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4월 24일 월요일에 프랭크의 아버지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 그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구나" 하고 말했다. 실제로 부활절 반란의 그날 아침에 일어났다.
프랭크는 애국심이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그들은 1641년 반란에서 아일랜드를 위해 싸우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휴 마기레 경의 직계 자손이었다. 프랭크가 어릴 때 어머니는 이따금 오빠를 찾아갔다, 그때 프랭크도 데리고 가곤 하였다.
대화는 자주 프랭크의 외할아버지가 일한 구교도 해방령을 주도한 위대한 다니엘 오코넬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 해방자는 그 가문에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자유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이 무렵까지 어떤 이들은 무관심했고 외국의 지배 아래 살기로 체념했다. 또 어떤 이들은 분개했고 끝까지 "적"을 물리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인 헤가티 씨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자였다. 자주 그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모임이 끝난 뒤 프랭크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고 그에게 신페인 운동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권했다. 프랭크는 거절했다.
첫째로 그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여러 가지 신심활동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그는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폭력에 관계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활절 전 얼마 동안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소문을 믿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은 숫적으로 완전히 열세였고 성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부활주일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에 반란은 실제로 일어났다. 프랭크는 유혈 사태를 생각하고 매우 슬펐다. 그날 저녁 늦게 발포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마음은 번민과 고통으로 가득찼다. 모든 면에서 우세한 영국군이 단시간에 그것을 진압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반란 주도자들의 운명을 걱정했고 친구 헤가티 씨를 염려했다. 그는 체포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다음 수요일에 프랭크가 빈첸시오회 회의에 나가는 도중이었다. 그가 댐거리에 이르렀을 때 신문팔이 소년들이 거기를 뛰어 다니며 반란 주동자들이 처형되었다는 신문 머리 기사를 외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율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소름끼치는 사악한 격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격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헤가티 씨가 처형되지 않고 곧 풀려났다는 사실에 다소 위안을 얻었다.
15명의 반란 주도자들에 대한 즉결 처형은 아일랜드 민족을 자극하여 애국심이 불타는 민족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 정부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했다. 독립전쟁은 1917년부터 1921년까지 계속되었다.
대담무쌍함과 작전으로 유명한 마이클 콜린스가 신페인 군대의 최고 정보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전략가였고 우세한 영국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미국과 영국의 여론은 휴전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페인 지도자들은 협상 대표를 런던으로 보내라는 영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랭크 더프는 그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관리자로서 대표단을 이끌고 가서 위험을 내포한 여행에서 가능한 대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도록 선출되었다. 그것은 그가 신페인 지도부로부터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례이다. 또한 그는 대표단의 보고서 작성을 도왔다. 그는 일급 공무원의 능숙한 솜씨로 이것을 처리했다.
며칠 후 프랭크를 동반한 아일랜드 대표단은 보트로 런던을 향해 출발했다. 위험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각자는 연발 권총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프랭크는 거절했다.
런던 호텔의 접수계원은 숙박부에 F.S.Mitchel(미첼)이라고 서명한 젊은이가 사실은 프랭크 더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안전을 위해서 대표단의 진짜 이름을 감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물로 프랭크 자신은 협정의 정치적 측면이나 실무 협상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빈틈이 없는 그는 대표단의 안전에 대해 요행수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표단 모두에게 호텔 숙박부에 서명할 때 가명을 쓰도록 했다. 그가 선택한 가명은 F.S. Mitchel이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간의 협정은 1921년 12월 6일에 조인되었다. 새 정부 아래에서는 이전의 공무원들이 관대한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조기 퇴직을 선택할 수 있었다. 프랭크는 그의 직책을 계속 수행하기를 원했고 이것은 장관의 호감을 크게 샀다. 국가공무원으로서의 그의 관록은 어려운 시기에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프랭크는 또한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또 다른 임무를 받았다. 그의 상관들이 그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더프 씨, 마이클 콜린스 씨는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국군의 최고 지휘관입니다. 당신을 그분의 개인비서로 임명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조만간 포르토벨로 병영으로 가서 그분을 돕기를 바랍니다."
이 두 사람 간의 만남은 대조적이었을 것이다. 강력하고 유능한 마이클 콜린스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약간 작은 체격에 온화하고 또 다른 면에서 유능한 프랭크의 모습은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프랭크가 그의 공무를 보좌하자 그처럼 유능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을 얻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
1922년 8월 22일 아침에 프랭크 더프는 늘 하던 대로 콜린스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프랭크, 난 오늘 코크로 여행을 갈 예정일세. 약삭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좀 도와주게." 프랭크는 그렇게 했고 그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콜린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아일랜드 군의 위대한 최고 지휘관은 바로 그날 코크로 가는 도중에 사살되었다.
드럼콘드라에 있는 프랭크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1916년 반란을 주동한 죄로 영국군에 처형된 제임스 코널리의 미망인인 코널리 부인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이상한 얘기를 하면서 그의 충고를 들으려 했다.
별로 철저하지 않은 가톨릭 신자인 머피라는 사람이 그의 세 어린 아들을 개신교 기관에 넘겨 주었다. 그 후에 그는 마음을
돌렸지만 개신교 기관은 그들에게 들어온 어린이들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후에 중풍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머피 씨는 그의 아들들을 가톨릭 기관으로 옳기기 위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망 속에 그는 코널리 부인과 퍼스 부인을 그의 세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코널리 부인은 가톨릭교로 개종을 했고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그녀는 그 세 소년을 소위 말하는 "새둥지"로부터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프랭크는 머피 씨가 그녀에게 준 서명된 문서가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새둥지"로부터 데려올 합법적인 권리를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러나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기는 매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고 그녀에게 충고해 줬다.
"코널리 부인, 그 문제를 제가 처리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더프 씨."
택시 한 대가 병원 정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프랭크 더프는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운전기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세 어린 소년들이 가까이 와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자신이 들은 인상 착의와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코널리 부인이 프랭크를 처음 방문한 후 그는 입원한 머피 씨를 찾아가서 그와 아주 친해졌다. 그는 머피 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고 "새둥지"의 관리자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머피 씨는 그의 자녀들이 모일 모시에 그를 방문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세 아이들이 아버지를 방문한 뒤 병원을 나오자, 프랭크는 그들을 붙잡아 택시에 태웠다. 택시 기사는 곧바로 아텐으로 차를 몰았고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제 수사회 수사들이 그들을 돌보았고 마침내 글라스네번에 있는 "가톨릭계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했고 매우 행복해 했다. 그들 셋은 모두 훌륭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세월이 흘렀다. 다시 한 번 프랭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여러 해 전에 프랭크에 의해 "납치되었던" 세 소년들 중의 한 명인 머피 2세였다.
"더프 씨, 당신이 저희에게 해주신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물론 기억하고 말고. 그리고 우리가 자네들을 데리고 도망갈 때 자네들이 택시 뒷쪽으로 머리를 내밀면서 소리를 질러댔던 것도 기억하지" 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그들 둘 모두가 유쾌하게 엣날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 중요한 날의 모험을 되새겼다.
코널리 부인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훌륭한 역할은 분명히 상을 받을 만했고 실제로 주님은 그녀에게 풍부한 상을 내리셨다! 후에 프랭크는 그녀를 유명한 락 더그 순례에 두 번이나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