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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이병규 일러스트 / 출처=KBO
스피드와 정교감을 모두 갖춘 신인의 등장
1997년 괌에 차려진 LG 트윈스 스프링캠프. 키 크고 깡 마른 한 대졸 신인 선수가 선배들을 긴장시켰다. 당시 LG 외야에는 김재현을 비롯해 노찬엽, 심재학 등이 포진해 있었다. 심재학 현 해설위원은 “큰 키(1m85)로 스윙 스피드와 컨택 능력을 동시에 갖추기가 쉽지 않은데 이병규는 부러울 정도로 스윙이 너무 좋아서 처음 볼 때부터 ‘얘, 물건이네’ 했다. 여차하면 내가 밀리겠구나 싶어 더 열심히 훈련했다”라고 했다. ‘적토마’ 이병규는 이렇듯 처음부터 선배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새내기였다.
5툴 플레이어의 화려한 등장
▲ 적토마의 멋진 슬라이딩. 상대팀은 당시(1997년) 우승팀이었던 ‘왕조’ 해태 타이거즈 / 사진 출처=KBO
1997시즌프로야구에 뛰어든 신인은 총 58명(투수 23명, 야수 35명)이었다. 이병규를 비롯해 김창희(해태), 백재호(한화), 임선동(LG), 진갑용(OB) 등이 이 해에 프로 데뷔를 했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프로야구 사상 타자 최고액(계약금 4억4천만원·연봉 2천만원)으로 LG와 계약한 이병규는 이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유일하게 전 경기(126경기)를 소화하면서 타율 0.305(495타수 151안타), 7홈런 69타점 23도루 82득점을 기록했다. 최다 안타 3위에도 올랐고, 골든글러브도 따냈다. 심재학 해설위원 말처럼 ‘물건’이었다.
이병규는 아마추어 때부터 5툴 플레이어였다. 타격 능력은 물론이고 발도 빨랐다. 초등학교 때 육상 중거리(800m) 선수였던 게 도움이 됐다. 5학년 때 육상부 해체 뒤 야구부 입단 권유를 받은 이유도 달리기를 잘해서였다. 이병규는 “중학교 때까지는 키가 작았는데 고등학교 때 많이 컸다”라면서 “고교 시절에도 겨울 때마다 달리기를 많이 했다. 70m를 계속 뛰었는데 스피드가 점점 더 늘었다”라고 했다. 그는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어깨 또한 강해서 아마 시절에는 ‘한국의 이치로’로 불리기도 했다. LG 사령탑 부임 직후 ‘힘과 스피드의 야구’를 내세운 천보성 당시 LG 감독이 그를 계속 주전으로 기용한 이유다. 이병규는 서용빈, 심재학과 좌타라인을 구축하며 LG가 정규리그 2위(73승51패2무·승률 0.587)를 하는데 보탬이 됐다.
▲ 1997년, 신인왕을 받고 활짝 웃는 이병규. 이후 LG 트윈스 소속 신인왕이 나오기까지는 22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 사진 출처=KBO
3년차에 전성기를 맞이한 적토마
프로 2년차 때는 다소 주춤했으나 3년차(1999년)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안타제조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31경기 출전, 타율 0.349(550타수 192안타), 30홈런 31도루 99타점 117득점. 타율·득점 2위, 최다안타 1위의 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선수로는 최초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이병규 이후 잠실야구장에서 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1999시즌 전 방콕아시안게임(1998년 12월)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은 게 컸다. 프로 선수의 출전이 처음 허용된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그는 타율 0.560(25타수 14안타) 4홈런 12타점 12득점으로 맹활약했다. 그때 함께 출전했던 이들이 박찬호(LA 다저스), 서재응(뉴욕 메츠), 박재홍(현대), 임창용(해태), 김병현(성균관대) 등이었다. 한국은 결승전에서 사회인야구팀으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에 13-1, 7회 콜드승을 거뒀는데 일본은 이때의 수모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프로-아마 혼성팀을 내보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듬해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병규는 “군 문제가 해결되니까 심리적으로 안정됐다”라고 했다. 괌 전지훈련 때 이창호 LA 다저스 출신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 것도 도움이 됐다. 이병규는 “웨이트로 몸 근육 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82㎏이던 몸무게도 87㎏으로 늘었는데 근력이 좋아지니까 힘이 붙었다”면서 “실전 경기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비거리가 10m 정도 더 나오면서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3년차여서 성숙해진 면도 있었다”라고 돌아봤다.
▲ 1999년부터 3년 연속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시절의 이병규 (사진은 2000년 시상식) / 사진 출처=KBO
이병규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 연속 최다안타 1위를 기록했다. KBO리그 유일의 기록이다. 최다안타왕은 그가 프로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배드 볼 히터였기 때문에 프로에서 타격왕은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 대신 리그에서 안타를 제일 많이 치는 선수는 되고 싶었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국제무대에서 단련된 최고의 테크니션
이병규는 프로야구 역대 타자 중 최고 테크니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좋은 공이든 나쁜 공이든, 높은 공이든 바닥에 처박히는 공이든 안타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김성근 현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고문이 LG 감독 시절 “한국에서 유일하게 4할을 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라고 극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타석에 임했다. 어릴 때부터 정립된 야구관이 그랬다. 적극적인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것. 이병규는 “투수들도 카운트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초구부터 원하는 공이 들어오면 놓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휘두르자고 마음먹었다. 어찌 됐든 타석에서 타자는 불리한 위치에 있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원하는 공이 들어오면 무조건 휘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라고 했다.
데뷔 전부터 타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프로 투수들의 공이 두렵지 않았다. “던져봐, 다 쳐줄게”라는 마음가짐으로 타석에 섰다. 이유가 있었다. 단국대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한 풍부한 경험 덕분이다. “대표팀을 하면서 당시 한국 투수들보다 공도 빠르고 컨트롤도 좋은 쿠바, 일본, 도미니카 투수들의 공을 많이 겪어봤다”라는 그는 “외국 투수들의 공을 쳐보니까 국내 투수 공도 꽤 익숙한 면이 있었다. (박)재홍 선배도 프로 적응이 빠른 편이었는데 아마도 대표팀 경험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병규는 방콕아시안게임 전에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과 본선(1995~1996년)을 뛰었고 방콕 대회 이후에는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 2000년 시드니올림픽,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6년 WBC, 도하아시안게임 등을 뛰었다. 2006 WBC 때는 다소 약한 모습(타율 0.192)을 보였으나 2006 도하아시안게임 때는 타율 0.625(16타수 10안타)의 맹타를 휘둘렀다.
그의 야구 삶에 시련이 닥친 해는 2003년이었다. 이병규는 2003년 5월29일 잠실 SK 와이번스전에서 주루 도중 왼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 야구선수로서의 삶이 위협받는 큰 부상이었다. 독일 쾰른에서 무릎 수술을 받은 뒤 재활을 하면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나이 서른 살. 정상적인 그라운드 복귀가 가능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병규는 “1년 가까이 야구를 쉬게 되니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라면서 “그나마 재활과정에 충실해서 이듬해 복귀할 수 있던 것 같다”라고 했다.
1년의 쉼표 기간 느낀 점도 많다. 2004년 건강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로 돌아온 이병규는 2005년 타격 1위(0.337), 최다 안타 1위(157개)를 차지했다. 하고자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그였다. 이병규는 “무릎 수술 이후 야구에 조금 더 간절해졌다. 돌이켜 보면 야구에 더 집중하라고 1년의 시간을 준 것도 같다”라면서 “이후 최다안타 1위도 하고 34살 늦은 나이에 FA로 외국(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나가 또 다른 야구를 배울 기회도 생겼다. 2003년이 나한테 터닝 포인트가 됐고 야구를 조금 더 오래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라고 했다.
이병규의 타격 테크닉은 나이가 들어서도 전혀 낡지 않았다. 2013년 한국 나이로 마흔 살에 타격 1위(0.348)에 올랐다. 역대 최고령 타격왕이었다. 7월3일 잠실 한화 이글스전 5회말 1사 만루에서 조지훈으로부터 우중간 3타점 2루타를 뽑아낸 것을 시작으로 7월10일 잠실 NC 다이노스전 첫 타석에서 손민한을 상대로 우전안타를 기록하며 국내 최초로 10연타석 안타의 주인공도 됐다. 기록을 이어가는 와중에 7월5일 목동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안타, 홈런, 2루타, 3루타를 차례대로 쳐내며 역대 최고령(38살8개월10일) 히트포더사이클(사이클링 히트) 기록도 세웠다. 당시 이병규를 옆에서 지켜봤던 박용택 야구해설위원은 “역시 ‘이병규는 이병규구나’ 했다”라고 말했다.
‘캡틴’ 이병규의 활약 덕에 LG는 정규리그 2위로 2002년 이후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6-6-6-8-5-8-7-6-6-7의 순위를 지나 기나긴 암흑기를 벗어났다. 이병규는 “선배들이 잘 이끌어주고 후배들이 잘 따라주면서 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올해는 되겠구나’ 싶었는데 10월5일 정규리그 2위를 확정 지으니까 진짜 행복했고 뿌듯했다”라고 밝혔다. 프로 입단 첫해부터 포스트시즌을 뛰면서 쉽게만 보였던 가을야구였다. 이병규는 “프로 와서 연달아 포스트시즌 무대에 올라서 당연하게 가을야구를 하는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든 일이었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루지 못한 아쉬운 꿈, KBO리그 우승
그의 가장 큰 아쉬움은 KBO리그에서 우승이 없다는 점이다.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2007~2009년)에는 일본시리즈 우승(2007년)을 경험했지만 KBO리그 17시즌 동안에는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본 적은 없다. 2002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그때, “너무 억울해서” 야구 시작하고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당시 LG는 9회초까지 9-6으로 앞섰으나 9회말 이승엽, 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면서 역전패를 당해 시리즈를 내줬다.
▲ 애틋한 사제지간. 2007년 코나미컵 당시 SK 사령탑 김성근 감독과 주니치에서 활약하던 이병규가 경기 전 서로를 껴안는 모습. / 사진 출처=KBO
이병규는 2016년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양상문 LG 감독이 세대교체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1군에서는 시즌 마지막 경기 한 타석에밖에 서지 못했다. 혹시나 부름을 받을까 싶어 2군 퓨처스리그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4할대 타율을 계속 유지했는데 확대 엔트리 때도 1군 부름은 없었다. 그는 10월 8일 두산 베어스 선발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프로 2043번째 안타를 치며 유니폼을 벗었다. 안타 제조기다운 방점이었다.
▲ 영원한 LG의 9번 이병규 / 데일리안
타격 1위 2차례(2005년, 2013년), 최다안타 1위 4차례(1999년, 2000년, 2001년, 2005년), 득점 1위 1차례(2001년). 그리고 올스타전 MVP(2011년), 골든글러브 7차례 수상(외야수 6번, 지명타자 1번). 통산 3000타석 이상 은퇴 선수 기준으로 프로 통산 타율(0.311)은 장효조(0.331), 김태균(0.320), 양준혁(0.316)에 역대 4번째(타율 0.313의 제이 데이비스를 포함하면 5번째)로 높다. ‘노송’ 김용수에 이어 LG 구단 사상 두 번째 영구결번(9번)이 되기 충분한 업적이었다.
이병규는 현역 시절의 성과에 대해 ‘90점’이라는 점수를 매긴다. “10점은 조금 더 집중해서 야구했을 시간이 있던 것 같기 때문”이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 것”이란 말을 자주 해준다.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나중에 아쉬움이 남게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 LG의 영원한 9번, 이병규의 은퇴식
이병규와 함께 LG에서만 야구를 한 박용택 해설위원은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2002년 신인 시절에 병규 형과 내기를 했었다. 시즌 뒤 밥사기 타율 내기였는데 당시 내 타율이 3할3푼대, 병규 형이 2할9푼대를 치던 때였다. ‘옳다구나’ 하고 내기를 했고 막판에 타율이 엇비슷했는데 마지막 날 3타수 3안타를 치면서 나보다 기어이 타율(0.293)이 앞섰다.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이 대단한 선배였다.” 박 해설위원은 이런 말도 곁들였다. “언론 등에 비친 병규 형은 까다롭거나 까칠한 모습이지만 절대 아니다. 다정다감하고 친근하게 후배들에게 다가선다. 너무 솔직해서 마음에 있는 것을 숨기지 않아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내가 형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이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고민 없어 보이지만 진짜 고민은 주변 사람에게 숨기는 그런 형이다.”
이병규는 야구를 정말 좋아했다. “푸른 잔디밭에서 뛰어다니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말한다. “당일 경기 성적은 잊고 바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였다”라고. 그 스스로는 말한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니 결과가 그냥 따라왔을 뿐”이라고. 어제의 실패를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의 야구에 오롯이 집중하며 푸른 잔디밭을 있는 힘껏 뛰어다닌 ‘적토마’ 이병규였다.
김양희 기자 / 한겨레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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