구절구절을 시조 안에 눈물로 포용하고 다독이는 가락을 통해 원융을 이룬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정완영의 초기시조에서 현대시조로 이루어낸 문학성과 미학성을 살펴봤다. 백수는 시조를 ‘민족시의 종가(宗家)’로 자리매김하며 자신부터 시조를 신앙처럼 써온 시인이다. 그런 만큼 백수의 시조관이 투영된 초기에는 현대시조로 주목된 문학성과 예술성이 더 선명히 구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조를 고향이자 조국으로 여기며 투신한 백수 시조 일생의 미학적 의의도 평가된 것이다. 이는 전통의 계승을 넘어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현대문학의 한 지평을 열어가는 의미도 있다.
백수는 형식과 내용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통해 현대시조의 한 전범을 세웠다. 고향 상실에 따른 정한의 정서를 고전적 어조와 율조로 되살린 것도 백수 시조의 확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이 연상되는 이미지 연쇄로 천지만물을 가족처럼 엮는 것도 백수의 또 다른 확장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공동체적 원융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이 때로는 ‘지금 여기’ 현장에서 몇 걸음 떨어진 인식과 감각으로 비칠 수 있지만, 백수는 보다 근원적으로 감응되는 상생의 실천을 통해 원융의 정신을 담아낸다. 천지만물이 서로를 부르고 일으키며 상생하는 이미지들로 천지간에 가연(佳緣)을 이루듯, 형식의 여러 요소로 상보적인 융합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수 시조는 시조의 전통성과 현대성의 경계를 열어간 백수율의 독보적 실현이자 한국 정조의 미학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정완영(1919~2016)은 “경북 금릉군 예지동 65번지에서 태어나 조부로부터 ‘한학과 주문朱門 의 學’을 배웠다. 1927년 봉계공립보통학교 입학, 4학년 때 홍수로 전답을 잃고 일본으로 건 너가 3년 동안 각지를 유랑했다. 1932년 대판 천왕사 야간 부기학교에 입학해 2년 수료 후 귀국해서 보통학교를 마쳤다. 1941년 시조 창작 관계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 은 적이 있고, 1946년 상주에서 김천으로 돌아와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고 연보에 밝히고 있 다.(『백수 정완영선생 고희기념사화집』, 가람출판사, 1989, 501~502쪽)
2) 박재삼, 「白水, 그 인간과 문학」(정완영,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도서출판 부름, 1981, 276쪽)
3) 이숭원, 「현대시조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높이」(정완영, 『세월이 무엇입니까』, 태학사, 2000, 164쪽.)
4) 정완영, 「時調를 어떻게 쓸 것인가-하나의 관견管見」(『백수 정완영선생 고희기념사화집』, 가 람출판사, 1989, 388쪽
5) 정완영, 『정완영 시조전집-노래는 아직 남아』, 토방, 2006.
6) 박재삼, 앞의 글, 462~463쪽.
7) 대구는 대우對偶로도 불리는 한시의 기법인데, 율시의 경우 함련과 경련에서 필수로 여긴다. 구체적으로는 품사나 구조, 평측, 의미상의 대구가 있고, 감각 혹은 시간 등의 대비를 통한 대구도 있다.(송영정, 「칠언 율시의 형성과 포조鮑照-포조의 칠언 율구의 평측과 대우를 중심 으로」, 중국문학이론연구회편, 『中國詩와 詩論』, 현암사, 1993, 123~125쪽)
8) 『채춘보採春譜』의 시조 제목은 총 48편 중 한자 31편/한글 17편이고, 『묵로도墨鷺圖』의 시조 제목은 한자 26편/한글 21편으로 한자의 압도적 비중을 보여준다. 큰 제목에 묶은 시조가 여 럿인데 그런 작품의 소제목까지 합하면 한자 제목은 훨씬 많아진다.
9) 윤동재, 『한국현대시와 한시의 상관성』, 지식산업사, 2002, 134~135쪽
10) 정완영, 「운사韻事와 행사行事」(《현대문학》 1980).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233~234쪽.
11) 제프 말파스 지음, 김지혜 옮김, 『장소와 경험-철학적 지형학』, 에코 리브르, 2014. 26쪽.
12)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 상실』, 논형, 2005, 95쪽
13) 정완영, 「고향故鄕과 분묘墳墓」(《현대문학》 1979).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165~166쪽.
14) 정완영, 「미열微熱」(《엘레강스》 1976. 7).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34쪽.
15) 정완영, 「愛와 情」(1974. 4. 29 군민신문).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84쪽.
16) 김윤식, 「유교적 세계관과 시조양식의 대응관계」, 『한국근대문학양식논고』, 아세아문화사, 1980, 104쪽.
17) 정완영, 「父母子」(1974. 4. 29 군민신문),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84쪽.
18) 정완영, 위의 책, 88쪽
19) 정민, 『한시미학산책』, 솔, 1996, 73쪽. 20) 안희진, 『시인의 울음-漢詩, 폐부에서 나와 폐부를 울리다』, 돌베개, 2016, 24쪽.
21) 이숭원, 앞의 책. 174쪽.
22) 정완영, 『시인 일기-하늘 구만리』, 토방, 2000, 42쪽.
23) 김대행, 「따뜻한 法語에 이르는 길-정완영론」(『한국 현대시조 작가론Ⅰ』, 태학사, 2002, 249쪽.)
24) 김대행, 위의 책, 249쪽.
<참고문헌>
정완영,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도서출판 부름, 1981.
정완영, 『백수 정완영선생 고희기념사화집』, 가람출판사, 1989.
정완영, 『시인 일기-하늘 구만리』, 토방, 2000.
정완영, 『세월이 무엇입니까』, 태학사, 2000.
245 ‘만해축전 학술 세미나’ 논문
정완영, 『정완영 시조전집-노래는 아직 남아』, 토방, 2006.
김대행 외, 『한국 현대시조 작가론Ⅰ』, 태학사, 2002.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양식논고』, 아세아문화사, 1980.
안희진, 『시인의 울음-漢詩, 폐부에서 나와 폐부를 울리다』, 돌베개, 2016.
윤동재, 『한국현대시와 한시의 상관성』, 지식산업사. 2002.
정 민, 『한시미학산책』, 솔, 1996.
중국문학이론연구회편, 『中國詩와 詩論』, 현암사, 1993.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장소와 장소 상실』, 논형, 2005.
제프 말파스 지음, 김지혜 옮김, 『장소와 경험-철학적 지형학』, 에코 리브르,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