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190의 장신 포인트 가드 신동찬
박수교에 비해 덜 알려진 감은 있지만 80년대 삼성과 국가대표팀에서의 포스는 박수교에 절대 뒤지는 선수가 아닙니다.
당시 가드로서는 신장이 190으로 크기에 국가대표팀에서는 더 기여도가 컸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국가대표 베스트 5의 평균신장도 높여주는 선수였고요.
박수교보다 덜 알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것은 박수교는 남자 실업,프로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고,신동찬은 경복고와 남자농구가 아닌 여자 프로농구 감독을 맡아 그런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나하면 남자농구 프로가 여자농구보다 인기가 더 많으니까요.
80년대 삼성,현대의 라이벌전이 재미있었죠.
삼성은 1번이 신동찬,현대는 1번이 박수교였습니다.
삼성이 현대와 게임할 때 이충희 전담 수비수가 신동찬이었습니다.
이충희가 신동찬에게 제대로 걸리는 날에는 심하게 얘기하면 망신을 당하는 날입니다.
신장이 190이고 빠르니 작은 이충희를 수비하기는 적격이었죠.
(이충희 신장은 182로 소개되었으나 180정도로 추정됨)
대체로 감독들은 자기팀 포인트 가드에게 상대팀 슈터를 수비하게 하는 체력적인 부담은 주지 않는데 김인건 삼성 감독께서는 이충희에게 다득점을 허용해서는 현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팀의 포인트 가드인 신동찬에게 중책을 맡긴 것입니다.
신동찬이 박수교 연세대1년 후배죠.
당시 신동찬은 포인트 가드치고는 드물게 190으로 커서 국내대회도 잘했지만 국제대회도 잘했지요.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83년 홍콩 ABC대회 때 계속해서 박수교와 2가드 시스템을 이룹니다.
특히 82년 뉴델리 대회때는 중공을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1등공신 중 한 명입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신동찬은 후반전 2분여를 남기고 한국이 중공에 81:78로 근소하게 앞서가고 있을때 쇄기를 박는 중거리슛 성공으로 83:78로 앞서가게 합니다.이 중거리슛이 상당히 중요한 슛이었는데 실패했다면 중공이 추격을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이 기회에 찬물을 끼얹는 슛이었습니다.
당시에는 3점슛 제도가 없었는데 이 슛의 거리가 3점라인을 밟고 던진 것 같은 먼 거리였습니다.
이 신동찬의 중거리슛 성공이 승리에 쐐기를 박는 원동력이었고,이충희는 이름에 걸맞게 중거리슛과 상대의 파울로 얻은 자유투를 잘 성공합니다.
이 경기에서 이충희의 중거리슛은 당시는 3점라인이 없었고 3점슛 제도도 없었지만 3점라인이 있다고 가정했을때 3점라인 바깥보다는 3점라인 안쪽에서 구사하는 슛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박수교는 종료 30초전 85:84로 한국이 앞서 있을때 시간을 보내는 준수한 드리블과 패스로 경기를 잘 마무리합니다.
중공팀에는 장신 선수가 즐비했는데 신동찬도 신장이 190이라 옆에 같이 서있어도 신장이 대등하게 보였습니다.
참 보기 좋더군요.
센타 신선우(190)는 센타치고는 근래에 보기드믄 이 경기에서 좀 심하게 얘기하면 가드에 버금가는 드리블링을 보여줍니다.
후반전 30초를 남기고 한국이 85:84로 앞서있고 공격권을 가졌을 때 하프라인을 드리블 치면서 넘어온 선수는 박수교가 아니고 신선우였습니다.
신선우는 센타이면서도 그만큼 드리블링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파워포드 임정명(189)은 무릎부상전이었는데 많은 드라이브인으로 득점에 가세합니다.
임정명이 5반칙으로 나가자 이민현(188)이 들어와서 뛰고 좋은 활약을 보여줍니다.
이민현은 자신의 첫번째 샷이 실패하자 재차 리바운드를 잡아 세컨샷을 기어이 성공시킵니다.
한국은 중공에 85:84로 승리합니다
마지막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이민현이 기뻐하며 공을 높이 던지며,선수들은 코트 중앙에 나와 뒤엉켜서 기쁨을 만끽합니다.
이민현 국대코치님께 여쭤보니 그 때 공을 던진 높이가 기록적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병국 코치님도 상당히 기뻐하시더군요.
이병국 코치님은 안경을 쓰고 계셨는데 선수들과 뒤엉켜 너무 기뻐하시다가 하마터면 안경이 깨질 뻔 했습니다.
이 날 방열 감독님과 이병국 코치님은 츄리닝 차림이었습니다.
1983년 홍콩 ABC대회 때도 신동찬의 활약은 이어집니다.
이 대회 일본전이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경기였는데,한국이 박수교의 2점 중거리슛으로 2:0으로 앞서갑니다.
일본이 이어서 득점하고
신동찬이 코너에서 중거리슛을 성공하고 양팔을 들고 포효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 당시에는 3점슛 제도가 없었습니다.(3점슛 제도가 있었으면 일본을 이겼을 텐데요...)
한국은 장신 오카야마(228),키타하라(202)의 포스트 공격을 앞세운 일본에 연장전 끝에 석패하고,며칠 후 벌어진 중공과의 경기에도 크게 져서 중공과 일본이 결승전을 합니다.
이 일본과의 경기는 졌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빅게임이었습니다.
한국이 졌지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의 베스트 5는 박수교-신동찬-이충희-임정명-박종천이었습니다.
신선우,조동우 둘 다 부상으로 선발되지 못한 대회이며,박종천이 194의 신장으로 중공의 무티에추(235),일본의 오카야마(228),키타하라(202) 이 선수들을 수비하느라 고생했습니다.
김유택은 대표팀에 처음 선발되어 일본전 연장전에 나와 2점 골밑슛을 성공합니다.
당시 또 기억나는 것이 일본전 때 일본팀에는 우쓰미(2007년 현재 일본 여자 대표팀 감독) 라는 중거리 슈터가 맹활약했는데,한국이 다득점을 이 선수에게 허용했습니다.
당시 홍콩의 체육관이 작아서 그런지 이 우쓰미 선수가 게임 중 걸어가다가 한국의 벤치에 앉아있던 박수교의 발에 걸려 넘어집니다.심하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수교는 체력을 비축하려고 벤치에 잠시 나와 있었음)
그리고 우쓰미가 박수교를 째려보고,박수교도 "네가 내 발을 못보고 걸려넘어진 것 아니냐"는 듯 같이 째려봅니다.
신동찬 선수 또 기억나는 것이 TV 어떤 프로그램에서 삼성전자 체육관을 찾아 갔는데 한 손으로 농구공을 움켜쥐는 선수들을 소개하며 신동찬이 농구공을 한 손으로 움켜쥐는 것을 보여주는데 사회자가 농구공을 한 손으로 움켜지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니 무표정한 얼굴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더군요.
제 기억에 신동찬 선수는 잘 안 웃는 편이었습니다.저는 삼성팬이었기에 신동찬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대체로 연세대팬들은 삼성을,고려대팬들은 현대를 응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삼성의 간판선수인 김현준이 연세대 출신이고,현대의 간판선수인 이충희가 고려대 출신인 점이 작용한 것으로 봅니다.그리고 실제로 연세대 출신들이 삼성에 많이 입단하고,고려대 출신들이 현대에 많이 입단했습니다.)
김현준 선수도 농구공을 한 손으로 움켜쥐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회자가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친절하게 잘 설명해 주더군요.(비결은 농구공 선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쥐면 된다고 했음)
신동찬은 리딩,중거리슛도 상당히 좋지만 수비까지 좋은 보기드믄 좋은 선수였습니다.
공격 뿐 아니라 수비까지 좋으니 신동찬의 가치는 상승하는 것입니다.
요사이도 보기드문 190의 포인트 가드고요.
신동찬 이후로는 190이상되는 국가대표팀 리딩가드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박찬희가 1번으로 성장해서 중간에 역사의 공백은 있지만 국가대표 장신포인트 가드로서 신동찬의 뒤를 잇기를 기대해 봅니다. 경희대에서 2번으로 기용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지만요.
그러고 보니 신동찬이 박찬희 경복고 대선배네요.
또 한명의 기대되는 선수는 연세대 박형철입니다.
동료들의 찬스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비이기적인 마인드를 가진 박형철도 기대하는 선수인데요.
국가대표팀에서 박형철이 리딩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공교롭게도 박형철은 신동찬 연세대 후배네요.
그럴 경우 박형철(190)-양희종(193)-이규섭(198)-김주성(205)-하승진(223)의 역대 최고 높이의 라인업이 탄생하게 됩니다.
정작 쓰고 보니 신동찬에 대한 글은 몇마디 안되고 다른 부분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신동찬 선수에게나 다른 분들께 미안하네요.
혹시 신동찬님이 이 글을 보신다면 연락한번 주셨으면 합니다.
소주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