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천수의 명품시조 찾아 읽기(16회)
꽃잎에 오는 봄과 꽃잎으로 가는 봄의 詩 / 채천수
복사꽃/윤금초
- 해어화解語話
대명천지 이른 봄날 살 풀리고 어녹이친다
갓나희 앳된 볼기를 하냥 그리 드러내놓고
오가는 길손 육허기나 꺼줄거나, 꺼줄거나.
켯속을 알 수 없는 여항閭港 어느 길목 가녘
복사꽃 지분 냄새 살색 또한 홍동지 같아
알샅을 까발린 말벌, 겁간하는 몸짓이다.
가무린 사추리 사이 고개든 복사꽃 보게.
젖은 꽃 입술에는 걸귀라도 척 앉았는지
고것 참! 이운 꽃자리, 젖멍울이 돌올하다.
- 《유심》 2013년 4월호
흔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지 않는가. 맛배기로 보면 아직 남은 추위를 탓하지만 봄이 왔다가 속절없이 가버린다는 변화무상감도 포함된 뜻이리라. 여기 복사꽃"이란 제목에 부제로 “해어화解語話"까지 붙어 있으니 꽃을 보고 느끼는 생의 욕정이 처음부터 “돌올하다.”
산기슭에 핀 현란한 복사꽃 수천 송이에서 "갓나희 앳된 볼기"를 떠올리는 것은 꽃잎의 색채 이미지가 여인의 투명한 살색 이미지를 동반하는 경우로 관능적인 은유를 쉬 짐작할 수 있다. 첫수 종장은 앞선 이런 분위기를 업고 비록 관조적인 청이지만 “오가는 길손 육허기나 꺼줄거나, 꺼줄거나."를 배치함으로써 “봄의 생명력은 곧 성적인 힘이다."는분위기를 창출한다.
꽃(여인)의 마음이나 “켯속을 알 수 없는 여항閭港"은 그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터. 그래도 시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것은 여성성을 극대화한 “복사꽃 지분 냄새다. 어떤 이성이나 판단도 단절하는 복사꽃의 속성에 다가가는 “알샅을 까발린 말벌. 겁간"이 오히려 잡혀가는 포로의 처지로 읽힌다.
여항에 떠도는 말들이지만 눈여겨 볼 시어들 또한 귀한 야생화처럼 얼마나 신선한가. 한 송이 한 송이를 추려보면 윤금초 시인의 개성과 문체에 바지랑대를 고누는 격이다. 예컨대 “육허기(지나친 남녀 간에 사랑), 켯속(일이 되어가는 속사정), 가무린(남이 보지 못하게 숨긴), 사추리(두 다리 사이)" 등은 다른 시인의 작품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시어라는 말이다.
그의 시가 밋밋한 함을 벗어남도 이런 까닭에 있고, 다감각의 자연스 런 표현에 있다.
봄 탓이로다 / 김덕남
- 신윤복의 그림 '손목'을 감상하다
으슥한 후원 안에 붉은 꽃 다퉈 핀다
허물어진 담장 위로 잡풀이 적적한데
저, 저런!
덥석 잡는 손, 수염 아직 없구나
꿈틀하며 놀란 괴석 게슴츠레 치켜 뜬 눈
사방관 쓴 사내의 은근한 조바심에
엉덩이 잔뜩 뒤로 빼는 짚신 속의 저 여인
향기 푼 낮달이 살짝 걷은 구름자락
까무룩 몸을 떠는 나비의 날갯짓에
농익은 꽃잎 하나가
토옥!
하고 떨어진다.
- 《스토리문학》 2013년 봄호
풍속화를 꼼꼼하게 본 눈썰미가 언어로 체화된 시다. 딴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시를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말이다.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에서 신윤복의 ‘내 손목을 쥐여이다'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기에 여항에 두루 알려진 작품이다.
초정 선생께서 백자를 완상하면서 붙인 시가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백자부白磁賦'가 아닌가. 시적 대상이 그 무엇이건 상관은 없다. 다만 그 시의 가치가 정말로 주어진 대상을 살리고 또 다른 예술적 성취로서 적실한가이다.
이 작품에 이런 논리를 적용했을 때 '신윤복의 그림보다 김덕남 시인의 글이 더 감동적이다.'라는 탄성이 독자로부터 나올 수 있다면 이 또한 명품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 가치의 우열을 가리기보다 시의 문면과 행간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처음 시가 생성되는 장소는 으슥한 후원 안에 붉은 꽃 다퉈"피는 곳. 그림을 못 본 상태라면 첫째 수장의 정황으로 보면 “저, 저런!" 누가 누구의 손을 덥석 잡는다고 한다. 손이 건너간 후, 둘째 수 종장에 오면 좀 더 구체적이다. “엉덩이 잔뜩 뒤로 빼는 짚신 속의 저 여인" 그렇다면 이 여인은 누구인가. 여자의 신분처지를 아는 데 필요한 것은 여자의 입성이다 “짚신”의 등장으로 보아 보잘것없는 양반가의 계집종이다.
여기 손목을 잡는 행위는 최후의 행위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성적 행위다. 절정으로 치닫는 봄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꿈틀하며 놀란 괴석”이나 "까무룩 몸을 떠는 나비의 날갯짓에 / 농익은 꽃잎 하나가/토옥!/하고 떨어진다"는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이루고 있는 욕망이라는 큰 축 하나를 건드리면서 끝을 맺는다.
오! “저, 저런!" 불행의 씨앗 보겠네!
채천수 1957년 대구 날뫼 출생.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달성고등학교, 대구교육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 업, 현재 대구문인협회 시조분과위원장, 대구 하빈초등학교 교장, <스토리문학> 편집위원. 대구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대구문학상 수상. 시조집 『상다리 세 발어 얹힌 저녁밥』, 『발품』, 『연탄불 연가』, 『통점』 등
- 《스토리문학》 201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