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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나랏말ᄊᆞ미”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1445년(세종 27. 1월 7일) 세종대왕이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요동에 다녀오도록 명한다. 여기서 운서는 한자의 음의 구성 성분 특히 반절 하자 즉 모음(운모)를 분류 기준으로 삼아 한자를 분류하여 배열한 한자 발음 사전을 말한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에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요동(遼東)에 와 있던 명나라 음운학자 황찬(黃瓚)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 기록이다. 1487년(성종 18. 2월 2일) 기록에 따르면 “세종조에 신숙주·성삼문 등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질정(質正)하였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각잡기(東閣雜記上)에는 이들이 “요동에 왕래하기를 13번이나 하였다”고 기록했다.
훈민정음 창제일은 1443년, 반포일은 1446년이다. 3년 사이 열세 번 요동을 왕래한다는 것은 일정과 거리상 불가하다. 마지막으로 다녀 온 해가 1445년 1월로 창제일로부터 2년 남짓이다. 년 2회 왕복이면 7년이며, 년 1회면 13년을 왕복한 셈이다. 그 오랜 시간 신숙주 일행은 황찬을 매개로 고조선 영역을 순방하며 비밀한 방법으로 가림토(加臨土) 문자와 관련된 방언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음운(音韻)에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明의 속국이라는 특수 관계에서 자칫 역모의 실마리가 제공될까 하여 실록 및 여타 기록에도 비밀을 유지한 것은 아닐까?. 이같은 의문은 세종실록에는 요동 파견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鄭麟趾 序) 중에 부교리(從五品) 신숙주, 수찬 성삼문 이름이 올라있다. (於是 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 副敎理臣朴彭年 臣申叔舟 修撰臣成三問敦寧府注簿臣姜希顔 行集賢殿副修撰臣李塏 臣李善老等)
세종은 장구한 시간 정음(正音)에 노심초사했고, 수년간 이들이 수집한 가림토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이덕무(李德懋)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황찬은 홍무운(洪武韻)과 중국(中國)의 정음(正音)을 가르쳤고, 글자가 모두 옛날 전(篆)자 모양과 같았다 한다”고 써서 고조선 문자를 취했음을 밝힌 것이다.
홍무운(洪武正韻)은 元나라를 멸한 주원장(朱元璋 洪武帝)이 학자들을 동원,
몽골식 한자 발음 표기법이 가미된 원대(元代)의 운서(韻書)를 폐지하고,
明의 표준적 운서를 공포하기 위해 1375년(洪武 8년)에 간행한 책이다.
운서란 운(韻)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없던 중국의
경우 한자의 음을 표시하기 위해 서로 다른 두 한자의 음을 절반씩 따서
발음을 표기했다. 이를 반절식(反切式) 표기라 한다
전자(篆字)의 기록은 BC 2267년 부루태자가 우(虞) 사공(司空)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던 천부왕인(天符王印)에 새긴 천자국의 전문(篆文)을 말한다.
황찬은 신숙주에게 운학(韻學)을 강론, 친근하게 여겨 ‘희현(希賢)’이란 두 글자로 당명(堂名)을 지어 주었다는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기록을 보면 단순한 여정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에 대해, 김시습(金時習)은 『징심록(澄心錄)』에서 취본(取本)하였다라 했고,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초종성 8자, 초성 8자,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인도 산스크리트어 글자를 본으로 했다.(···初終聲八字, 初聲 八字, 中聲 十二字, 其字體依梵字爲之···)"라 하고,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유희(柳僖)는 언문지(諺文志)에서 서로 몽골자 기원설을 주장했다.
여기서 『부도지』 8장을 참조해 보자.
황궁(黃穹)씨가 오미(五味)의 변(變) 이후 제족(諸族)에게 분거(分居)할 것을 명한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운해주(雲海洲)로, 백소(白巢)씨는 월식주(月息洲)로 , 흑소(黑巢)씨는 성생주(星生洲)로, 황궁씨는 천산주(天山洲)로 갔다. (黃穹氏 乃分給天符爲信 敎授採葛爲量 命分居四方 於時 靑穹氏 率眷出東間之門 去雲海洲 白巢氏 率眷出西間之門 去月息洲 黑巢氏 率眷出南間之門 去星生洲 黃穹氏 率眷出北間之門 去天山洲 天山洲 大寒大險之地 此 黃穹氏 自進難 忍苦復本之 盟誓.)
위 지역을 고찰해 보자.
운해주는 파미르고원(티벳)의 동쪽. 중원 지역이며,
월식주는 달이 지는 곳. 파미르고원의 서쪽. 중근동 지역이다.
성생주는 별이 뜨는 곳. 파미르고원(티벳)의 남쪽. 인도 및 동남아 지역이며,
천산주는 파미르고원(티벳)의 북동쪽, 천산산맥 박격달봉 인근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논한 바, 부도지 14장에 “황궁씨가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音에 준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했다(麻姑之譜 明其族屬 準天符之音 整其語文)”고 한 대목에 따르면, 하나로 된 어원을 약속한 후 사방으로 분거(分居)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글이 삼성기(三聖紀下)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일컬어 파나류 국이라 하고 그 영토가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 여 리이다(亦稱 波奈留之國 其地廣 南北五萬里 東西二萬餘里)”라는 내용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편의 상 알타이어, 산스크리트어(梵語), 드라비다어, 몽골어, 토이기어, 고대 타밀어, 그리스어 및 라틴어 등으로 분화된 이들 상이한 언어들은 시원지 파미르로부터 파생되고 천추(千秋)의 시간을 지나며, 다양한 음성 변화를 겪어 자음 및 모음체계들이 변화해 왔을 것으로 본다. 이들 어원이 원시 한국어의 조어(祖語)라 주장하는 근거는 부도지에서 말한 BC 9000여 년 전 이미 ‘어문(語文)을 정리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는 조선(祖先)들의 역사 기록이 결코 허구가 아닌 사실적 상황이었음을 증빙한다.
이는 유전학을 전공한 한 의학자는 한국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여러 인종이 모인 인종의 용광로라 했다. 호주 원주민(뮤탄트)부터 네그로, 코카서스, 서역인, 동남아시아 등 178개 지역사람의 유전인자가 한국인의 염기서열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혈연관계가 그 근원이 아니었을까?.
훈민정음에 대해 김시습 등 세 사람이 주장하는 각 지역의 기원설은 부도지가 적시한 제족(諸族)의 최초 언어로써 어느 한 지역의 언어가 한국 언어의 뿌리라고 매김하기에는 무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BC 2181년(제위 2년) 가륵 단군(嘉勒檀君)은 삼랑 을보륵(三郎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니 그것이 가림토(加臨土)라고 했다. 《단기고사》에는 3세 단군 가륵 제위 3년에 단군이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이름지었다’고 했다.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는 『단군세기(檀君世紀)』의 기록은 부도지 12장의 내용과 동일하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太白逸史)』는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로 각기 표기되어 있다. 가림토는 분별(分別)하는 토대(土臺) 즉 땅이라는 의미를 택해 토(土)를 썼으며, 가림다는 多(다, 땅)로 같은 뜻을 담았다. 태백일사 번한세가(상)에는 土를 왕토(王土) 즉 천자의 영토라 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구절은 가림토의 체재와 너무 닮았다.
세종실록 25년 12월 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옛 전문을 모방하였다(其字倣古篆)” 라고 하였고, 최만리(崔萬理)도 상소문에서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 것과 반대이다 (字形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라 하여 예전의 전서(篆書)를 모방했음을 밝혔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1443년(세종 25) 실록(實錄)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라 썼으며,
1446년(세종 28) 정인지(鄭麟趾)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서문에,
“모양을 본 딴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癸險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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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은 ‘其字倣古篆’으로 ‘옛 전자(篆字)의 자체(字體)를 모방했다’이고, 해례본은 ‘象形而字倣古篆’로 ‘모양(形)은 고전자(古篆字)를 모방하여 본떴다(象)’는 설명이다.
정인지는 해례에서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던 이두문(吏讀文)에 대해서는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비단 품위가 없고 체계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한다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고 하였다.
정인지는 해례본에 <象形>이라는 문구를 넣어 이를 증빙했다. 단군조선을 철저히 부정하고 한반도로 국한한 개국 조선은 가림토를 모토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정인지가 ‘상형’이라는 문구를 넣어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나마 고조선 문자를 실증한 것으로 본다.
결국 가림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또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라 하여 부도지에서 말한 오음칠조(五音七調)에서도 취했으니, 상고(上古)의 사실(史實) 기록이 허구가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하겠다.
세종은 왜 요동을 선택했을까?.
요동은 어떤 곳이며, 우리 역사에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인 요동, 한민족의 태동지이며 찬란한 문화의 발상지가 아니던가. 또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와 발해도 요동을 차지했다는 점은 이 지역이 갖는 특성이었다.
좁은 의미로는 요동반도와 그 일대만을 요동으로 보기도 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전체까지 포함한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진역유기를 인용,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경박호의 선춘령과 저 오소리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라 했다. 상고의 문자와 그 쓰임의 흐름을 신숙주 등을 통해 면밀히 조사했을 개연성을 본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요동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遼東別有一乾坤)/ 두드러져 중국과 구분되며(斗與中朝區以分)/ ........ / 가운데 국경 여기가 조선 땅이라(中方千里是朝鮮)” 이라 하여 고조선의 영역을 명확히했다.
요동반도와 그 일대는 전략적으로 중원의 초입으로 중국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을 위협적으로 인식해왔고,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외국과 끊임없이 다퉈왔다. 한의 고조선 정벌, 수 당의 고구려 정벌, 요 금과 송의 대립, 명의 요동 진출 등등
한반도 역사에서 좁은 의미의 요동을 점령했던 시기는 고조선 - 고구려 - 발해 순이었고, 발해 멸망 후 고려 공민왕 때 요동성을 점령한 이후로는 더 이상 요동을 차지한 시기는 없다. 사실 고구려 900여 년 역사 중 요동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초부터 250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요동을 지배했고, 고조선도 연과 진에 의해 기원전 3세기에 요동에서 밀려났다. 발해가 요동 일부를 2백 여 년간 지배했으나 그 이후로는 우리민족의 강역에서 벗어났다.
신숙주 등이 요동을 찾은 이유는 고조선의 음운을 채집하기 위한 여정으로 풀이된다. 위대한 조상들의 터전인 요동, 그 곳에서 하늘의 소리(天音)에 귀 귀우렸을 가능성이다. 이들이 만난 황찬은 누구인가?. 1433년 明나라 진사등과록(宣德八年 进士登科录)에 따르면 두 명의 황찬이 등장한다. 동명이인으로 한자도 같다. 이들은 각각 1398년, 1402년 생으로 두 사람 모두 정치인이며, 진사출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뒤의 황찬은 1433년 합격한 바, 년대가 맞지 않는다. 앞선 황찬에 대한 죄상과 유배 기록은 찾지 못했다. 황찬이 여러 문헌에 등장한 바,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황찬을 매개(媒介)로 한 기록은 가상(假想)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요동은 고대 문명의 중심지이며 중원의 전략적 요충지로 결코 유배지로 삼기에는 불합리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사관들이 세종실록에 사실기록을 배제한 이유가 아닐까?.
위 해례본에서 고증한 “모양을 본 딴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象形而字倣古篆)” 라는 문귀는 이들에 의해 확인된 사실적 묘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사실들이 명에 발각될까 봐 실록기록을 의도적으로 감추었을 개연성이다, 또한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와 신미(信眉 1405~1480)대사라는 두 인물을 대입,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으로 만들어 明나라의 예봉(銳鋒)을 피한 세종의 전략적, 정치적 고려가 아니었을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수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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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维基百科 《宣德八年进士登科录》)
黃瓚(1398年-?),字時貴,江西撫州府臨川縣人,民籍。明朝政治人物。進士出身。
廣東鄉試中举。宣德八年(1433年),參加癸丑科會試,得貢士第五十三名。殿試登進士第二甲第二十三名。曾祖父黃寅。祖父黃華。父亲黃學問,曾任陽山縣學教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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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瓚(1402年-?),江西吉安府吉水縣人,民籍。明朝政治人物。進士出身。
江西鄉試中舉。宣德八年(1433年),參加癸丑科會試,得貢士第二十三名。殿試登進士第二甲第二十五名。曾祖父黃履亨。父亲黃克俊[1]。
신숙주(申叔舟, 1417~75) 황찬 19세 차이/ 성삼문 1418∼1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