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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려 난 시골 촌놈이여
내 이름은 이오만. 만 이십 구 세의 미혼으로 m신문사의 사회부 말단기자다. 내 고향은 구절양장 시오리 신작로 길을 걸어야 읍내가 나오는 오지 중의 오지 싸리골이다.
삼십 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강촌, 싸리골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씨족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고 지금도 옛 전통대로 촌수와 항렬을 중시하여 아무리 어린 소동이라 하더라도 위 항렬이면 존대를 하였고 밑 항렬에게는 존대치 않으며 문중의 대소사는 물론, 잡사 하나에 이르기까지 문중이 모여 결정하는 그런 관례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포장되었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나룻배로 강을 건너 시오리의 신작로를 지나야 문명의 세계와 연결이 되는 이 촌락에서 나의 학창시절이 있었고 그녀와의 사건으로 ‘잡놈’이란 멍에를 쓰고 추방되기 전까지 난 이 촌락의 희망이었고 믿음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혜선이고 나와는 한 살 터울이었다. 또 그녀는 종가집의 종손녀였고 나는 문중의 위 항렬의 자제였기에 그녀와 나와의 촌수는 내가 대부였다. 꼭이 따지면 고조뻘 쯤 된다. 하나 어린 우리에겐 항렬이 뭔지 촌수가 뭔지 몰라도 좋았다. 그녀와 나의 집은 촌락에서 다소 외진 곳에 나란히 이웃해 있었기에 놀이 또래가 그녀와 내가 전부였다. 나는 신랑, 그녀는 각시, 우리의 유아기 바꿈살이 놀이였고 미운 일곱 살을 지나 읍내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어도 등하교 길의 유일한 동료며 동무였다.
하교길이면 신작로가 물레방앗간에서 술래잡기며 나룻배를 기다리는 동안 강가에 퍼질러 앉아 두꺼비집을 짓느라 해지는 줄도 모르던 그녀와 나만의 소싯적 추억이며 역사였다.
우리가 누군 줄 모르는 타지인 남매로 오인을 하기가 일쑤였고 누가 너희 남매가 아니냐고 물으면 우리는 아주 매몰차게 우리는 신랑각시며 이 다음 우리가 크면 결혼할 것이니까 신랑각시가 맞다고 대답하면 당돌하다고 어른들은 껄껄 웃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던가. 어느 여름날 공동묘지 옆 밀밭에서 오개를 배가 터지도록 따먹고 시뻘건 이빨을 드러내며 귀신 흉내를 내자 그녀가 너무 놀란 나머지 치마에 오줌을 지리며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음을 터뜨릴 때 소년은 소녀의 봉긋하게 솟기 시작하는 가슴의 감촉에 얼굴을 붉힌적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아울러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어깨를 나란히 한 등 하교길이 자연스레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길동무가 되지 못했다. 이것이 머스마와 계집애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이성이었고 감정이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엄연한 문률, 고등학생이 된 우리는 은연중에 동성동본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에 길들여져 있었고 이러한 의식은 한 문중의 자손이란 사실이 그녀와 내가 남과 여라는 이성본능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단지 우리는 동문일 뿐이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가 오히려 우리를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길동무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녀와 내 의식 속엔 애정이란 감정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혜선은 나이가 들면서 차츰 예뻐지기 시작했고 미스코리아는 따 놓은 당상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기도 했다. 그만큼 인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용월태가 돋보였고 몇 년 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본선까지 올랐으니 시골의 총각선생들에게 유난히 편애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니 당연히 동료들의 시샘 또한 유별났다.
그런 그녀에게 나란 존재는 단지 등하교 길의 동료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나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고 그녀처럼 우등생이 못 될 바엔 무엇인가를 보여 줄게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물론 시를 쓰게 된 동기가 단지 이것 뿐은 아니었지만 당시를 기억해 내자니 아마 몇 십 권의 시집을 사서 달달 외우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는 성어가 있듯이 얼마 후 학교내의 백일장은 물론이고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은 나 이오만이 싹쓸이를 하였고 모 신문의 신춘문예를 거쳐 문단등록이 고등학교 졸업 이전에 완료가 되었다. 나도 이젠 그녀 앞에 내세울 게 있다는 오만과 함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조용한 시골에서 나의 등단은 센세이션을 불러올 만큼 큰 사건 중의 사건이었고 그녀 또한 이 사건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음을 먼 후일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우리의 이루지 못할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결코 사춘기 고등학생들의 순간적인 불장난이라 하기에는 그녀와 나의 운명적인 연결의 고리가 너무 굳게 매듭지어 있었다.
마지막 여름방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온종일 살을 태울 듯한 땡볕과 무더움으로 종일토록 후줄건한 날씨더니 막상 종례가 시작될 무렵부터 먹장구름이 몰려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예의 그 물레방아간이 저 멀리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장대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이내 생쥐 꼴은 되었지만 그래도 비는 피해야 할 곳이 물레방아간이 유일한 곳.
“어 엄마야!“
방앗간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웬 낮도깨비 같은 비명인가. 오히려 내가 소스라쳐 고개를 돌려보니 아뿔싸! 이게 뭔가.
예뻐질 대로 예뻐져 그토록 관심을 집중시키려 노심초사하던 그녀가 알몸으로 젖은 교복의 물기를 짜고 있었을 줄이야. 봉긋한 젖무덤을 그대로 방치한 채 석상이 되어 나만 멀건이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그렇게 서로를 주시한 잠깐의 시간이 억겁으로 느껴졌고 재차 천둥 번개가 몰아쳐서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리 줘. 내가 짜아줄게.“
“싫어 내가 짤 거야“
다소 다급하게 뺏는 그녀와 뺏기지 않으려는 나는 엉거주춤 포옹하는 자세로 밀착이 되었고 이 와중에 그녀는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쌔근거렸다.
이 순간 나는 문득 그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는 데 먼 옛날 초등학교 시절 공동묘지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으스러지라고 꼬옥 껴안았다. 주체치 못할 정도로 크게 뛰어 노는 그녀의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차가워진 그녀의 입술을 덮어 갔다. 제발 이 순간이 영원할지라고 -
그러나 나의 염원은 벼락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만큼 그녀의 손매는 매서웠고 나의 볼은 이내 선명한 손자국을 남겼다.
“오빠. 우리 어릴 적 약속 지금도 유효한 거야......?“
비가 온지가 언제냐 싶게 하늘은 청아하게 개어 있었으며 간간이 박자를 맞추며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만이 그 시간 그 정경에서 유일한 소리였다. 그녀는 얼마나 흐느꼈는지 퉁퉁 부은 눈을 뜨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물이 언저리에 맺혀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뭘?“
“우리 영원한 신랑 각시 ... 맞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던 그녀와 나만의 세계에서 한 약속. 그 약속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니,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무수하게 많던 모든 이야기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난 오빠를 평생 미워할 거야.“
그녀의 눈은 이내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이글거렸고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다가왔을 때 뜨거운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느끼면서 난 참으로 그 순간에 억겁 같은 상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나에 대한 밝고 어두운 미래였다. 그리고 그녀의 뜨거운 입술은 내 영혼을 그녀의 사슬에 묶는 덫이었다.
우리는 방학동안 만나지 못했다. 계집애는 서울로 무슨 학원인가를 다닌다고 상경을 하였고 나는 인근의 도회지로 영언가 수학인가의 보충학습을 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계집애에게 원망어린 편지 한 통 받은 게 전부였다.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날 이후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시오리의 하교 길을 나란히 하면서 그녀와 나는 훌쩍 성숙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성년이 된다는 것과 사회인이 되었을 때의 우리의 거취가 가장 큰 고민이었음에 우리의 갈 길을 선택하는 번뇌가 우리를 성숙케 한 요인이었다. 윤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의 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같은 문중에서 혼인했다는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우리는 매일 만나면서도 진실된 연애감정은 다소 배제되어 있는 상태로 맥 풀린 대화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예비고사를 준비한다며 난 읍내에 자취를 고집했고 가끔 그녀가 찾아오면 우리는 설은 애정확인을 하곤 했는데 그날은 참으로 재수 없게 우리의 키스 신을 지도교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지도교사는 총각선생님이었고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문중을 찾아 정식으로 청혼을 해 왔을 정도니 우리의 꼴불견은 그 선생에게 얼마나 눈꼴 시린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우리는 ‘연애대장‘이란 대자보를 등에 붙이고 꼬박 일주일을 운동장 연단에서 벌을 섰으며 나머지 일주일은 유기정학에 처해져 문중으로부터의 청문회를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청문회에서 본의 아닌 베드로가 되어 우리의 관계를 부정해야 했고 청문회가 끝나면 부정한 몇 배 이상의 사랑연습을 했다.
평시 온순하면서도 청초롱한 그녀의 눈빛이 나와 마주 대하고 있으면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강한 집착이 뭍어 있었고 언제나 계집애의 입술은 잘 익은 복숭아 냄새로 뜨거웠다. ‘미워. 죽도록 미워할 거야.‘ 계집애는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좌우명을 뒤로하고 사라진다.
문중과 학교측의 판단은 현명한 것이었다. 계집애는 서울로, 나는 부산으로 전학을 시켜 학업을 계속하게 하였지만 이후 우리의 만남은 매 주일마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에서 더 짜릿하게 계속되었다. 숨어 만나던 시골에서 보다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 만남인가. 그래서 우리는 문중과 학교의 처사에 감사하는 절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듬해 계집애는 졸업반이 되었고 나는 부산의 D대학에 무사히 입성을 하였다. 누구보다도 그녀는 좋아했고 주말마다 내려와 구경시켜달라며 극성을 떨었다. 그래서 학교며 명소를 함께 다녔고 같은 학번에 계집애를 소개도 하였는 데 덕분에 미팅제의로 즐거운 고민도 많았다.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계집애의 미모로 나의 우월감은 자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명제가 대두되면 먼 타인처럼 생각되어지는 중에도 혹 그런 날이 온다면 하는 막연한 불안속에서 그녀만은 행복해야 한다는 절대의식이 내 가슴속에서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계집애가 서울의 명문 e대학에 무사히 합격을 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아쉽게도 결선까지 진출은 하였지만 등수엔 들지 못했다. 하나 얼마 후 m방송국의 PD에게 전격 캐스팅이 되었고 이무렵 난 입영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계집애와 나와의 만남은 서로가 원하고 필요할 때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데 차츰 면회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제대 몇 개월을 앞두고 있었을 때쯤 계집애는 학교를 졸업하고 안방의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면회는 중단되었으며 모 재벌의 이세와의 염문설이 신문들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공식적인 결혼 발표가 공표되었다.
다만 막연하게만 불안의식으로 다가와 있던 계집애와 나와의 결말이 도래하고 있음을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고 막상 결론의 시간이 다가오자 이런 날을 위해 준비했던 냉철한 판단들이 사라지고 살아야 하느냐 마느냐의 갈등과 모멸감이 한동안 날 방황케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날 배신했다는 현실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당연히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는, 꼭 행복해야 한다는 자폭의사가 날 주정꾼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따져본들 어쪄랴. 예쁜 계집애는 명문대에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신데렐라. 이에 반해 난 지방의 삼류 대에 복학을 기다리는 미미한 존재로 그 차이란 봉황과 반디불의 차이라는 데 그녀에 대한 집념을 희석시키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속어에 용감한 자만이 미녀를 얻을 수 있다라고 했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녀의 결혼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문중에서 ‘잡놈‘으로 추방당하는 결론이 있었다면 차라리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가 원든 원치 않든 보쌈이라도 하여 되는대로 살아 볼 수도 있으련만. 용기도 희망도 잃은 나는 그렇게 하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슴앓이가 되어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내 치부가 되었다.
결론은 이런 것인데 나 홀로 애증을 삭인들 무슨 의미인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만큼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게 최상의 예물이리라. 나는 내 쓰라린 감정을 이런 허세로 포장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채 삶 자체를 마감할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운명의 여신은 가혹했다. 그녀의 결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고 문중의 경사로 떠들썩했던 그날 난 그날도 만취한 상태였고 그날 진짜 베드로가 되어 그녀를 모른다고 부정했더라면 그녀는 행복한 가정과 부귀영화를 함께 했을 것이고 나 또한 편안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즐거운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
읍내에서 누구를 만나 얼마를 마셨는지 신작로를 갈지자로 허우적일 때 날 부축한 게 그녀였다. 이건 현실이 아닌 꿈일 것이다. 분명 꿈이어야 한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고 나의 초라한 모습을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데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와락 그녀의 풍만해진 가슴에다 눈물 콧물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아아. 이대로 죽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대로 영원할 수만 있다면. 아아.
“오빠 미안해. 나 결혼 날짜 잡혔어. 그치만 오빤 이해 할 거야. 난 결코 오빨 배신하지 않아. 내 몸은 가더라도 내 영혼은 항상 오빠와 함께 할 테니까.“
아아 무슨 말이란 말인가. 결혼을 하면서 영혼을 남겨놓고 간다니 대체 결혼이 무슨 수학 방정식 같은 것이란 말인가. 그 당시의 내 사고력으로는 도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우리는 동성동본의 한 문중이므로 결혼할 수 없으니 이제 서로가 잊는 게 좋겠다고 결별을 선언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제발 나로 하여금 미련을 갖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다. 제발... 나는 그녀의 박속같은 입술을 미친 듯이 탐닉하면서 내 자신의 의지와 숨막히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의지와는 달리 그녀를 예의 그 물레방앗간 안으로 끌어들였고 그녀는 나의 손길을 거부한 체 스스로 한 꺼풀씩 옷을 흘러내렸다.
“오빠 내 편지 기억하고 있지? 영원히 미워한다는 말.“
옷을 추스르자 길고 긴 입맞춤을 끝으로 어둠속에 묻혀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죽음 보다 더 깊은 절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혈화 한 송이가 달빛에 피어 있음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 날. 어차피 불청객일 수밖에 없었던 난 만취한 상태로 식장을 이내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그녀의 남동생과 문중의 청년들로 하여금 작신 두들겨 맞아 전치 12주란 훈장을 달고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왜 그리 속이 시원했는지......
지송하구요. 다음 내용은 책 나오면 ^^*.......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