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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림 산시일대 김좌진 장군 관련 항일유적
김좌진과 석두하자
석두하자는 해림으로 가는 큰 길에서 2㎞정도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신민부 군정파(軍政派) 본부가 있었고, 신민부 지도자인 김혁(金赫) 등이 체포되었던 곳이므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신민부는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었다. 분열의 발단은 그해 2월에 일본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의 습격으로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인 김혁과 경리부 위원장인 유정근(兪政根), 본부 직원인 김윤희(金允熙), 박경순(朴敬淳), 한경춘(韓慶春), 남중희(南重熙), 이정화(李正和), 남극(南極) 등이 체포된 데서 시작되었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인 김좌진은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한 반면에 민사부위원장 최호는 우선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의 마찰로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로 각각 분열되어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고 각기 자신들의 조직이 신민부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석두하자역은 러시아식 역청사였으며, 그 주변에는 아직도 러시아식 공공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과거 중동선 시절에 러시아인들이 영향이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원성희시장의 안내로 신민부 본부가 있었으며, 1930년 김좌진 사망 시까지 김좌진의 동생인 김동진과 그의 모친이 살았던 러시아 식 집을 방문하였다. 그 집에는 4집이 살게 되어 있었으며, 1905년경에 지었다고 한다. 이집에서 현재까지 30년 가까이 동포 정정룡(鄭正龍, 1929년생)과 염씨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집 주소는 흑룡강성 상지시 아포력(亞布力) 임업국(林業局) 석두하자 경영소(經營所)라고 하였다.
그들은 김좌진의 딸 김강석의 양아버지 김기철(金基哲, 독립군)을 통해서 이 집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집이 생각보다 튼튼하고 좋아 보여 과연 이 집이 신민부 본부였던 건물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현재 석두하자 열차역은 패쇄되었으며, 화물차만 다니고 있었다. 중동철도에서 직선거리로 철길을 새로이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석두하자 뒤에는 깊은 산들이 이어졌고, 그 너머에는 과거 신민부 사관학교가 있던 고령자(高嶺子)가 있는데 산길을 통해 가면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신민부 사령부가 밀강에서 석두하자로 간 이유는 1926년부터 공산주의자들(화요회파)이 영안에 들어와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신민부가 본부를 처음에는 영안현 황기툰(黃旗屯)에 두었다가 흑룡궁(黑龍宮)으로, 1927년 4월에 석두하자에서 유수로 옮기고, 유수에서 다시 산시로 옮겼다고 한다.
ㄴ. 해림시, 한중우의공원
7월 11일 아침 일찍 해림역사를 찾았다. 이곳에는 새로이 신청사가 들어섰다. 구해림역사는 역전 파출소로 변하였는데, 이 역전 앞에서 김종진(金宗鎭)이 1931년 10월에 암살당하였다. 김종진(1901-1931)은 충남 홍성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7일 홍성의 시위군중을 지휘하다 구속되어 수개월동안 옥고를 격고 동년 6월에 미성년자라하여 석방되었다. 1920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형인 김연진(金淵鎭)과 연락하던 중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다가 홍경식(洪景植)이 체포되자 동년 가을 다시 북경으로 피신하였다. 북경에서 상해임시정부 범무총장 신규식(申圭植)을 찾아가 그의 소개로 운남성 군관학교교도대에 입대하였으며, 1925년 9월에 4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그 후 1927년 10월 북만으로 가서 족형(族兄)인 김좌진을 방문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으며, 김좌진의 위탁으로 신민부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동년 8월에는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조직부위원장 겸 농무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2월 10일에는 북만해림에서 이을규(李乙奎), 김야운(金野雲),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민립중학기성회(民立中學期成會)를 조직하였는데 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봄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대표회의에 북만대표로 참석하였다. 그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들이 1931년 7월 11일 중동선 해림역에서 그를 납치 살해하였다.
다음에는 신민부 신창학교가 있었던 해림시 조선족 실험소학교를 방문하였다. 이 학교에는 1927년 10월 현재 교장은 권중인(權重仁)이며, 학생수는 60명이었다. 이 학교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및 한족총연합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9년 7월 김종진과 이을규 등에 의하여 조직된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한 단체였다.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 평등한 모든 사람들이 상호부조적 자유 합작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무지배의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 즉 무정부주의 사회의 구현을 추구하고 있다.
해림시로 들어가면 한중우의공원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2002년 6월 15일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의 김을동의원이 국가보훈처의 지원과 사비로서 한중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2005년 10월 29일 완공한 것이다. 공원안은 백야관, 문화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야관에는 식당, 커피솝, 웨딩 드레스룸 등이 있어 공원의 유지 관리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문화관에서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를 통일적이고 민주적인 관점에서 전시한 내용들을 살펴볼 수 있다. 약 200평에 달하는 전시관은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을 다룬 국내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것이다.
필자는 황민호, 조규태 교수등과 함께 이 전시의 총 책임을 맡은바 있어 더욱 감회가 깊었다. 문화관 1층에는 숙박시설, 강의실, 컴퓨터실 등 연수시설이 이루어져 있어 국내에서 오는 학생과 교사들의 숙박과 독립운동 세미나들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명실 공히 북만주의 대표적인 민족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ㄹ. 해림에서 산시로
해림에서 산시진 방향으로 30㎞ 떨어진 곳에 대황구(大荒溝)가 있었다. 김좌진이 처음 수전을 개척한 곳으로, 현재는 옥수수 밭으로 변하였다. 무장투쟁론자인 김좌진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현재 이곳의 행정구역은 동농촌(東農村)부근이었다.
다음에는 김좌진의 묘소가 있던 곳을 답사하였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사망 후 그의 시신을 집 뒷편에 임시로 두었다가 100일 만에 사회장을 거행하였는데, 당시 1,000여명의 조문객이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 매장하여 김좌진 장군을 보필하던 팔노(八老)들이 보초를 세워 묘소를 보호하였으나 자경촌(현 신흥촌)으로 일본인 이민이 온 다는 소식이 있어 1934년 4월 21일 김좌진의 유해를 고향으로 반환하게 했다. 김좌진의 고향에서 본 부인인 오숙근여사가 오고 산시에서 옛 전우와 부하들이 의논을 거친 후 유해는 전용 짐차를 빌려 새로 입관한 후 기차에 싣고 하얼빈, 심양을 거쳐 반환했다. 이에 유골을 충남 홍성으로 옮겼다가 1954년에 충남 보령으로 이장하였다. 1945년 전후부터 묘가 있었던 곳에 김좌진의 딸 김강석이 다녀갔으며, 현재 조선족들이 청명과 8월 등에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묘소는 중동철로에서부터 약 7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그 사이에 동산시가 위치하고 있었다. 원성희씨는 이곳에 김좌진 및 북만지역에서 순국한 항일운동가들의 위령탑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ㄹ. 산시
다음에 우리일행은 산시로 향하여 산시역과 마을을 보고 신민부 독립군 사령부와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있던 곳을 가보았다. 연병장이 있던 곳도 모두 집이 들어서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다. 이곳에는 1927년부터 신민부 사령부가 있었으며, 1929년 8월부터는 한족총연합회 본부가 있었다고 한다. 주소는 임위가(林衛街) 19번지였다.
김좌진 장군의 구지(旧址, 산시진 돈암촌)는 1999년 11월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설치한 곳이다. 이곳에는 김좌진 장군의 흉상과 더불어 팔노회의실, 사망 장소인 금성(金星)정미소, 김좌진장군 거처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김좌진 장군 거처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김좌진장군 자택>
백야 김좌진장군은 서기 1927년 7월 903명의 독립군과 일천여명의 재향군인 및 가족들을 거느리고 이곳 산시에 이주한 후 서기 1928년 9월부터 이 자택에 살면서 홍진, 이청천, 황학수, 김종진씨 등과 당시 형세와 대일항일을 자주 논의하시면서 거주하셨던 곳이다.
서기 1930년 1월 24일 순국 전까지 이곳에 거주하셨다.
김좌진장군 자택 옆에는 팔노회의실이라는 건물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 건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김좌진장군 팔로회의실>
금성정미소 설치를 뒤이어 1928년 10월 장군은 자택 서쪽에 ‘팔로회의실’을 세웠다. 신민부와 그 뒤를 이은 ‘한족연합회’에서는 백야 김좌진장군을 보필해오던 8명의 원로들이 계셨는 바 그 분들로는 정해식(鄭海植), 이동호(李東鎬), 이달문(李達文), 김기석(金基石), 이덕수(李德洙), 장사학(張師學), 김기철(金基哲), 장기덕(張基德)씨였다. 이 회의실이 바로 그 분들이 김좌진장군을 모시고 자주 전략전술을 의논하셨던 장소이다.
금성정미소에서 특히 김좌진장군의 암살이 있어서 마음이 저려왔다. 새로 복원한 금성정미소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있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부근 농민에게 편의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자금난도 다소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지하에 자택 앞에 있는 동청철도의 창고를 빌려 이 정미소를 세웠다. 처음에는 연자방아를 사용하다가 서기 1928년 여름 하얼빈에 가서 봉천(심양)산 목탄 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했다. 서기 1930년 1월 24일 오전 9시경 이 정미소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하시었다
김좌진장군의 암살과 관련하여 그의 부인인 나혜국(羅惠國)은 1932년 3월호 삼천리에 실린 「남편 김좌진의 초혼-미망인 나혜국여사의 방문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기자: 돌아가실 때에 그 광경을 목격 하셨습니까?
나혜국: 보지 못했어요. 아침에 송월산씨(宋月山氏, 친구)와 함께 정미소(精米所, 우리가 경영하든)에 나가보신다고 나가시더니 오후 2시나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뛰어 나갔더니 벌써 세상을 떠나셨드랍니다.
기자: 정미소와 댁의 거리가 멀었든가요?
나혜국: 좀 멈니다. 그랫기 때문에 총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기자: 그래 그 현장에 송씨밖에 사람이 없었을까요?
나혜국: 않이요. 사람은 많았습니다. 정미소의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언제나 데리고 다니시는 보안대도 셋이나 데리고 나갔어도 무기를 가지고 안 나갔기 때문에 대항도 못했지요. 그리고 총을 쏠 때 뒤로 쏘았습니다. 왼쪽 등을 맞았는데, 탄환이 바른 쪽 가슴을 뚫고 나왔어요. 어떻게 강기(强氣)있는 양반이었든지 총을 맞으시구도 몇 거름 뛰어가서 「누가 나를 쏘느냐」고 소리를 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더랍니다.
구한말부터 1930년까지 국내, 만주, 노령 등에서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김좌진은 항일운동의 현장 흑룡강성 산시에서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좌진의 죽음이 이념의 장벽을 넘어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한족총연합회의 대종교적 민족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간의 분열 및 한족총연합회와 공산주의 세력간의 분열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당시 김좌진장군 장례위원회에서 1929년 음력 2월자로 낭독한 고김좌진동지의 약력에 따르면, 1929년 음력 12월 25일 오후 2시 중동선 산시 자택에서 고려공산당청년회 및 재중한총동맹원(在中韓總同盟員) 박상실(朴尙實, 金信俊)이 살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기관지 탈환(9호)에 실린 「산시사변의 진상」이란 글에는 주모자는 지난번 북경에서 김천기(金天支)와 함께 공산주의 간행물 혁명을 발행한 김봉환(金鳳煥, 일명 金一星)으로서 고려공산당 만주총국의 주요 간부라고 밝히고 있다. 그외에 이주홍(李周弘), 이철홍(李鐵洪), 김윤(金允) 등의 연루자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원래 그들의 계획은 김좌진을 암살해서 한족총연합회에 내분이 발생하였다고 선전하여 동회의 분열을 조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치인 박상실을 매수 이용한 결과 김좌진을 암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사실은 공범 이주홍의 취조 결과 나타났다고 한다. 즉 탈환에 따르면 김좌진을 암살한 행동대원은 박상실이지만 그 중심에는 김봉환과 이주홍 등의 사주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김봉환은 하얼빈 일본영사관측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일제는 북만주지역의 한인독립운동세력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화요회파의 김봉환을 사주하였고, 김봉환은 박상실을 하수인으로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일제는 화요회파를 이용하여 김좌진을 암살함으로써 화요파와 한족총연합회 사이를 이간시키고 아울러 한족총연합회의 무정부주의자와 대종교적 민족주의자의 연결고리인 김좌진을 암살함으로써 양파의 분열 또한 더욱 촉진시키는 이중효과를 올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이 공산주의세력과 한족총연합회 세력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계책에 화요파공산당이 넘어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 결과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후 한족총연합회와 고려공산당과의 알력이 점차 노골화되어 쌍방 소위 암살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여 상호 적극적인 행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중국관헌을 이용하여 반대파의 체포에 노력하였으며, 혹은 격문을 배포하여 반대파의 죄악을 선전해서 자파의 세력을 유지 확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1930년 7월 5일 한족총연합회에서는 시세의 추이에 의해서 청년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사상에 기울어지고 민족주의 세력의 기운이 점차 쇠퇴하자 국민부와 제휴하여 조선대독립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1930년 5월 하순 산시에서 창립위원회를 개최하고 7월 5일 부로 조선대독립당주비회의 이름으로써 격문을 배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좌진은 1910년 국망 이후부터 1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활동 할 때까지 시종일관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였다. 그의 무장투쟁노선은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현실화하는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독립군양성, 무기구입, 근거지 건설 등을 통하여 적절한 시기가 오면 무장투쟁을 전개하려는 독립전쟁론을 추구하였다.
김좌진은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대종교적 공화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1927년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열되면서 민심이 이반되자 무정부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 1929년에는 이를 수용 대종교적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민족성을 추구하면서 자유연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ㅁ. 고령자, 밀강촌, 신안진
다음에는 고령자로 향하였다. 1903년 중동철도공사가 끝나고 조선인들이 고령자참(高嶺子站)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이 이들을 현재 해림시 종마장(種馬場)이 있는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곳을 고령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산시(山市)에서 15㎞정도 북방으로 이동하니 과거 신민부 독립군 사관학교가 있던 고령자 중촌(中村)에 도착하였다. 말없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으며, 현재 산시 고령자 우마종장(牛馬種場) 2대와 3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체 주위 사방에 산(山)이 둘러져 있어 요새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1945년 후에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 사관학교가 있던 고령자 중촌(中村)에는 100여호,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에는 20戶 미만이 있었다고 한다.
고령자는 일명 고려촌이라고도 하며, 김좌진이 이 일대의 수전을 처음으로 개척하였다고 한다. 현재에는 수전은 남아있지 않고, 논둑 등만이 남아 있다. 산시 등에 살고 있는 한족들이 스스로 고령자에 설치할 표지석을 만들고 있다고 하니 감계 무량하였다. 최근 중국대사를 지낸 권병현씨가 산시를 다녀가 동포들 및 한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으며, 한․중 우호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에는 신민부의 근거지인 밀강촌(密江村)으로 향하였다. 밀강촌 부근에는 고구려토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200호 정도 살고 있는데 조선족이 95호이다. 한국에서 온 기업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초가집들이 많이 보였다. 신민부 본부가 있던 이곳 밀강에는 당시에는 4개 촌락이 있었으며, 가장 큰 곳이 20호였다고 한다.
다음에는 신안조선족진(新安朝鮮族鎭)을 답사하였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창립된 이후 1926년 9월 영안에서 신안진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 신안진의 위치는 해림과 산시 두 지점의 중간이며, 신안진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발전하자 일제는 신안진에 각종 관공서와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신안진 조선족진의 진정부는 현재 황지촌에 있다. 과거 북강촌(北江村), 부흥촌(復興村), 영락촌 등으로 불리웠던 이곳은 넓은 신안벌을 배경으로 한 곳이다. 해랑강(海浪江) 남쪽에는 조선공산당이, 강북(江北)에는 독립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현재 마을안에 있는 공소사(供銷社, 인민공사시절 상품유통처)에 길풍호(吉豊戶) 상점이 있었다고 하며, 이곳이 독립군의 연락거점이었다고 한다. 신안촌마을에서 산시로 돌아와 산시진 도남촌 차(車)서기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한국에서 특별히 손님이 왔다고 하여 여름철 건강에 좋다는 음식물을 대접받았다.
6. 영안 대종교총본사, 김소래유적지
ㄱ. 영안
7월 12일 아침 일찍 해림을 출발하여 영안으로 향하였다. 영안에서는 신민부가 조직되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 7월에 길림에서 개최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一會議籌備會)의 결과 남만주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인 정의부가 성립되었다. 이에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하여 1925년 1월 목릉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한 결과 동년 3월 10일에 영안현 영안성(寧安縣 寧安城) 내에 신민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다음에는 영안 남관(南關)으로 향하였다. 대종교는 1922년 4월 대종교총본사를 영안현 남관으로 이전하여 각처에 시교당을 설치하였다. 교주인 김교헌(金敎獻)은 1922~1923년 동안 48개처의 시교당을 설립하고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목단강에 단일시교당(丹一施敎堂), 밀산에 숙일시교당(肅一施敎堂), 철령하에 하일시교당(河一施敎堂), 해림에 장일시교당(帳一施敎堂 )등을 들 수 있다.
남관의 위치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정확한 본사자리는 확인할 수 없었다.
ㄴ. 영산촌
남관에서 우리 일행은 과거 소래 김중건(笑來 金中建)선생이 활동하던 팔도하자(八道河子, 현재 紅旗林場)로 향하였다. 이곳은 동경성(東京城)으로 가는 길에서 좌측으로 들어가 영산촌(英山村)을 지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 산악지대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영산촌의 노인정에 들러 김소래 유적지에 대하여 자문을 받았다. 그들은 영산촌은 1942년도에 설립되었으며, 집단부락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인 30호가 살고 있었는데 만주사변 후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만주국시절 마장(馬場, 말을 키우는 곳)이었던 이곳은 해방후 항일운동가 박영산의 이름을 따서 영산촌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결전(중국 조선민족발자취 총서 4, 민족출판사, 1991)에 실려 있는 석청송이 쓴 「영산촌」에 다음과 같이 그 유래를 적고 있다.
영안현 석두향에는 영산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원래 이 마을을 마장촌이라고 불렀다. 해방후 이 마을 주민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영안현 인민정부는 이 마을을 영산촌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마을을 영산촌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마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박영산 열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박영산은 항일연군 제5군의 지하공작원이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위원 2명(한족 조동무와 조선족 이동무)을 거느리고 영안현 경박호 일대에서 정찰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시 방신구촌에 살고 있는 이필이라는 농민의 집에 거처하면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겨울 박영산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마침 이 시기에 일본제국주의는 항일연군과 인민대중과의 연계를 끊어 버리고 보다 많은 일본 이주민을 받아들여 저들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원래 항일연군과 관계가 밀접하던 당지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박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경박일대의 방신구(지금의 경풍), 남호두, 만구, 학원 등지의 조선족 농민들은 마창(지금의 영산촌)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필 동무도 그때 함께 이사를 하였다.
1942년 초 여름에 박영산은 다시 조직의 지시를 받고 경박일대에 돌아 왔다. 그는 조선족농민드링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마창으로 이주했다는 속식을 듣고 이필을 찾아 마창으로 왔다.(중략)
마창으로 온 박영산은 석두-와용구간 의 일본군 탱크부대의 군사시설을 탐지하여 사진을 찍고, 석두의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와룡 경찰서와 백성들에 대한 일본군 만행 등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4년 7월 석두헌병대와 와룡경찰서에 체포되어 1945년 8월초까지 영안 감옥에 투옥되었다. 소련 군대와 동북항일연군이 일본관동군을 무찌르며 영안으로 들이 닥치자 일본인들은 도망치기 전날 감옥에서 박영산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ㄷ. 김소래의 홍기림장
영산촌에서 홍기림장까지는 40여리였다. 홍기림장은 1952~3년에 생겼으며, 소래 선생이 사망한 후 홍기림장에 살던 그의 제자들은 모두 영안 등지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영산촌 거주 남청룡(南靑龍, 1928년생)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홍기림장으로 향하였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1시간 가까이 가니 홍기림장이 나왔다. 입구 근처에 동경성 임업국이라는 간판이 있는 곳으로 조금 가니 개울이 나오고, 개울을 건너 옥수수 밭을 지나니 산비탈이 나왔다. 이곳이 바로 소래 선생이 살던 집터였다. 소래선생과 그의 제자들은 뒷산에 올라가 체조도 하고, 멀리 입구까지 보이는 산에 올라가 일본군이나 밀정이 오는가를 살폈다고 한다. 아울러 매일 뒷산에 올라가 돌을 하나씩 갖고 내려와 마당에 쌓아두어 돌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소래 김중건은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20여년간 원종(元宗)을 선포하고 종교를 통한 이상국가건설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특히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소래 선생은 1928년 원종의 근거지를 북간도에서 북만으로 옮기고, 노야령 북록 팔도하자에 황무지를 개척하여 어복촌(魚腹村)을 세웠다. 이 마을은 농사를 하면서 사상을 학습하는 주의촌(主義村)이었다. 소래의 「농촌주의 구체안」에 의하여 공작분유제도(公作分有制度)로 농사를 실시하였다. 농사를 포함한 모든 노동은 동대(動隊)를 편성하여 공동으로 수행하고, 분배는 배급카드 제도를 실시하였다. 공동체 안에는 청년단, 소년단, 장년단, 부녀단 등이 있어 함께 교육을 받고 군사훈련에 임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소래는 한국독립군을 위해 군비와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다. 병력도 50여명이나 파견하였던 것이다.
한국독립군 부대에 파견된 군대는 길림구국군 왕덕림(王德林)부대와 손을 잡고 동녕현성(東寧縣城)전투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구국군이 일제에 밀려 중소국경으로 퇴각하자 소래부대는 노흑산(老黑山)으로 철수하였다.
소래는 공산주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살해되었고 어복촌은 불탔으며, 농우(儂友)들은 강제 해산되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으로 독립운동 전선에서 일생을 보냈던 소래는 1933년 3월 24일 민생단원으로 지목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서굉일, 「소래 김중건과 항일민족운동」, 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3, 순국선열 소래김중건선생기념사업회, 2000, 86-87면)
7. 발해진을 찾아서
ㄱ. 대종교유적과 한국독립군의 동경성전투
동경현성역를 지나 발해진(渤海鎭)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발해 농장 사무소가 있던 곳으로 향하였다. 발해농장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한인농장이다. 안희제는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33년에 동경성에 정착하여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대종교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백산은 1942년 일제의 대종교말살정책인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투옥되어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석방된지 3시간 반만에 동경성 영제병원에서 서거하였다. 안희제의 거처이며, 발해농장 사무실이었던 자리가 지금도 절반 가량 남아있다.
다음에 영안시 조선족 사업촉진회 건물 골목에 위치하고 있는 상경로 동일가도 7호의 대종교총본사와 3․1학교 위치를 확인하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받드는 대표적인 항일종교였다. 대종교총본사는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璧鎭)에서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그 본사를 이전하였다. 총본사에서는 동경성을 중심으로 왕성한 포교활동과 더불어 3․1학원을 세우고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대종학원을 포함한 천진전 건물을 발해궁전 옛터 앞에 지으려 하던 중 임오교변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3․1학교의 원장은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이 담당하였다. 이 학교는 그 후 일제의 요구로 명칭을 3․1학원에서 1936년에 대종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대종학원에는 초등부, 중등부, 여자야간부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과내용에서는 정규학교과정 외에 특별히 한국사와 대종교의 경전과목이 중시되었다. 대종학원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초등부는 1941년 봄에, 중등부와 여자 야간부는 1942년 봄에 폐교되고 말았다.
다음에 천진전, 대종교 총본사 등을 설치하고자 했던 발해성 앞과 동경현성 전투가 있던 발해성을 답사하였다. 1933년 6월 7일 한․중연합군은 3개 방향에서 동경성을 공격하였는데 당일 저녁 공격을 개시하여 3시간가량 격전을 치른 끝에 서문 공격을 담당한 한국독립군이 먼저 성문을 격파하고 성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적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북문으로 도주하였으나 복병에 의해 거의 전멸되었으며, 만주국 여장(旅長) 마도재(馬道才)는 부하 수명을 데리고 겨우 도망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항복하였다.
한․중 연합군은 동경성에 입성하여 주민을 위무하는 한편, 전장을 정리하였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특히 다량의 식량은 연합군의 활동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은 영안현성을 점령하지 못할 경우 동경성을 계속 수비하기가 어렵고 후속 보급이 곤란한데다가 적의 대부대가 역습을 감행해 올 것이 확실시됨으로 동경성에서 철수하여 왕청(汪淸)과 동녕현(東寧縣) 사이의 산림지대로 이동하였다.
동경성전투가 전개되었던 발해성 앞에는 전투 시 사망한 일본군을 추도하기 위해서 만든 충혼탑이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 경 주원래의 지시로 없앴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전투를 기억하게 한다.
이어서 발해의 유물 석등이 있는 흥륭사(興隆寺)를 보고 그 안에 있는 간략한 발해 유물을 전시해 놓은 것들을 보았다. 흥륭사를 보고 난 후 우리 일행은 발해농장의 보(堡)가 있던 아보 수력발전소로 향하였다. 조그마한 발전소였다. 목단강물로 보로 만들었는데 현재의 것은 예전의 것을 크게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넓은 발해 농장의 수전과 둑(보)를 보니 백산 안희제의 큰 뜻을 보는 듯 하였다. 저녁에 목단강에 있는 평양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북한 접대원들이 ‘반갑습니다’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 주었다. 세삼 변화하는 남북관계를 느끼는 듯하였다.
ㄴ. 발해진과 목단강
2003년 9월 20일 오전 8시 30분에 경박호호텔을 떠나 경박호 입구에 있는 폭포를 관람하고 발해진으로 향하였다. 발해진으로 가는 길에는 넒은 평원이 펼쳐저 있었다. 이런 대평원을 배경으로 발해가 단기간에 융성해졌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발해진에 도착하여 상경용천부로 향하였다. 성벽입구의 비석에는 “발해국 상경용천부유지”라고 적혀 있었다. 발해의 성벽을 바라보는 감회는 남달랐다. 그러나 발해의 성벽은 예전에 본 것과 달리 시멘트로 돌 사이를 발라나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성벽 앞에는 성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의 흔적이 역역하였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하였다. 궁궐지에는 주춧돌들이 남아 역사를 회상케 하였다. 궁궐 뒤에도 새롭게 조성하는 궁궐터의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성벽 밖으로 나오니 과거 일본군 충혼비가 있던 곳에 그 돌을 사용하여 “발해국 상경용천부유지”라고 써 있었다. 유지 앞 넒은 벌판에는 벼의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잃어버린 역사, 발해의 유적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발해진을 떠나 영안을 거쳐 목단강시에 도착하였다. 시내는 무척 커 보였고, 비행장도 있었다. 김동수(중국 흑룡강성 당교위 교수)는 중국에서는 해방 후 목단강에 처음으로 비행대대를 만들었다는 점과 이 지역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목단강 다리를 지나니 <팔녀투강기념비>가 나타났다. 목단강가에 있는 공원에 위치한 이 기념비는 그 규모가 대단하였다. 목단강에서 순국한 8여자는 1938년 주보중 장군이 이끄는 제2로군 소속이었다. 우수훈강과 목단강이 교차하는 현재 지점으로부터 170km떨어진 곳에서 8명의 여성이 일제의 공격을 받아 희생당하였다고 한다. 8명 가운데 2명은 조선인이며, 이름은 안순복, 이봉선이라고 한다. 안순복은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 부녀단 소속이며, 피복창창장으로 일하였다. 이봉선은 동북항일연군 제5군 1사 부녀단 전사였다. 이들은 조선인임을 상징하기 위하여 조선식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8여인의 순국은 1948년에 영화로 제작되어 중국 전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1984년에 있었던 8녀투강비 준공식에는 주덕 사령관의 부인이 직접 참석하였다고 김동수는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8. 목릉가는 길
ㄱ. 액하감옥
7월 13일 해림을 떠나 목단강시의 목단강 다리를 지나니 철령하(鐵嶺河)가 나왔다. 이곳에 과거 임오교변시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던 액하 감옥이 있었다. 1942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식민지 내부의 항일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11월 19일 북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정(李楨), 안희제 등 대종교 간부들을 검거하였다. 일제는 영안현 경무과에 특별취조본부를 설치하고 고문과 악형을 행하였다. 제1차 심문후에는 목단강성 경무과에서 2차로 3개월간 심문하였다.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악형 때문에 결국 21명 중 10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8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망자는 안희제, 강이구(姜銕求), 김서종(金書鍾), 나정연(羅正練), 나정문(羅正紋), 이정(李禎), 권상익(權相益), 오근태(吳根泰), 이재유(李在圃), 이창언(李昌彦) 등이다.
현재 액하감옥은 목단강 다리를 지나 1㎞지점인 철령하 환성로(環城路)에 위치하고 있다. 액하감옥은 1960년대에 없어지고 군인가족들이 사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곳 액하는 대한국민의회 산하의 김하석(金夏錫) 등이 러시아 백위군인 호르바트군의 지원을 받아 편성된 한인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 김하석이 조선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백위대 장군 호르바트의 약속에 호응하여 사관양성과 군사기술 습득이란 명분을 내세워 한인 장정들을 모집하여 600여명의 한인들이 모였다. 그러나 1919년 중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모든 한인들은 흩어졌다.
ㄴ. 마도석, 마교하
밀산으로 가는 길에 우선 신민부 김혁의 근거지였던 마도석(磨刀石)을 지났다. 김혁(1875-1939)은 경기도 용인사람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로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맞게 되었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2년 8월 30일 통의부의 군사부감으로 선출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사령장 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 자유시참변을 격은 후 1924년 초에 북만으로 돌아와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고 참모로 활동하였다. 1925년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또한 신민부에서 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중동선 석두하자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9년 6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큰 길에서 1㎞ 떨어진 마도석에는 산 밑에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큰 마을이 있었다.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으로 꺽어지는 위치에 마교하(馬橋河)가 위치하고 있었다. 1922년 8월 김좌진과 이범윤은 북로군정서, 신민단 등 여러 세력을 결집하여 이곳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정비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에서 한인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 관헌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으며, 그 후 주요 간부들이 영안현 영고탑(寧古塔)으로 모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주요 간부는 김좌진, 김규식, 박두희, 신희경(申希慶), 이범석(李範錫), 이범윤 등이었다. 마을 입구에 강이 흐르고, 다리가 있으며, 마교하에서 팔면통까지는 28㎞였다.
9. 목릉 팔면통, 밀산
ㄱ.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 팔면통
현재 목릉현 소재지인 팔면통은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으므로 옛날부터 중요지점이였다. 특히 중동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며, 러시아 군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모여 활동하였다. 안중근 가족과 안정근(安定根), 안공근(安恭根) 형제, 이갑(李甲) 등이 대표적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포살하자 통감부에서는 즉시 진남포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을 연행하여 진남포경찰서에서 취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혐의로 1달여만에 풀려났다. 석방된 뒤 이들 형제는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형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귀국 후 안정근과 안공근은 1910년 봄 원산을 거쳐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의거 직전에 안중근의 가족들은 러시아로 이주하였는데 일제의 간섭으로 러시아에서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일제의 추적을 피하여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결국 안청호의 도움으로 1911년 4월 목릉에 정착하게 되어 살게 되었다.
안중근의 가족과 형제들이 목릉에 살던 시절의 상황에 대하여 추정 이갑의 딸 이정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물린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 높은 산이 하나 있고, 물린 강이 소리없이 흐른다. 그 강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안정근씨 댁이 있었다. 거기는 물린에서도 다소 외딴 곳이었다. 이갑은 안정근 집에서 1년. 새로 이사한 집에서 1년 동안 살았다. 이갑의 집에는 이강, 유동열, 이동휘, 이광수 등이 내방하였다. 이제 우리는 물린강에서 좀더 떨어진 곳에 집을 한 채 얻어 이사하게 되었다. 안정근씨 댁에서 불과 5분 거리정도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조용하였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로 올려 쌓고 지붕을 만들어 지은 집이었다. 이런 건물은 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었다. 집안에는 뻬체카를 설치해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이정희, 아버님 추정 이갑, 인물연구소, 1981, 216-217면)
목릉 팔면통은 1925년에는 신민부를 조직하기 위한 부여족 통일회의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즉,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세력들은 1925년에 접어들면서 길림성(현재는 흑룡강성)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독립군단의 통합과 항일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결과 동년 3월 15일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혁, 조성환(曹成煥), 정신(鄭 信), 김좌진, 남성극(南成極), 최호, 박두희, 유현(劉賢) 등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우선 팔면통역으로 향하였다. 역에는 신청사가 들어서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다. 구역(旧驛)은 화장실로 변하였으며, 그 근처에 옛날 러시아식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과거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었다.
기차역에서 2㎞ 떨어진 지점에 강이 있고, 산 밑에 집들이 있었다. 이갑 선생이 살았다는 통나무집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목릉의 공안국 자리는 주인만 바뀐 채 지금도 공안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ㄴ. 독립운동의 근거지 밀산으로
우리 일행은 분지인 아담한 도시 팔면통을 뒤로하고 석탄의 산지인 계서(鷄西)을 지나 계동현(鷄東縣)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계동 조선족 중학교에 연변대 유병호 교수의 친구가 교장선생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문화혁명 당시 학업에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늦게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계동조선족 학교는 학생수가 500~600명이며, 특히 계림(鷄林) 조선족향의 경우 한족이 1명도 살지 않는 조선인 마을이라고 한다. 조선족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밀산 당벽진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밀산시를 통과하면 길이 멀기 때문에 밀산시를 못미처 당벽진으로 향하였다. 당벽진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러시아에서 밀수되는 아편 등을 조사하였다.
당벽진 해관(海關)을 보고, 이어서 당벽진 옆에 있는 흥개호(興凱湖)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물은 깨끗하지 않았으나 바다 같은 호수였다. 겨울에 이 호수를 건너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당벽진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흥개호에서 조금 올라가니 당벽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출병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이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洪範圖)와 김좌진,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이청천 등이었다. 대한독립군단에 속하는 독립군은 3,500명으로써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곳에 있던 조선인 마을은 1934년경 일본인들이 국경수비 관계로 철수시키고, 개척단을 투입하였다고 한다. 현재에는 유원지로서 이용되고 있었다.
당벽진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평원 뒤에는 산들이 있었다. 이 산들 어디에선가 북로군정서 총재인 서일이 자결하였던 것이다. 1921년 8월 26일 서일은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으로 독립군 병사들이 다수 희생되는 사건이 있자, 이에 책임을 통감한 그는 동년 8월 27일 아침 마을 뒷산에서 자결하였다.
당벽진에는 한때 대종교 총본사가 있었다. 1928년 1월 영안현 해림참(海林站)에서 대종교 제6회 교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때 포교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당분간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이동하여 교리, 내부 행정 등을 정비하는 시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러나 현재 대종교총본사가 어디 위치하고 있었는지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백포자로 향하였다. 과거 대한독립군단이 있던 백포자는 백포자향 백포자 5대였다. 과거에는 이곳에 늪이 있었다고 한다. 백포자에서는 백포자 인민정부 북쪽에 봉밀산이 멀리 보였다. 바로 이곳 봉밀산에 무관학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처 한흥동(韓興洞)에 독립운동 기지가 있었던 것이다. 즉, 한흥동은 1909년 여름부터 항카호 북쪽의 중국령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인들을 집단이주 시켜 만든 마을이다. 특히 이승희(李承熙)는 봉밀산 아래 45만평의 토지를 사들여 한흥동 마을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한인자제 교육을 위해 한민학교를 설치하였다.
밀산을 거쳐 계서시에서 숙박하였다. 역전 근처에서 한국 식사를 하고 Hotel을 잡는데 애로가 많았다.
10. 수분하시, 동녕현 삼차구
ㄱ.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무역도시 수분하
7월 14일 오전 8시 계서를 출발하여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인 수분하시에 도착하였다. 도시 입구부터 러시아의 냄새가 무척 나는 듯하였다. 간판에는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해관에 가보니 러시아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상점 등에서도 러시아 제품 등을 주로 판매하였다. 수분하 해관, 역전 등을 살펴보고 다음 목적지인 동녕현 삼차구(三岔口)로 향하였다.
동녕현까지는 수분하에서 44㎞였으며 계속 산들이 이어졌다. 동녕현에 도착하니 산들이 끊어지고 평지가 이어졌다. 러시아쪽 역시 평지였다. 동녕현성에는 동녕하(東寧河)가 흐르고 있었다. 동녕현성에서 동녕현성 전투가 있었던 삼차구까지는 11㎞였으며, 도중에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삼차구는 92․ 93년도에 러시아로 많은 한인들이 장사하러 다니면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버스로 러시아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짐도 많이 갖고 나가지 못하고, 심사도 엄격하여 해관의 기능이 많이 저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로 수분하 해관이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수분하는 기차로 러시아로 이동할 수 있으므로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차구에는 과거에는 러시아식 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s. 북만주 최초의 한인마을 고안촌
2003년 9월 21일 7시 30경 아침 식사를 한 후 8시 30분경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일본인이 파놓은 국경요새로 향하였다. 동녕현 건강가를 출발하여 암관가를 지나 삼차구, 고안촌을 지나니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 앞으로 콘크리트 목침들이 보였다. 그 너머가 바로 러시아땅이다. 고안촌은 북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이 최초로 조성한 마을로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이다. 마을 주변에는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현재 이 마을은 순수한 조선인 마을로 한족은 없고, 조선인만 200호가 모여 산다고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영한(1933년생)은 말하였다.
이씨는 강 건너는 러시아의 복다쓰게 마을이라고 알려주었으며, 본인은 경상도 출신으로 요녕성 단동시 봉황성에 살다가 1954년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고안촌에는 함경도인이 대부분 거주자라고 하였다. 마을의 집들은 빨간 벽돌집으로 바둑판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를 통하여 이 마을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들이 의도적으로 재배치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고안촌 판공실이 보였고, 이곳이 고안촌임을 증명해주고 있어 더욱 기쁜 마음이었다.
e. 훈산(勛山)일본군 요새와 동녕현성 전투지점을 찾아서
2003년 9월 21일 고안촌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니 훈산요새가 나타났다. 이 요새는 일본군이 소련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든 군사근거지이다. 중소 국경지대에는 이런 요새들이 10여 곳 더 있다고 한다. 1930년대 일본과 소련의 군사적 대치상황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승홍산(勝洪山)요새는 1934년 봄에 건축하여 193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면적 7만 7천 평방미터, 지하 6천미터 정도이다. 훈산요새는 현재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애국 및 국방교육기지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훈산요새의 입구는 평지에서 100미터 정도 올라가니 나타났다. 입구를 지나 갱도로 들어가니 군관침실, 지휘소 등 다양한 건축물이 나타났다. 지하 방카 안에는 사진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 주목되는 것은 1940년대 김일성 주석과 중국군 채세영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우리일행은 훈산요새지를 뒤로 하고 동녕현성 전투가 전개되었던 삼차구로 향하였다. 전투에 대한설명과 위치비정과 관련하여 한국측과 중국, 북한측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이 지점은 더욱 주목되었다.
한국측에서는 동녕현성전투에 대하여,
1933년 9월 한국독립군이 만주에서 승리를 쟁취한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동녕현성은 1930년대 초 왕덕림(王德林)이 이끄는 구국군의 중요한 활동 중심지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전까지만 해도 한인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지역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정치 군사적인 측면에서 만주국이나 일제, 그리고 유격대 모두에게 요충지였다. 때문에 당시 동녕현성에는 일본군 및 만주군을 합쳐 약 2,000여명의 병력과 함께 장갑차와 같은 현대화된 무기들도 집결해 있었다. 역설적으로 군수물자가 풍부하게 있던 동녕현성은 여러 정치 성향의 항일무장부대로부터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곳이기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후 1933년 9월 6일 한국독립군 이청천은 오의성(吳義成)의 중국구국군과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동녕은 일제의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이 전투는 2일간 계속되었고, 일제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한중연합부대의 손실도 컸다.
라고 하여 한국독립군이 만주에서 승리를 쟁취한 마지막 전투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북측에서는 <역사사전>에서,
1933년 9월 김일성주석의 총 지휘 밑에 항일유격대가 반일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에 진격했다는 전투. 김일성주석이 1933년 6월 위험을 무릅쓰고 반일부대사령부와 담판을 진행하여 중국공산당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을 성과적으로 실현한 후,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들과의 연합작전의 공격대상으로 동녕현성을 정하고 이를 공격하여 일본군 약 2백명과 위만군 3백여명을 살상하였고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는 「김일성주석이 제시한 반제공동전선노선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널리 시위하였으며 일제와의 투쟁에서 심히 동요하던 반일부대들을 고무추동하고를 깨뜨려버리고 조중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더욱 굳게 안겨주었다」고 하고 있다(<력사사전Ⅰ>, 1971, 538~540쪽).
라고 하여 김일성 주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동녕현성 전투가 있던 지점으로 향하였다. 김일성주석은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3)(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99-200면)에서 당시의 전투지점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동녕현성전투는 1933년 9월 6일 밤에 시작되어 9월 7일 낮에 끝났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하면서 한 전투를 이틀씩이나 끈 실례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동녕현성을 치는데서 우리가 력점을 찍은 주공방향은 서문밖의 릉선에 2층으로 축성되어 있는 서산포대였다. 이 포대에는 여러 정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포대와 일제 침략군 부대 본부사이에는 깊은 교통호와 지하비밀통로가 굴설되어 있어 필요하다면 예비대가 계속적으로 투입되어 공격을 견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구국군이 언제인가 동녕현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도 이 서산 포대 때문이었다.
필자는 2000년 여름 답사에서 동녕현성 전투가 있었던 동녕현성 서문은 삼차구 입구 도로에 있었으며, 서포대는 그 바로 언덕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북측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답사에서도 그렇게 규정하였다.
그런데 2003년에 필자와 남북, 중국측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진 답사에서는 기존의 포대는 중소분쟁당시 건설한 포대이며 일본군 포대가 아님이 밝혀졌다. 이번에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김우종와 북측의 이철 등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삼차구인민위원회, 당사자료실 등의 간부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이 진주해 있던 서문포대는 1945년 소련군이 진군했을 때 1차로 폭파시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벽이 일부가 남아 있었으며, 포대에는 기관총 사격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59년에 북측 조사단이 김우종과 함께 조사했을 때에도 벽의 일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장은 서문이 있던 곳에서 남방으로 100미터 지점이며, 현재에는 옥수수 밭 밑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에도 시멘트와 돌자국이 남아 있어 포대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었다. 그러나 동녕현성 전투에 참여한 중국측 부대 인원, 김일성 등 유격대원수, 이청천 등 한국독립군의 수 , 일본군 수비대 수 등 전투에 대한 내용과 관련하여 나라마다 이견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공동답사와 공동연구를 통하여 역사의 진실이 보다 밝혀지길 기대해본다.
ㄷ. 노흑산을 지나 연길로
고안촌 답사를 마치고 연길(延吉)로 향하였다. 우선 산길을 따라 노흑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우수리스크 등지를 통하여 동녕 → 노흑산 →나자구(羅子溝)로 통하는 한인 무기구입로였다. 이곳 노흑산은 깊은 산골에 있는 마을이었다. 노흑산을 지나 점차 산 길을 접어들어 왕청 나자구로 향하였다. 왕청까지는 153㎞의 72고개 산길이었다. 말이 72개 고개이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72개를 지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나자구를 거쳐 동녕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토비들의 습격을 많이 당하였다고 한다. 72개를 지나니 넓은 평야가 전개되었다. 바로 나자구였다. 첫 번째 마을이 태평구(太平溝)였다. 이곳은 바로 이동휘(李東輝) 등이 나자구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던 뜻 깊은 마을이었다.
시간 관계로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나자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연길로 향하였다. 폭우가 내리고 번개, 천둥이 쳤다. 길가에 나무가 쓰러져 이를 치우며 연길로 향하였다. 어둠 속에 계속되는 산속의 비포장 길에서의 폭우는 바로 ‘사투’ 그 자체였다. 새벽 1시경 간신히 연길 백산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원대학교 박환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