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똥을 싸더라도 --
작년 춘마(춘천마라톤)에서 연습을 거의 않고 생체실험 하듯 달리고 나서 고질적인 햄스트링 부상을 치료하는 데 집중했다.
작년 11월부터 최근까지 병원에서 서른 번 가까이 침 맞고 물리치료 받았다.
아무튼 치료도 끈기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받아야 낫지, 어영부영 치료받아서는 잘 낫지를 않는다.
다리 부상은 대부분 허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허리부터 돌보지 않고 단순히 다리 부상 부위만 손을 보는 치료(그런 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치료받은 병원에서는 의사가 일단 허리부터 손을 본다. 허리에 얼마나 아프게 주사를 놓는지 너무 아파서 주사 맞을 때 악! 비명이 나온다.
그리고나서 다리 부상 부위에 침을 놓는데, 침도 엄청 아파서 다리를 동동 구르며 침을 맞는다. 이렇게 주사를 맞고 침을 맞고 나면 너무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긴 하지만,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아프게 치료받으면 그만큼 잘 나을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된다.
실제로 내가 다녀본 여러 병원 중에서 현재 내가 치료 받고 있는 병원에서의 치료가 확실히 효과를 보는 것 같다. 이제 부상은 거의 나은 것 같다.
작년 11월부터 월간 훈련량도 200km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전성기 때의 한 달 훈련량 300km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이 정도 훈련량만 되어도 마라톤 완주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런데 동마(동아마라톤)을 1주일 남기고 돌발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1주일 전 새벽에 마지막 도로훈련(16km)을 하는데, 10km 지나면서 갑자기 배가 고파지고 힘이 쭉 빠지면서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다가 가끔씩 이런 증상이 생긴다.
더 이상 달리면 위험하겠다 싶어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남은 거리가 6km는 되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걸으면서 땀이 식어가며 추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4km 정도를 걸어가는데 먼저 레이스를 끝낸 동료가 차를 몰고 와서 나를 태워주는데 눈물이 핑 돌 만큼 고맙다. 어떻게 눈치 채고 차 몰고 왔느냐고 물으니, 내가 레이스 대열에서 점점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뭔가 내가 이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계속 몸이 으시시 춥고 떨리더니 영락없이 다음 날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콧물이 심하게 나고 가래기침으로 괴롭다. 동아마라톤이라는 대사를 1주일 앞두고 컨디션을 망친 것이다.
나는 겨우 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내면서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 보면 ‘어떻게 하면 감기에 걸리나? 나는 (감기)걸리고 싶어도 안 걸리는데....’라고 속으로 으시댔었는데, 이렇게 오두방정 떨다가 나도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신속하게 이비인후과 가서 치료받고 약 먹어서 그나마 고생을 덜 했다.
서울 동아마라톤은 금년부터 10km 부문이 신설되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맘에 들지 않고 불만이다. 10km 부문을 신설해서 수지타산이 얼마나 더 좋아질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풀코스 단일 종목으로 유지되던 대회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 일일 것이다.
경쟁 대회라고 할 수 있는 춘마에서 몇 년 전부터 10km 종목을 신설했는데, 동마도 춘마 따라가는 것인가?
동마 당일 날씨는 최근 몇 년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다. 마치 2007년 이봉주 선수가 이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만큼이나 날씨가 화창했다.
‘오늘도 죽어라 달려보자.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잠실벌에 도착하겠지. 나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출발선을 떠난다.
마라톤은 보통의 경우 10km만 지나면 그날의 기록을 예상할 수 있다.
나의 10km 통과 기록이 1시간 3분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벼르던 서브4는 벌써 물 건너갔고 잘하면 430(4시간 30분 이내에 완주)은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래 430이나 하자. 내 주제에 서브4는 무슨...’라고 체념하고 달리니 맘은 편해진다.
14km 지점부터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들이 내뿜는 매연을 어느 정도는 마시면서 달려야 한다. 도심에서의 마라톤은 매연을 마셔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살다보면 항상 좋은 공기만 마실 수 있나. 가끔씩 이런 공기도 마실 때가 있고 또 황사도 마실 때가 있다. 요즘같은 봄철에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를 우리는 안 마실 수가 없는데, ‘그래도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실컷 마시다 남은 것만 마시니 다행이다’라고 생각을 하면 좀 위안이 될까?
오늘 레이스에서 나는 칠마회 어르신을 딱 한 분만 봤는데, 칠마회 어르신들이 많이 안 보여서 그분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 어르신들이 오늘 출전을 많이 안 하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못 본 것인지 아니면 이젠 그분들이 팔마회로 진급을 하신 것인지.....
15km 지점을 넘어가니 배고파 견딜 수가 없다. 먹을 것을 주는 20km 지점까지 달리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다. 천신만고 끝에 20km 지점에 도달하여 후다닥 바나나 두 개. 초코파이 두 개. 물 두 컵. 음료수 두 컵을 먹어치웠더니 살 것 같다.
35km 지점인 잠실대교에 이르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잠실스타디움의 지붕을 바라본다.
잠실대교에서 잠실스타디움까지 직선거리로는 겨우 1km밖에 안 될 것 같은데, 마라토너들은 빙글빙글 돌아서 7km를 달려가야 한다.
내가 잠실대교를 언제부터인가 우리 달림이들게는 ‘희망의 다리’라 명명했는데, 몇 시간 동안 고단한 레이스를 하는 달림이들이 잠실대교까지만 오면 멀리 오른쪽으로 잠실스타디움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완주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뜨기 시작하고 희망이 보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만의 감정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나 말고 다른 참가자들도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한다. 나는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까지는 이 ‘희망의 다리’인 잠실대교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건너가리라 다짐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쓴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있는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또한 마라톤 마니아이기도 하다. 마라톤을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시작하여 수십 년째 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 책 69 페이지에 실린 내용을 인용하겠다. 같은 마라토너로서 부럽다못해 배가 아플 지경이다.
---- 지금 생각해도 무엇보다 행운이었던 것은, 내가 건강한 몸을 타고났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사반세기에 걸쳐서 일상적으로 계속 달렸고, 수많은 레이스에도 출장했으나 다리가 아파서 뛸 수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트레칭 같은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부상 하나, 상처 하나 , 병 한 번 앓은 적이 없다. 뛰어난 러너는 전혀 아니지만 튼튼한 러너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주 작은 자질 중의 하나다. ----
마치 나같이 부상에 취약한 사람을 약올리는 말 같기도 하다.
계속해서 하루키의 이 책『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258 ~ 259 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 ~ 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저서『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하루키의 이 책『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하며 인용한 대목이기도 하다. 박완서 작가가 일본을 여행하다 우연히 책방에 들러 이 책을 접하고 하루키 작가가 마라톤 마니아라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3권의 저서들에서 마라톤을 언급했다. 80년대에 쓴『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최근에 쓴『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지만) 또 어느 책에서도 마라톤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하루키의 저서『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라토너들 사이에서는 거의 필독서 수준의 유명한 책이다.
그런데 마라톤을 자신의 3권의 저서에서 언급한 박완서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마라톤을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한 것 같다. 박완서 작가가 81세로 작고했는데, 만약 박완서 작가가 마라톤을 열심히 했더라면 적어도 90세까지는 충분히 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나 역시 하루키의 묘비명처럼 오늘 레이스에서 한 번도 걷지 않고 끝까지 힘차게 달려 잠실운동장에 들어섰는데, 그때까지 힘이 철철 넘쳐 흘렀다.
내가 나의 실력에 걸맞지 않게 너무 천천히 달려서 힘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 할 지경이 돼버렸다.
잠실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치 축구선수 차두리가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 선수들을 제쳐가며 드리볼 하듯, 인간탄환 우사인 볼트가 100 미터를 전력질주 하듯 나는 엄청난 스피드로 앞선 주자들을 모조리 제치고 골인하였다. 골인하고 나서도 힘이 넘쳐 10km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래봤자 오늘 나의 기록은 4시간 43분이다.
나는 삐진 얼굴로 신께 따졌다. “제가 새해 첫날에 서브4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게 뭡니까? 서브4는 고사하고 430도 못하고, 이게 뭐냐고요?”
그랬더니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네 은혜가 족한 줄 알지어다”
동마 다음 날 아침 피똥을 쌌다. 마라톤이 힘들긴 힘든 모양이다. 내가 마라톤 뛰고 피똥 싼 것도 처음이다. 나의 부친께서도 피똥을 싼 적이 있으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나의 부친과 모친께서 딸기를 재배한 적이 있다. 딸기 농사라는 것이, 지금은 많이 기계화가 되어서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의 부모님이 한창 일하던 40년 전에는 딸기 농사가 농사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쪼그려 앉아 일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힘든 일이라고 한다. 딸기밭에서 하루종일 힘들게 쪼그려 앉아 일하시던 부친께서 결국 피똥을 싸며 쓰러지는 바람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의 부친은 40대에, 나는 50대에 피똥을 쌌으니 피똥 싸는 것도 가족 내력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또 다시 피똥을 싸는 한이 있더라도 동마 다시 뛰고 싶다!
2015년 3월, 남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