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원
-신석정의 <산새 이야기> 조명
김형진
산새이야기
신석정辛夕汀(1907-1974) 《시문학》 동인 신석정 전집 5권
나는 청수하고 소박하고 고요한 산새를 좋아합니다.
일광日光만이 자주 굽어볼 수 있으며 때때로 맑은 바람이 스쳐갈 수 있는 저 정밀靜謐한 나무의 작은 가지가 아니면, 산기슭의 조용한 바위틈에나 시냇물 흐르는 언덕의 오묵한 덤불밭에 작고 소박하고 그러나 아망스런 보금자리를 두고, 낮이면 백운의 일군一群만이 소요하거나 외로운 구름 한 쪽이 유유히 떠가는 저 푸른 하늘을 자취 없이 오고 가며, 밤이면 맑은 달빛이 내려다보는 그 소박한 궁전에서 푸른 꿈을 말없이 짜내는 그 산새를 나는 사랑합니다.
이른 봄 해묵은 나무를 쿡쿡 찍으며 심산유곡을 저 혼자 고요히 울리는 탁목조啄木鳥보다도 푸른 숲 배어드는 듯한 녹음에 숨어 우는 푸른 오월의 꾀꼬리의 맑은 노래보다도 따뜻한 가을 석양 뉘엿뉘엿 넘어갈 제 두세 마리 울며 가는 산가마귀 소리 더욱 청아합니다.
하늘 맑고 물 맑고 바람 맑고 산 맑은 가을이면 모두 다 명랑하고 청징淸澄하지만 가을 날 산새소리 더욱 맑고 고요합니다. 청정淸淨한 일광을 온 몸에 쪼이며 나뭇가지에 고요히 앉아서, 그 어여쁜 주둥이로 제 몸을 싸고도는 일광을 작고 보드라운 제 털과 암냥하여 늬긋늬긋 청담한 공기를 날씬하고도 좁은 가슴에 호복이 들이마시는 산새는 그 체구가 맑고 그 음성이 맑고 그 생활의 전폭이 맑습니다.
황혼녘에 따뜻한 햇볕이 새어드는 과히 짙지 않은 숲에 산새-그것은 작은 산새였다.-10여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그 중 몇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몇 제 몸을 몹시 지근거리고, 또 몇 마리는 가느다란 소리를 하며 열매를 찍어먹고-그러나 그리 바쁘지 않게-나머지 또 몇 마리는 한가히 서로 마주앉아서 마치 그날 하루를 서로 중얼거리며 이야기하는 것도 같았으니, 그것은 귀소歸巢 전에 열리는 평화로운 음악회와도 같습니다. 또 그 너머에는 두세 마리 작은 산새가 따뜻한 햇볕에 일광욕을 하는지, 고요한 명상에 잠겼는지 살랑이는 잎새와 정정한 나뭇가지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가장 고요한 먼 산과 무한 침정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어쨌든 희열이 충만한 평화로운 모임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산새 생활을 자주 순례하던 2,3년 전 가을의 일입니다. 나는 날씬하고 청수하고 그리고 소박한 산새의 체구미體軀美를 사랑하고, 그 맑은 노래를 사랑하고, 희열에 충만한 귀소 전의 평화한 대화를 사랑하고, 무소유하고 청정하고 그리고 단조한 그들의 생활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따뜻한 햇볕에 옴속 파묻혀 아무 작은 파문도 없이 고요히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그들의 그 평정한 마음입니다.
오늘 석양에도 나의 집 동편 울 옆에 있는 작은 버드나무에는 이름 모를 조그만 산새가 와서 그런 평정한 명상을 한참 하다가 또 어디로인지 떠났습니다. - 《신석정문학전집Ⅳ 2009.》 <영산조詠山鳥>중에서
1933년 《신생》에 발표한 신석정의 <산새 이야기> 얼핏 전원적인 글, 자연친화적인 글로 단정하기 쉽다. 전원시인이라 불리는 석정의 문학세계가 잘 드러난 수필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청수하고 소박하고 고요한 산새를 좋아합니다.
일광日光만이 자주 굽어볼 수 있으며 때때로 맑은 바람이 스쳐갈 수 있는 저 정밀靜謐한 나무의 작은 가지가 아니면, 산기슭의 조용한 바위틈에나 시냇물 흐르는 언덕의 오묵한 덤불밭에 작고 소박하고 그러나 아망스런 보금자리를 두고, 낮이면 백운의 일군一群만이 소요하거나 외로운 구름 한 쪽이 유유히 떠가는 저 푸른 하늘을 자취 없이 오고 가며, 밤이면 맑은 달빛이 내려다보는 그 소박한 궁전에서 푸른 꿈을 말없이 짜내는 그 산새를 나는 사랑합니다.
<산새 이야기>의 허두이다.
화자의 산새를 좋아한다. 청수하고, 소박하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청수한 것은 외형이며, 소박한 것은 생활이고, 고요한 것은 내면이다. 그중 화자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내면이다. 낮이면 구름이 흐르는 푸른 하늘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날아다닌다 함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은 화자의 희원의 표출이며, 밤이면 달빛 비치는 소박한 둥지에서 푸른 꿈ㅇㄹ 짜낸다 함은 화자가 희원하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화자의 심정을 표출한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경지를 넘어 사랑하게까지 된 것이다.
이른 봄 해묵은 나무를 쿡쿡 찍으며 심산유곡을 저 혼자 고요히 울리는 탁목조啄木鳥보다도 푸른 숲 배어드는 듯한 녹음에 숨어 우는 푸른 오월의 꾀꼬리의 맑은 노래보다도 따뜻한 가을 석양 뉘엿뉘엿 넘어갈 제 두세 마리 울며 가는 산가마귀 소리 더욱 청아합니다.
하늘 맑고 물 맑고 바람 맑고 산 맑은 가을이면 모두 다 명랑하고 청징淸澄하지만 가을 날 산새소리 더욱 맑고 고요합니다. 청정淸淨한 일광을 온 몸에 쪼이며 나뭇가지에 고요히 앉아서, 그 어여쁜 주둥이로 제 몸을 싸고도는 일광을 작고 보드라운 제 털과 암냥하여 늬긋늬긋 청담한 공기를 날씬하고도 좁은 가슴에 호복이 들이마시는 산새는 그 체구가 맑고 그 음성이 맑고 그 생활의 전폭이 맑습니다.
첫 문장에서는 계절에 따라 자연을 녹여내는 산새(탁목조, 꾀꼬리) 소리와 화자가 선호하는 계절에 황혼과 어우러진 산가마귀 소리를 정교한 언어구사를 통하여 묘사했다. 둘째 문장에서는 청정한 가을의 자연 중에서도 맑고 고요한 산새소리가 화자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셋째문장에서는 산새의 행위, 체구, 소리 등 생활의 모두가 청정함에 찬사讚辭를 보낸다. 특히 '청정'淸淨한 일광을 온 몸에 쪼이며 나뭇가지에 고요히 앉아서, 그 어여쁜 주둥이로 제 몸을 싸고도는 일광을 작고 보드라운 제 털과 암냥하여 늬긋늬긋 청담한 공기를 날씬하고도 좁은 가슴에 호복이 들이마시는 산새'에는 자연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몸 전체가 정정하여 어디에서도 오점을 찾을 데가 없는 산생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화자, 나아가서는 동시대同時代 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대비시켰다.
그래서 산새는 몸이 맑고, 음성이 맑고 생활 전체가 맑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음성'이라는 단어이다. 음성이란 '사람의 발음 기관에서 나오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소리'이다. 새소리는 음성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화자가 굳이 새소리를 음성이라고 펴현한 데는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황혼녘에 따뜻한 햇볕이 새어드는 과히 짙지 않은 숲에 산새-그것은 작은 산새였다.-10여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그 중 몇 마리는 나뭇가지에서 몇 제 몸을 몹시 지근거리고, 또 몇 마리는 가느다란 소리를 하며 열매를 찍어먹고-그러나 그리 바쁘지 않게-나머지 또 몇 마리는 한가히 서로 마주앉아서 마치 그날 하루를 서로 중얼거리며 이야기하는 것도 같았으니, 그것은 귀소歸巢 전에 열리는 평화로운 음악회와도 같습니다. 또 그 너머에는 두세 마리 작은 산새가 따뜻한 햇볕에 일광욕을 하는지, 고요한 명상에 잠겼는지 살랑이는 잎새와 정정한 나뭇가지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가장 고요한 먼 산과 무한 침정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어쨌든 희열이 충만한 평화로운 모임인 것이 분명합니다.
황혼녘 볕을 받으며 잎 성근 나뭇가지에 작은 산새 10여 마리가 앉아 있다. 황혼녘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때이다. 잎이 성근 나뭇가지는 가을이다. 황혼녘에서는 휴식을, 가을에서는 결실을 유추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결말의 애잔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아무튼 산새들은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하루를 사느라 흐트러진 몸을 가꾸는 놈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놈들, 또 몇 마리는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기도 하다. 이는 새들의 생활을 인가느이 그것과 같이 보련ㄴ 화자의 시작이다.
앞에서 새가 내는 소리를 음성으로 표현했듯이 할 수만 있었다면 귀소도 귀가歸家로 표현했을는지도 모른다. 산새들이 보여주는 생활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희우너하는 화자의 의중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산새 생활을 자주 순례하던 2,3년 전 가을의 일입니다. 나는 날씬하고 청수하고 그리고 소박한 산새의 체구미體軀美를 사랑하고, 그 맑은 노래를 사랑하고, 희열에 충만한 귀소 전의 평화한 대화를 사랑하고, 무소유하고 청정하고 그리고 단조한 그들의 생활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따뜻한 햇볕에 옴속 파묻혀 아무 작은 파문도 없이 고요히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그들의 그 평정한 마음입니다.
글의 서두와 전개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중에서 외면보다 내면(마음)을 중시하는 화자의 심중을 강조한 핵심 단락이다.
오늘 석양에도 나의 집 동편 울 옆에 있는 작은 버드나무에는 이름 모를 조그만 산새가 와서 그런 평정한 명상을 한참 하다가 또 어디로인지 떠났습니다.
<산새 이야기>의 결미이다. '오늘' '나의 집'이 주는 시간적, 공간적 인접성으로 산새와 화자가 가까이 잇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 속의 글임을 암시하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효과도 보여준다.
<산새 이야기>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그 먼 나를 알으십니까>의 앞부분 세 연이다.
핵심을 이루는 시어는 ‘그 먼 나라’이다. 그 나라는 들에 장미가 피고, 호수에 물새가 날고, 넓은 들에 노루새끼가 마음 놓고 뛰노는 곳이다. 이것은 현실세계가 아니다. 이상의 세계, 희원의 세계이다. 그러면 현실세계는 어디 있는가? 시의 바닥에 숨어 있다. 시인의 의식 안에 숨어 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먼 나라'는 희원의 세계이다. 희원은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생긴다. 곧 현실세계를 베일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다.
<산새 이야기>는 화자를 사로잡아 사랑을 느끼게 한 산새들의 세계는 곧 ‘그 먼 나라’이다. ‘그 먼 나라’가 시적 자아가 희원하는 세계 표출이듯 ‘고요한 먼 산과 무한 침정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산새들의 모습은 화자가 산새를 통해 표출한 희원의 세계이다.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며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그러나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세상에 대한 희원인 것이다.
문학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베일을 써야한다. 속내를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야 한다. <산새 이야기>에 쓰인 베일, 그것은 문학 사회학에서 흘러나오는 ‘체제 파괴적인 것들은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는 설을 상기시킨다. 더불어 두 작품은 공히 경어체 어미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도문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자연친화적, 전원적인 베일 속에 불합리한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을 숨겨 표현한 <산새 이야기>는 시대상황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높은 문학적 표현기법이 어울려 빚어낸 품격 높은 수필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