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파사이사금의 재위년수는 33년입니다.
남당유고집중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재위년수도 33년으로 두 사서의 재위년수는 서로 같습니다.
그런데, 가령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4년(AD93년) 기사는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17년(AD142년) 기사로 되어 있어,
두 사서는 재위년수 표시와 기년 편차가 각각 3년 편차와 49년 편차가 납니다.
*17년- 14년= 3년 편차. AD142년- AD93년= 49년 편차.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느냐면..
탈해이사금은 파사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나서 5년 있다가,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탈해는 파사 5년에 사망한 것이란 뜻입니다.
이 5년이란 편차의 여파가 계속해서 밑의 기사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재위년 표시에 있어서 중간내내 2년, 3년, 4년식으로 편차가 유지되다가.. 말년이 가까이 오면서 서로 재위년수 표시를 일치시켜 줘야 하므로, 기사가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복잡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봐야 하지요.
그럼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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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AD108년.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29년(108)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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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9년(AD154년)
二十九年 正月 扶余獻其骨女二人 請和 許之
29년(AD154년) 1월, 扶余(부여)가 骨女(골녀) 2명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이를 허락하였다.
二月 雪深三尺 兩山不通 加童三十人
2월, 눈이 3척 깊이로 내려, 兩山(양산)이 不通(불통)되어, 童子(동자) 30명을 더하였다.
六月 支所禮伊伐飡 加亥稟主 樊五左頭上 勾利與遼大戰 取其地爲郡
6월, 支所禮(지소례)를 伊伐飡(이벌찬)으로, 加亥(가해)를 稟主(품주)로, 樊五(번오)를 左頭上(좌두상)으로 삼았다. 勾利(구리, 高句麗)가 遼(요)와 크게 싸워, 그 땅을 취하여 郡(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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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5월달 기사를 보면..
홍수가 나서, 10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는 기사가 있죠.
그런데, 파사이사금기에는 5월달 기사가 안 나와 있죠.
저 기사는 파사 29년이 일어난 사건이 맞습니다. 그럼 라디오는 어떻게 아느냐?
뒤에 파사이사금기 30년 7월달 기사에서 파사이사금이 하는 말중에서,
"昨夏大水 十道民饑(작하대수 십도민기)= 작년 여름에는 크게 홍수가 나서, 十道(10도)의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파사 29년 5월달에는 홍수가 난 것이 맞는거죠.
게다가, 두 사서는 파사 29년에 와서는 서로 어긋나 있던 재위년수가 일치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렇게 말이죠. 파사이사금 29년= 파사이사금기 29년.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9년(AD154년) 7월.
七月 大蝗 王遍祭神山大川 而禳之曰 “朕德衰歟 臣下奸歟 昨夏大水 十道民饑 今此大蝗奈蒼生何 果蝗滅而有年” 時閼智神君薨 上臨之 則曰 “臣以宗老無有上報 昇天 則可以除蝗” 果以薨日之夜 臭雨大降 虫自除 而穀大醒 故人曰 "閼智穀" 立其廟于南郊
7월, 蝗蟲(황충)이 크게 일어났다. 왕은 神山大川(신산대천)에게 두루 제사지내고, 굿을 하며 말하기를 “짐의 덕이 쇠하였는지, 신하가 간사한 건지, 작년 여름에는 크게 홍수가 나서, 十道(10도)의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지금 이렇게 大蝗(대황)이 어찌 蒼生(창생)하는가! 만일 蝗蟲(황충)이 없어지면 有年(유년, 豊年)이 될겁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閼智神君(알지신군)이 죽었다. 상은 그에게 임하자, (閼智神君(알지신군)이) 곧 말하기를 “臣(신)은 宗老(종로)로서 보답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하늘로 오르면 곧 蝗蟲(황충)을 없앨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과연 죽는 날 밤에 몹시 비가 많이 내려, 벌레들이 스스로 없어져서, 곡식들이 크게 깨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閼智穀(알지곡)이라 하였다. 南郊(남교)에 그의 묘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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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9년 1월달에 일어난 부여와의 화친 사건과 2월달 눈이 3척이 내린 사건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6년, AD105년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二月 京都雪三尺
26년(105) 봄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 2월에 서울에 눈이 세 자나 왔다.
*AD154년- AD105년= 49년 편차. 29년- 26년= 3년 편차.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9년 1월, 2월 기사는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6년 1월, 2월 기사로 3년 올라가서 붙어 있는거죠.
이해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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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AD108년.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29년(108)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런데, 다시 파사이사금 29년 기사로 돌아 와서,
뒤에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 정벌 기사는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 8월달 기사인데,
1년 올라가서, 파사이사금 29년 5월달 기사에 붙어 버린 것입니다.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AD155년) 8월.
八月 比只與多伐草八作亂 命虹盧加樹討平之 比只太子宝日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 主和 其弟靑裔奔于金官
8월, 比只(비지)는 多伐(다벌), 草八(초팔)과 함께 亂(란)을 일으켰다. 虹盧(홍로, 南露軍事)와 加樹(가수, 馬頭城主)에게 명하여 討平(토평)시켰다. 比只(비지)의 太子(태자) 宝日(보일)은 전쟁으로 죽고, 次子(차자) 朱日(주일)은 召文(소문)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을 주도하였고, 그의 남동생 靑裔(청예)는 金官(금관)으로 도망갔다.
*또다시, 여기 기사에서.. 加樹(가수)= 馬頭城主(마두성주)이므로, 마두성주에 관한 기사가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7년 기사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마두성주에 관한 기사인 파사이사금기 30년 8월 기사는 파사이사금 27년 8월 기사로, 3년 올라가 붙어 버립니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7년, AD106년.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년(106) 봄 정월에 압독(督賑)에 거둥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3월에 압독(督賑)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加耶)를 치게 하였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AD108년.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29년(108)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므로, 파사이사금 29년 귓부분 기사와 파사이사금 27년 8월 기사는 같은 해에 일어난 동일한 기사란 것입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
이 두 기사는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30년(AD155년) 8월에 일어난 사건로서, 각각 삼국사기 신라본기에게로 1년씩, 3년씩 올라가서 붙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니까,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에서는 양쪽 연대로 분산 배치된 것이죠.
마지막으로,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0년 기사를 볼까요?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0년, AD109년.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祈禳之 蝗滅 有年
30년(109)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지냈고, 기도하고 굿을 하였다. 누리가 없어져 풍년이 들었다.
*AD155년- AD109년= 46년 편차. 파사 30년으로 일치됨.
*서로 두 사서가 완전히 재위년수와 달수가 일치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0년= 파사이사금기 30년.
삼국사기 편찬자는 파사 말년에 가까워지자, 재위년수를 일치시킬 필요성이 있었던거죠. 그래야..뒤에 지마이사금에서 덜 헥갈릴테니까요
첫댓글 "昨夏大水 十道民饑(작하대수 십도민기)= 작년 여름에는 크게 홍수가 나서, 十道(10도)의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昨夏大水 十道民饑(작하대수 십도민기)= 지난 여름에는 크게 홍수가 나서, 十道(10도)의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해석을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