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4학년에 살고있던 외가집동네 정릉에서 구로동으로 이사를 했다. 야밤도주 밤이 늦은시간 주변이 컴컴하게 물들어 있을 때 갑자기 엄마가 나를 깨웠다. " 책가방을 싸라" 엄마는 굳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자다 깨어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과 말투에 아무런 토도 달지 못하고 가방을 쌌다. 엄마는 몇가지 되지도 않던 살림을 거의 버리로 옷가지만 몇개 챙겨 집을 나섯다. 조그만 용달차에 세간살이를 실고 몇신진도 모르는 깜깜한 밤에 엄마와 나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랜시간 집에 오시지 안았고. 형은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왜? 무슨이유로 이렇게 깜깜한 밤에,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엄마도 굳은 얼굴로 한마디 말도 없이 창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느정도 시간이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순간 부터 엄마으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다왔다. 내리자" 나의 구로동 시절의 시작이었다. 나는 한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하루 정도는 뒹글거리며 노는것이 좋았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고 엄마도 없이 나혼자 노는 것이 힘이들었다. 이사간 집은 국민학교 담벼락과 붙어 있어 창을 통해 학생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심심하고 외로웠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나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구로남국민학교를 찾았다. 엄마와 나는 교무실을 찾아 어떤 선생님 앞으로 갔다. 엄마는 그 선생을 상대로 하소연을 했다. "애를 며칠을 혼자 집에 둘 수는 없지 얺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요 수일내로 육성회비를 마련하여 납부하겠습니다." 아마도 육성회비를 납부하지 못해 내 전학이 늦어지고 있었나 보았다.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육성회비를 종종 내지 못해 학교를 몇칠 다니지 못하고, 육성회비를 늦게 낸다고 종아리를 맞은적도 있었다. 학교륾 못가고 종아리를 맞는것보다 다른 애들이 내가 얼마나 가난하면 육성회비를 내지도 못할까 나를 거지로 아는거 아닐까 하는 수치심이 더욱 컷다. 육성회비를 납부하지 못해 호명 당할 때 나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나는 책가방 살 돈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다닌적도 있다. 목욕탕을 가지 못해 친구들이 다니는 길바닥에서 빨간 다리이에 팬티만 입고 엄마에게 등을 밀린적도 있다. 어린시절 가난의 어려움보다 친구들이 날 쳐다보는 눈빛이 더 무서웠다. 어째든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태생이 몸집이 두툼하고 피부가 하해 돼지란 별명으로 친구들은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하루 한끼 라면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만화책을 좋아했고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만화방에 들러 만화책에 빠져 살았다. 친구들이 나를 찾고 싶으면 만화방을 찾아오면 되었고, 심지어 만화방 아저씨는 단골인 나에게 외상으로 만화를 보게도 해주었다. 그때 즐겨봤던 만화가 무엇인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독고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포츠 만화를 즐겨봤던것 같다. 축구, 야구 등 스포츠를 만화를 통해 배웠고 동화나 서양소설을 각색하여 그린 만화들도 즐겨 보았던것 같다. 만화를 보던 습관은 서서히 책을 읽는것으로 넘어가고 어렵게 살던 나는 책을 살 돈이 없어 친구집에 가면 그 집에 있는 책들에 대한 관심과 혹 빌려볼 수 있을까 하는 부탁을 많이 했다. 그 시절 삼중당 문고라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문고판 소설들이 있었다. 지금은 가로로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때만해도 책들은 세로로 쓰여져 있었다. 나는 어디서 생겼는지 기억이 없지만 삼중당 문고의 문고판 책을을 읽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무정, 유정, 흙, 사랑, 등을 읽었다. 심훈의 상록수, 박종화의 금삼의 피, 김동리의 등신불, 김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등 나는 주변에 있는 삼중당 문고판을 모조리 읽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지금 그 소설들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 책속에서 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읽으며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고, 현실의 슬픔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