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용문사 호산 스님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옆에 있는 사람들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최선을 다해 하는 것도 수행"
양평 용문사엔 1100년 넘은 '용문사 은행나무'와 함께 별난 스님이 산다. 광화문 한복판의 오목한 반원통 슬로프에서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국제적 선수들과 스노보드 공중회전 실력을 겨루는가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큰 공명을 울리는 음악회를 기획하고 생태운동을 몸으로 실천한다. 양평 용문사 주지 호산 스님이다.
스님은 1997년 남양주 봉선사에 있을 당시 인명사고가 많이 나던 근처 스키장에서 기도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갔다가 처음 스키를 접했다. 하지만 무거운 부츠며 폴에 자세도 딱딱한 스키보다 좌, 우, 앞, 뒤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타는 보드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당시엔 보드를 타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10대나 20대 초반의 전유물이었다. 스님은 세대 차이 난다며 피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짜장면과 간식을 사줘가며 스노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심한 부상에도 열심히 배우는 스님을 보며 아이들은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불안한 장래에 대한 고민을 들으며 "젊은 보더들이 뛰놀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주위의 스님들 도움을 받아 달마 오픈 스노보드 피스(FIS·국제스키연맹)컵 대회를 열었다. 국내에선 대회가 거의 없어 해외로 나가야 했던 선수들에겐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달마라는 이름이 종교색이 느껴져 다른 이름을 찾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불리고 있어" 바꿀 수가 없었다. 성장한 아이들이 그때 맺은 인연으로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2세를 낳아 데려올 때마다 스님은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지난 3월 스페인에서 열린 2012 스노보드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7위를 차지한 정유림(14·양평 단월중) 선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꿈나무 4명도 이 대회 출신이다.
◇ 스님 뒷모습에 반해 출가 결심
"걸망을 짊어지고 산 속 오솔길을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경남 진주 출신인 스님은 14세 때 근처 산사에서 무술을 배우다가 보게 된 스님의 뒷모습에 반해 부모 몰래 출가를 감행,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군 복무를 마친 뒤 해인사 등의 선방에서 수행 정진하다가 남양주 봉선사로, 그 후 양평 용문산 상원사로 오게 됐다. 그때 우연히 소리꾼 장사익을 만나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상원사는 신도들이 별로 없었어요.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절이었지만 그럴 여건이 안 됐죠. 그래서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는 선원을 세우고 싶어 장사익 선생을 만나 의논하다가 소박한 음악회를 처음 열게 된 거지요."
알려지지 않은 산사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알음알음 찾아온 사람들이 절마당을 꽉 채웠다. 절 아래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은 여러 명의 스님이 수행 정진하는 선원이 세워졌다.
"거기서 시작한 음악회를 5년 전 용문사 주지로 오고서도 계속했어요. 올해가 열두 번째예요. 해지는 저녁 무렵 산사에서 열리는 음악회는 불자뿐 아니라 평소 스트레스에 시달린 사람들에게도 위안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인지 호산 스님이 기획하는 산사음악회는 1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지난 9월 1일에 열린 음악회는 유료인데도 15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다. 태풍으로 비가 내리는데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성황을 이뤘다. 이날 수익금 전액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양평 중·고등학생 50명에게 그 자리에서 전달됐다.
◇ 옆사람 위해 최선 다하는 게 수행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라는 스님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도 수행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용문사 길이 '아름다운 길'로 알려지며 많은 사람이 걷고 싶은 길이 된 것도 스님의 그런 마음에서다. 용문사 주지로 부임 후 스님은 제일 먼저 전선과 전화선, 생활하수관을 땅 밑에 묻었다. 노약자를 위한 전동차를 제외하고 일반 차량의 출입을 엄금했다. 스님 스스로도 걷거나 전동차를 타고 다녔다. 길옆으로 흐르는 작은 물길은 예상외로 길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용문산을 찾는 연간 100만여명의 사람이 그 길을 걸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다.
호산 스님은 "달마배 스노보드나 음악회도 그렇고, 처음부터 거창하게 계획하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 옆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을 함께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어진 소임을 마치면 어린 시절 보았던 스님의 뒷모습을 쫓아 수행 정진하는 꿈은 마음속에서 언제나 놓지 않고 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용문산을 찾는 사람들을 반겨주는 은행나무 같은 스님이 그곳에 살고 있다. http://news.chosun.com/
▶ 태몽
가난한 종가집 막내로 태어난 호산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물론 예지력과 지혜도 상당했음을 몇 번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중(동명) 1때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집을 떠난 것이다. 아마 소림무술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은 몇 년을 수소문 한 끝에 조그마한 암자에서 수행하는 호산을 발견하게 된다. 옛 이야기나 나올 법한 호산의 출가 사연이다.
그 후 수십년이 흘러 호산의 어머니가 내게 태몽 얘기를 꺼냈다. ‘도련님, 호산스님을 임신했을 때 머리맡에 부처가 놓여있었는데 그 때는 전혀 스님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업과 연인가 봅니다.’
내가 호산을 본지도 벌써 26년... 당시 호산의 봉술은 한국 최고였으니.. 생이란 미리 정해진 것일까? 친구 동생은 중이 되고자 머리 깎고 출가했지만 다시 3년만에 환속하여 가정을 꾸려 자식 낳고 사는 것을 볼 때 세삼 ‘생이란 불가사의 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 東素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