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났다.
대회 기간 내내 같은 베이징이라는 단어 때문에 2008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피겨를 배우고 있는 막내를 태워다 주는 역할을 해야 해서,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올림픽이라는 큰 행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태극마크는 자부심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은 개막 초기 부터 공정성 문제가 불거졌다. 피겨에서는 금지약물 파문도 일어났다. 스포츠에서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스포츠'라고 불릴 수 없다.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나라나, 선수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태극마크를 돈으로 환산하는 얘기들을 많이 듣는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 이득에만 있을 수 없다. 2006년 WBC도 축구의 월드컵도 과거에는 병역 혜택과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민들은 성과를 가지고 비난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 했냐는 거다. 지금까지 대표 팀 유니폼을 입고, 태극마크를 달고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좋은 성적일 때도,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 결과가 납득 가능한 결과였냐고 국민들은 묻고 있는 거다. 태극마크를 단 사람은, 그 물음에 답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 대표 팀은 종합성적 14위로 대회를 마무리 했다. 우리나라 국민 어느 누구도 못했다고 하지 않을 거다. 공정성 논란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 한 것을 알아주기 때문일 거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불러줘야만 갈 수 있다.
현역 시절 성적이 아무리 좋았어도, 다들 '정근우가 아니면 누가 해'라고 할 때도, 불안했다.
최종 엔트리 발표가 날 때 까지,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최종 엔트리가 발표 나면, 그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차에서 혼자 노래도 부르고, 야구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괜히 말 한 마디 더 건넸던 것 같다.
모든 것의 시작은 '나'
선수 시절, 뭔가 잘 안 맞는다 싶으면, 집에 와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처음엔 경비실에 얘기하러 가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각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방망이를 손에 쥐어야만 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하다 보니, 경비실에 가서, "안녕하세요, 저..."라고만 해도 웃으면서 키를 내주셨다.
열쇠로 열고,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한 밤의 옥상이 넓게 펼쳐졌다. 바람도 불었고, 야경은 좋았다.
베이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선수들만 모여있는 선수촌 건물에서 베테랑들이 먼저 나가서 배트를 휘두르면, 베란다에서 지켜보던 어린 선수들이 따라 나왔고, 투수 조도 함께 나와 섀도 피칭을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야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뿐이다.
분석도 마찬가지다. 간혹 상대가 변화구를 잘 던진다면, 혹은 빠른 공을 잘 던진다면, 같은 상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공을 칠 준비가 되어 있냐는 거다. 상대의 변화구를 노려야 한다면, 내가 그 변화구를 칠 수 있어야 한다. 내 준비는 하나도 안 하고, 상대의 공을 치려고 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거다.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과는 없다. 소속 팀에서도, 대표 팀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는 것은, 그 준비를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은, 스스로 목표가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
금메달은 쿠바 평가전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상대는 쿠바였다.
그 당시 쿠바는 우리에게는 불안한 상대였다. 이름만 들어도, 그 선수들과 경기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지고 들어가는 것 처럼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아마추어 야구에서 쿠바라는 나라의 위상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높았다.
그 해 8월, 잠실야구장에서 쿠바와 두 차례 평가전을 치렀다. 첫 경기는 2:6으로 졌지만, 두 번째 경기는 15:3으로 크게 이겼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두 차례 평가전이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가져왔다. 모든 경기를 이기고, 마지막 결승전에서 쿠바를 만난 것도, 운명으로 느껴졌다.
대승을 거둔 2차전. 그 승리는, 대표 팀 선수단에게 쿠바라는 '공포'를 서서히 지워 나갔다.
아마 쿠바와의 결승전 경기를 기억하시는 모든 분들은 고영민 코치의 병살타구 러닝스로우에 대해서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것 같다. 그때 난 병살이 될 것으로 확신을 하고, 더그아웃에서 뛰어 나오는 중 이었다. 그 순간이 정말 하나하나 모두 기억난다.
철망을 넘어서면서도 고영민 코치가 던진 공을 계속 보고 있었다. 병살이겠지? 병살일 거야!라고 생각을 했지만, 던진 공이 1루수의 미트에 들어올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슬로 모션으로 기억난다.
9전 9승. 금메달.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일본전이 가장 큰 고비였다. 지나고 나면 모두 행복한 기억이겠지만, 일본전을 앞두고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7전7승. 그러나 그 경기를 지면,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 경기를 기억하는 분들은 자주 묻는다.
'이승엽 선수가 부진할 때 분위기 어땠어요?'라고.
한 마디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승엽이 형이 그런 티를 낼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까지 해 온 커리어가 있다. 우리가 정말 힘들 때, 해줄 거라는 정말 확실한 믿음이 있었고, 또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도 태극마크를 달고 왔는데, 우리가 하면 된다고, 선수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메달 색깔을 확정 짓고, 버스를 탔을 때, 많은 선수들이 울었다. 그만큼 불안했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경기였다.
메달을 따고 선수촌에 오면, 안내방송이 나온다. 그러면 숙소에 있는 전 선수들이 베란다에 나와 메달리스트들을 맞아준다. 우리도 다른 종목이 메달 땄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리고 우리가 금메달을 땄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몇 개 동이 들썩였다. 엄청난 환호였다.
운이란 운은 다 끌어서!
다시 시계를 며칠 전으로 돌려보면, 이용대 선수가 배드민턴 혼합복식 금메달을 땄다. (오)승환이가 이용대 선수를 알아서 금메달 딴 이후에 메달을 구경하러 만났었다. 그 때 저 메달을 깨물어 보면, 나도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용대 선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국민들의 성원, 선수단의 노력 등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야구 대표 팀은 금메달을 땄다. 그 사람들 중에 이용대 선수의 도움도 정말 컸다고 생각한다. 미신은 아니라도, 될 것만 같은 기분. 그 기분을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이다.
동계올림픽 덕분에 2008년의 베이징 생각을 많이 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한 번 쯤 그 영상을 다시 봐주시면 좋겠다. 그래서 올 시즌의 기대를 부풀리고, 야구에 대한 애정을 조금 더 가져주시기를 희망한다.
정근우 / 전 프로야구 선수, 현 최강야구 멤버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