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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장의 추억
석장정도 떨어진 곳에 그의 부모님인 듯한 사람들이 보였다. 아버지로 보이는 듯한 남자는 머리에서 허연 뇌수를 뿌리며 널부러져 있었고 어머니로 짐작되는 여인은 옷이 모두 찢겨진 채 사지가 잘리어져 훌뿌려져 있었다.
“화(花)…화야…화야…”
조그만 입술이 벌어지면서 울먹이는 소년은 작은 손으로 그 보다 더 작은 체구를 지닌 여자아이의 시신을 붙잡고 울먹이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시신에는 목 윗부분이 없었기에…
“크…크흑…”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소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달빛에 비친 소년의 얼굴은 처참했다. 온유하고 부드럽던 소년의 인상은 오른뺨에 남겨진 긴 검상으로 인해 흉측하게 변해 버렸다. 주루륵 흐르는 핏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긴 머리가 땅에 흐트러져있는 한 개의 수급이 보였다.
“화야…오....오빠다.....연오빠야…화야…화!..”
안고 있던 차디찬 시신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섰다. 소년은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수급을 들어 올렸고 얼굴이 보이도록 돌렸다. 그리고는 석상처럼 굳어졌다. 소년의 손위에 조심스레 받혀 올려진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흰 얼굴 가죽만 씌어 있었다.
무정은 침상에 반쯤 걸쳐 앉아 있었다. 잘 발달된 구리빛 근육들은 숨 쉴 때 마다 꿈틀거리며 번들거렸다. 몸에 있는 수많은 상처들은 번들거리는 땀투성이의 몸에서 길게 반짝이며 한껏 그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휴우…”
긴 한숨과 함께 무정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른쪽 얼굴의 긴 흉터가 흐르는 땀에 더욱 더 깊게 파여 보였다.
“꿈이었나..이젠 그나마 꿈에서도 보이질 않는군…”
오랜만에 꿔보는 가족의 꿈이었다. 무정은 몸을 움직여 방을 나섰다. 목욕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촤아악”
시원한 물줄기가 오월의 아침햇살을 갈랐다. 무정은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은후 몇 번을 더 붓고는 우물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동안 오랜 시간이 흘렀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현촌에서 구출된 때가 그의 나이 여섯 살쯤…그리고 지금의 무정은 스물여섯이었다. 부모님
얼굴,,,동생얼굴도 이젠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의 복수…그런 것은 예전에 잊혀졌다. 처음 출정한 열네살 때만 해도 복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온몸에 피칠을 하고 돌아온 그날.. 그런 마음은 저기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복수라는 것은 핑계였다. 죄책감을 느낄 수 없도록 자신에게 말하는 핑계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 느꼈던 생각,,어쩌면 이렇게 전장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엄습했고, 이후에는 살기위해 무공에 집착하고 몸을 만들었다. 복수? 그런 것은 이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젠 그냥 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그냥 베어 넘길 뿐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오년전부터는 달라졌다. 이젠 핑계도 필요 없었다. 아무 죄책감도 없었다.
그냥 벨뿐이었다. 아니 가장 빠른 시간에 최소의 힘으로 효과적인 살인을 하는 것… 그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법은 구분 짓지 않았다. 군문의 특성상, 아군에게도 해가 될 수 있는 독만 빼고는 유엽도(柳葉刀)건 비표건,,심지어 길가의 돌맹이라도 상황만 된다면 무조건 사용했다.
허나 그런 것은 현재 그에게는 그리 필요가 없었다. 이젠 자신의 몸과 두팔의 묵빛 수갑, 다리의 각철과 스무정의 투환침. 그리고 유일한 자신의 친구, 7척의 초우만 있으면 충분했다. 무정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곳은 감숙성의 용현천호소였다. 낭인대의 대주가 된 그는 마대인의 직속부대로 배속이 되기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동안 군막에서 생활과는 달리 이곳은 장씨 세가를 징발해 사용하고 있었다.
장씨세가는 대대로 교역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휘지사사가 있는 섬서성으로 주무대를 옮긴 관계로 이곳을 비우게 되었는데 워낙 전선이 가까워 아무도 살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군에 헌납하고 군과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계획으로 천호서로써 내놓은 것이었다. 교역상을 하는 그의 직업상 상당히 좋은 포석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군막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활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마대인이 오년 전 그가 거의 죽다시피 하고 돌아왔을 때 무슨 심정인지 논어나 맹자들을 거의 강압적으로 읽으라고 하는 것이 괴로울 뿐이었다. 허지만 자꾸 그렇게 읽다보니 조금은 재미있어지는 듯한 무정이었다.
새벽 여명이 어느새 완전히 사라졌다. 처마및의 거미줄에 머금은 아롱한 이슬들이 점차 빛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잊을 수 없는 반백의 노무인이 서 있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정아”
“평안하셨습니까, 마대인”
반백의 머리를 정갈히 뒤로 넘긴 무인, 서글한 눈매에 회색수염이 제법 긴 이 인물은 이젠 육십을 바라보게 된 천호 마영성이었다. 약 열개의 백호소로 이루어진 천백여명의 군졸을 거느리는 무인이 바로 그였다. 마대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무정을 바라보았다. 새벽 댓바람에 물을 끼얹은 것을 보니 아마도 악몽을 꾸었으리라..그의 눈매에 측은함이 묻어났다.
“악몽을 꾼 게로구나..”
“…그렇습니다.”
“오늘 임무에는 지장이 없겠느냐?”
“염려 마십시오. 대인, 근심은 거두셔도 좋을 듯 합니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마영성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떡이며 뒤돌아섰다.
“조심하거라”
“… “
무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폈다. 저기 앞쪽에 마대인이 가고 있었다. 오년 전 무정이 거의 죽을 뻔 한 날부터 무정의 신상에 부쩍 신경써주는 그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고 신형을 돌려 자신의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카아악… 툇…제에미. 날도 더운데 이것들은 대체 어디 박혀 있는 거야”
“히힛,, 성님,,몸이 근질근질 함 갑네요?”
“니미 알면서 뭘 물어 이 자식아.”
“에이 상귀(上鬼)성, 대장이 언제 틀린 것 봤수 진득하니 기다려보쇼”
“에미널…잘났다 이 자식아!…”
더벅머리 두 사내가 지껄이는 대화에도 아랑곳없이 무정은 묵묵히 앞만 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형형색색의 인간들이 둘러쳐져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병기도 창, 검, 도. 단창. 쌍검에 궁까지.,….그야말로 다양한 무기들을 각자 꿰차고 있었다.
“츳츳….저것들도 무공 좀 한다고 예까지 왔으니….낭인대라 하기도 이젠 낮부끄러워서..에잉~……”
“카악…툇..어이 영감, 댁이나 잘하쇼, 그 나이에 잘못하면 뼈부러 지겠소”
“이노무 자슥이..넌 위아래도 없냐!”
“위 아래? 그건 기집질 할 때나 찾으쇼 영감, 아! 이런..이런.. 이젠 서지도 않겠구먼…어이 미안해~~ 영감?”
“이런 발칙한…”
딴 사람들은 신경도 안쓰는지 둘이서 킬킬 대던 더벅머리 청년들은 이번에는 까치집상투를 튼 노인과 입씨름 중이었다. 걸죽한 농이 왔다가고 노인의 손에서 시퍼런 단창(短倉)이 막 나올 때였다.
“조용..”
굵지만 나직한 목소리가 중인들의 머리를 울렸다. 무정이었다. 그는 지금 안력을 높이고 있었다. 이곳은 용현천호소에서도 오십리 이상 떨어진 곳이다. 오늘 낭인부대는 척후임무를 띄고 잠복 중이었다.
마대인은 며칠전 조금은 이상한 첩보를 접했다. 건주여진족 중 우량하(兀良哈)족의 진영에 방수(傍手)가 있어 보인다는 심상치 않은 정보이었다. 물론. 그동안 양측 다 수십 년 동안 싸워온 이력은 있다. 대대적인 전투는 몇 번 없었어도 상당한 규모의 전투는 매일이다시피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은 명군이었고 그 중심에는 무정을 필두로 한 낭인대가 있었다.
“반뇌(半腦), 비연(飛燕), 그리고 고죽(古竹)노인.”
이름을 불린 세 사람은 나란히 무정의 곁으로 움직였다. 반뇌 우세중(旴世重)은 이 낭인대에서도 책사의 위치에 있는 이십대 후반의 얼굴이 허연 청년이었다. 고죽노인은 염소수염을 한손으로 꼬며 주름살 깊은 얼굴에, 까치집 상투를 튼 머리를 하고 상귀(上鬼), 하귀(下鬼)와 투닥거리던 노인이었고, 비연이라 불리는 사람은 화수련(華壽蓮)으로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화산파(華山派)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으나 확인 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강호에서 뭘하고 들어왔는지 묻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저기 저 앞에 홍의를 입은자들이 보이나?”
묵직한 무정의 말에 세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진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 기마병인 듯 했다. 숫자는 약 삼십기(騎) 정도…..그중 약 십기 정도는 궁을 든 것으로 봐서 궁기병과 보기병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형태의 호위대형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붉은 천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보였다.
“음…저들은 서장(西藏) 뇌음사(雷音寺) 사람들 인 것 같군요..고죽노인 생각은 어떠십니까?”
“맞네. 저 검붉은 가사는 천축에서 흔히 쓰는 색깔이네. 라마라고 하던가? 다만 대뢰음사(大雷音寺)인지 소뇌음사(小雷音寺)인지 모르겠네”
반뇌와 고죽노인이 서로 대화하며 서로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때 비연이 말문을 열었다.
“소뇌음사예요”
“……확실한가?”
“그들의 목에 달린 하얀 것은 해골을 상징하는 염주일겁니다. 대뢰음사는 그래도 정(正)에 속하는 문파라고 알고 있습니다. 중원과 같은 묵빛 염주를 선호(先好)한다고 들었습니다.”
무정은 생각했다 어차피 척후임무이기에 사실을 확인한 지금 이대로 귀대하여도 무방했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근 이십년 이상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의 육감에 뭔가 다른 것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천축의 승려라니…..서장에서 신강(新疆)을 거쳐 몽고(蒙古)로 왔단 말인가?..그 먼 길을?... 무정의 결정이 내려졌다.
“매복한다. 제일목표는 궁기병, 광검(狂劍)과 패도(敗刀)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후 보기병을 친다. 라마들은 건들지 말도록.”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정은 잠시 광검과 패도를 봤다. 광검 남궁후(南宮珝) 그는 남궁세가(南宮世家)사람이다. 검술도 상당하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정도?..
단정히 묶는다고 자신은 주장하지만 거의 난발 수준이다. 때가 절은 무명옷은 이미 누렇게 변해 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3척이 조금 넘는 검을 쓰며 항상 귀찮아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패도 구서력(臼瑞力). 그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다.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덩어리인 그는 힘에 관해선 단연 최고였다. 키도 무정보다 주먹하나는 더 컸으며 그가 쓰는 도는 길이만 7척에 이르는 거도(巨刀)였다. 그들을 뒤로 돌리는 이유는 한 가지 였다. 광검은 일단 손을 쓰면 돌변하는데 적아의 구분이 없었다. 그리고 패도는 반경이 너무 커서 아군에게 해가 되었다. 대기조인 이들이 투입되는 것은 주로 적의 군영을 단독으로 휘젓거나 최후의 순간일 때일 것이었다.
무정은 말과 함께 신형을 돌렸다. 그와 같이 있는 사람들, 비록 여덟 명뿐이지만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 오년 전에 근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허나 오년후에 살아남은 자는 겨우 여덟명뿐이었다. 그만큼 실력을 인정하는 그들이기에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었다. 일행은 먼지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신속히 이동했다.
타마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땡볕이었다. 정말 말이 없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날씨 였다. 그는 옆의 마가난타를 보았다. 비록 꼿꼿히 서 있지만 고개가 조금씩 까닥이는 것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사제. 그런 자네는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먼.”
“하하하 견뎌 내야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붙이며 타마륵은 싱긋이 웃어보였다. 이런 날씨에는 무공도 별 소용없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두 분 존자님, 이제 저녁 무렵이면,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마라불(魔羅佛)님께서 두 분이 오시기를 학수고대 하실 겁니다.”
선두에 섰던 인솔자인 듯한 사람이 말의 속력을 늦추며 두 라마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산강을 넘어 장성을 넘어 들어올 때부터 호위하던 사람인데 꽤 붙임성이 있었다.
“하하 사부님께서 거기에 계시다니…한참 중원에 계신다고 찾지 말라 하실때는 언제고 서신 한 장 달랑 주시어 부르시….”
“사제! 조심하게!”
마기난타는 어렴풋이 주위에서 살기를 읽었다. 아니 느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뒤쪽의 궁기병이 쓰러지고 있었다.
“커헉…”
“악..”
정확하게 궁수만 떨어뜨리는 솜씨..마가난타는 전방을 노려보았다. 오십보 전방에서 땅에 호를 파고 그 위를 위장한 곳으로 보이는 곳에서 땅이 들썩이고 있었다. 한번 들썩일 때마다 화살이 날아왔다.
활은 상당히 빠른 속력으로 날아 왔다. 기갑병의 호심경도 소용이 없었다. 호심경을 뚫고 들어간 것으로 봐서 분명히 강전이었다. 그중 가장 위력이 강한 고려 강전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무기는 명군 외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명군의 매복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