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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동력
진화론과 구조론
다윈의 진화론을 의심하게 된 것은 이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원숭이의 구부정한 등이 진화하면서 점점 펴지는 모습이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불편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는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다가 망치 소리를 듣고 화음을 느꼈다면 나는 이 그림에서 불협화음을 느꼈다. 이건 아니지. 딱 봐도 아니잖아. 목에 가시가 걸리듯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등이 구부정한 인간의 조상은 달리기를 못해서 맹수에게 당한다. 걱정된다. 신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다. 원숭이처럼 나무에 매달리든지 사피엔스처럼 직립보행을 하든지 둘 중 하나다. 나무와 평지를 오가는 반 직립이 일시적으로 있었을 수 있지만 유의미한 수준에서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과학의 수준을 들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법론 문제다. 도대체 뭘 가지고 과학을 한다는 거야? 무사에게는 칼이 있고 포수에게는 총이 있다. 과학자는 뭐가 있냐?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떤 둘을 연결했을 때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가짜다. 총과 총알의 구경이 맞지 않으면 범인이 아니다. 연결이냐 단절이냐로 우리는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의 도구다. 과학은 객체와의 연결이며 연결의 접점까지 도달하는 경로는 한 곳도 끊어지면 안 된다. 그냥 그렇다고 선언할 게 아니라 경로를 제시하고 목표에 도달해서 접점을 일치시켜야 한다.
물리학이라면 빌드업 과정이 공개된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려 가는 그림이 있다. 응용과학으로 갈수록 그냥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근거 없이 소설을 쓴다. 프로이트는 그러다가 깨졌지만, 다윈은 성역이라서 건드리지 않는다.
직접 요리하면 상관없지만 식당에서는 메뉴판에 있는 것을 주문해야 한다. 혼자 살 때는 그냥 자도 되지만 부부가 되면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들어야 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어떤 둘이 엮이면 중간이 없다. 결혼하면 동가식 서가숙은 불가능하다. 나무 생활 반에 지상 생활 반이면 동가식 서가숙이다. 고래가 낮에는 육지에서 살고 밤에는 바다에서 살 수는 없다.
반 직립이 어색하다는 것은 어린이도 알 수 있다. 경찰이라도 용의자에게는 알리바이의 일치를 추궁하고 법정에는 지문의 일치를 제출한다. 수학 문제를 풀어도 등호를 중심으로 일치를 판단한다. 다른 잡다한 부분은 논외로 하고 핵심 하나로 승부하므로 일목요연하다. 우리는 제출된 결과를 수긍하고 납득한다. 저울의 눈금이 일치하면 맞는 거다. 비로소 세상이 돌아간다. 이는 기초 중의 기초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러나 과학은 개판이다. 아무거나 하나만 걸려라 하고 마구잡이로 투척한다.
집이 있으면 길이 있고 차가 있으면 도로가 있다. 우리는 객체를 연결하는 경로를 추적하고 내포와 외연의 일치를 판별하여 지식의 세계를 건축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이런 기본이 안 되어 있다면 위태롭다. 이것은 딱 봐도 어색한 그림을 교과서에 실은 한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인류집단의 본질적인 취약점을 들키는 문제다. 인간이 원래 이 부분에 약하다. 일치와 불일치가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본질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문명 차원의 거대한 방향전환이 아니면 안 된다.
다윈의 오류
진화생물학으로 구조론을 증명할 수 있다. 구조론이 해명하는 '외부의 개입 없이 닫힌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대표적인 예가 생물의 진화다. 구조는 엮임이다. 진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엮여서 일어났다. 다섯 가지 밸런스가 엮였다. 자연과의 밸런스, 신체 내부 밸런스, 짝짓기의 밸런스, 생애주기 밸런스, 집단과의 밸런스다. 자연선택은 그중 일부다.
구조론은 조절장치에 대한 이론이다. 만유의 조절장치가 있다. 밸런스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에너지 출구가 입구를 막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조절은 에너지 경로를 다치지 않는다는 대전제 하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진화는 방향성이 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화의 방향성을 부정하려면 진화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틀렸다. 큰 틀에서 맞지만 허술하다. 진화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과 같다. 대륙이 이동한 사실은 맞지만 원리는 설명하지 못했다. 진화한 것은 맞지만, 원리는 다윈이 설명하지 못했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내부요인에 의한 자발적 변화를 부정한다. 자연선택은 종의 내부요인이 아니다.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했다.
수류탄이 터져도 안에서 터진다. 원인은 내부의 기폭장치에 있다. 밖은 타이밍을 결정할 뿐이다. 외부의 안전핀이 빠져서 그때 터진 것이다. 감기에 걸린 것은 인체 내부의 면역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왜 겨울에 감기에 걸렸는지 그 타이밍은 외부요인이 결정한다. 원인은 내포와 외연이 있다. 내부요인이 더 중요하다. 외부요인은 시간과 장소만 결정한다. 원인은 본질적 원인과 부수적 요인이 있다. 내포가 본질적 원인이라면 외연은 부수적 요인이다. 다윈은 부수적 원인을 봤을 뿐이다.
뉴턴도 깨졌고 아인슈타인도 깨졌다. 제자는 스승의 어깨를 밟고 씩씩하게 전진했다. 프로이트가 특히 많이 깨졌다. 마르크스도 욕먹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위대함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식인이 유독 다윈에 대해서만 관대하다. 다윈은 성역이 되어 있다. 기독교의 횡포에 맞서려는 정치적 동기 때문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프레임이 걸렸다. 다윈의 적자생존 개념이 인종주의로 비화해도 식자들은 모르는 척한다. 기독교에 말꼬리 잡힐까 봐 전전긍긍한다.
프로이트는 쥐잡듯이 잡으면서 마르크스는 은근히 두둔한다. 자본의 폭주를 견제할 대안이 없으므로 울며 겨자 먹는다. 마르크스를 부정하는 순간 지식 권력을 뺏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과학에 정치와 종교가 끼어들어 피곤해졌다.
맞는 것은 맞는다고 하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못한다. 맞는 것은 맞는다고 하는데 다윈이 틀린 것에 대해서는 쉬쉬한다. 암묵적인 담합이다. 아인슈타인의 틀린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즐거워하며 잘도 지적하면서 말이다.
학이 한쪽 다리로 서는 이유
진화생물학은 '위하여'라는 표현을 남발한다. '위하여'는 결과를 원인으로 바꿔치기한다. 그 이유는 원인을 설명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원인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인데 그 메커니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학이 한쪽 다리로 냇가에 서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란다. 초등학교 방학공부 책에서 봤을 것이다. 딱 봐도 아니잖아. 학은 여름에도 한쪽 다리로 서 있다. 관찰했더니 많은 새가 날씨와 관계없이 한쪽 다리로 서 있었다. 조류는 신체구조가 한쪽 다리로 서는 게 더 편하게 되어 있다. 뇌가 체중을 분배하기 쉽다. 두 다리에 체중을 똑같이 분배하려면 신경이 곤두선다. 말은 서서 잘 수 있고 고래는 물속에서 잘 수 있다. 원래 신체 구조가 그런 것이다.
학자들은 구조로 보지 않고 어떤 동기나 목적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건 주술의 언어이지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이게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부모가 집단 무의식에 의해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자식의 마음을 조종하는 방법으로 집단을 결속하려는 권력의지가 작용한다. 호르몬이 분비된다. 마음속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모르므로 얼버무리는 말이 '위하여'다. 미래로 과거를 설명하다니 인과율이 우습냐?
우주 안의 사건의 모든 원인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있다. 그것을 모르니 결과를 원인으로 돌려막는다. 과학자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훈련되어야 한다. 주술의 언어를 버리고 과학의 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진화는 모듈 단위로 일어난다. 하나가 변하면 이에 연동되어 많은 것들이 일제히 변한다. 그러므로 방향성이 있다. 주변과 호환되지 않으면 출구가 입구를 막아서 에너지의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경로가 문제다. 혼자라면 그냥 가면 되지만 둘이 함께 가려면 미리 약속해야 한다.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비용은 제곱으로 든다.
여러 가지 요소를 연동시켜 변이를 결정하는 성질은 DNA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다. 변이는 주변에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특정 요소만 발췌하여 선택적으로 진화할 수 없다. 밸런스를 무시하고 오른 다리만 길어지거나 왼팔만 굵어질 수 없다. DNA 시스템 내부의 조절장치가 그것을 차단한다. 걸러질 변이는 사전에 걸러지는 것이다.
진화는 무언가를 플러스한다. 플러스는 언밸런스다. 생물은 밸런스를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진화만 가능하다. 진화의 동력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계 부품이 많아도 태엽은 하나다. 인체에 장기와 조직이 많아도 그것을 조절하는 뇌는 하나다. 동력원이 하나이면 출구가 입구를 막는 구조모순이 생긴다. 종의 진화는 자연과의 밸런스, 집단과의 밸런스, 장기와 조직 간의 밸런스, 본능과의 밸런스, 생애주기와의 밸런스를 다치지 않는 한 방향으로만 일어난다.
코끼리는 코만 커진 게 아니고 기린이 목만 길어진 것이 아니다. 생태적 지위와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이다. 밸런스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여친의 키가 크다면 남자도 키높이 구두를 알아봐야 한다. 여친에게 키를 조금만 줄여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학력도 격차가 있으면 못 배운 사람이 공부해서 배운 사람을 따라잡아야 한다.
0보다 작은 숫자 문제
진화가 한 방향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0보다 작은 숫자가 없기 때문이다. 진화의 갈림길에서 종은 무수히 0보다 작은 숫자 문제와 맞닥뜨린다. 자연선택? 선택은 제한된다. 0보다 작은 숫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0은 균형이다. 균형에 도달하면 일치다. 일치하면 연결되고 에너지가 공급된다. 자연은 불일치를 일치시킬 뿐 그 외에 없다. 북극의 북쪽이 없고, 산의 정상보다 더 높은 곳은 없다. 균형점 0을 넘는 초 균형은 없다.
자동차가 전진하든 후진하든 에너지 소모는 0보다 크다. 자동차가 뒤로 간다고 가솔린을 도로 물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기차는 충전과 방전 양방향으로 조절한다. 바둑은 무르기가 없고 화투도 낙장불입이 국룰인데 전기차는 돌려준다. 그런 전기차도 오르막길에 방전하고 내리막길에 충전하며 원점으로 돌아오면 조금이라도 전기가 닳는다. 0보다 작은 게 있다면 그게 무한동력이다. 시장에서는 미래의 수익을 당겨쓰는 선물이 있지만 자연은 선물이 없다.
생물은 다양한 구성요소 중에 하나라도 0이 되면 망한다. 모닥불을 지피는 연료와 산소와 온도 중에 하나라도 0이 되면 불이 꺼진다. 모닥불은 가열된 나무에서 빠져나온 목탄가스가 공기 중의 산소와 연소반응을 일으키므로 온도가 내려가면 안 된다. 생물은 환경과 생애주기와 신체 사이즈 등 여러 요소가 연결된다. 하나라도 나쁘면 죽는다.
컨베이어 벨트의 라인스톱과 같다. 여러 공정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컨베이어 벨트를 후진시키는 일은 없다. 진화에 방향성이 있는 이유는 신체가 하나의 동력원에 연동된 일종의 컨베이어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큰 게 유리하므로 종은 일단 커진다. 큰 신체가 성적 성숙을 의미하므로 더 많은 짝짓기 기회를 가진다. 신체가 커지면 큰 동물을 노리는 포식자에 의해 새로운 균형이 맞추어진다. 커지기는 쉬워도 작아지기는 어렵다. 작아지기보다는 죽는 길을 선택한다. 한 방향으로 균형점이 이동하여 허들이 계속 높아지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했더니 반 평균이 올라가서 석차는 그대로다. 특히 사피엔스는 환경에 적응하여 크게 유리해졌는데 인구 증가로 다시 허들이 높아져 버렸다.
나무가 생장점을 가지 끝으로 밀고 가듯이 종은 균형점을 끝단으로 밀고 간다. 기업이 환경이 좋으면 생산량을 늘리고 환경이 나쁘면 생산량을 줄이는 게 아니라 파산한다. 제품이 닳으면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폐기하고 신제품을 산다. 그게 더 싸게 먹힌다. 신제품은 한 방향으로 조립라인이 돌아가지만, 구제품은 분해해야 하므로 두 방향이다.
생육환경이 좋지 않으면 나무가 크기를 줄이면 되잖아. 그런 일은 없다. 문어가 제 살 뜯어 먹는 일은 있지만 말이다. 동물이 굶주리면 자기 피를 빼 먹고 산다든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우주의 보편 원리다.
부분적인 축소는 있다. 나무가 가을에 낙엽을 떨구는 것과 같다. 구근이 있는 식물은 겨울에 잎을 버리고 구근 속으로 숨는다. 어느 정도는 양방향의 조절이 있다. 그러나 물가가 오를 때는 신나게 오르지만, 물가가 내릴 때는 0원 이하로 가격을 내릴 수 없으므로 차라리 공장문을 닫아버린다. 경품이 일종의 마이너스 가격이라고 볼 수는 있다.
에너지는 선 입력 후 출력이다. 반드시 경로가 있고 순서가 있다. 동력을 연결하는 회로가 있다. 먼저 밥을 먹고 나중에 요리할 수 없듯이 이 순서는 뒤집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대칭은 양방향으로 조절되는데 둘 이상 연결하는 순간 그게 안 된다. 천칭 저울은 추를 늘릴 수도 있고 계량하는 물체를 늘릴 수도 있다. 천칭은 양방향으로 조절되지만, 심장이 내보낸 피를 도로 빨아들이는 일은 없다. 인체는 여러 공정이 하나의 모터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자기 집 뒷마당에서는 후진해도 되는데 고속도로에서는 후진이 안 되는 것과 같다. 기차가 후진하면 대형 사고가 난다. 여럿이 갈 때는 줄을 맞춰서 가야 한다.
양방향 조절은 인간이 개입한 것이다. 자체 동력을 가지고 내부에서 조절하는 것은 일방향으로만 조절할 수 있다. 조절자가 집 안에 있다면 집 밖으로 밀어낼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일방향성을 가진다. 대칭의 코어 때문이다. 코어가 대칭을 밀어낼 수는 있는 데 그 반대는 없다. 대칭된 둘의 간격을 넓힐 수는 있어도 좁힐 수는 없다. 자연에 미는 힘은 있는데 당기는 힘은 없다. 당기는 힘은 미는 힘이 꼬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척력이 있을 뿐이다. 줄다리기해도 실제로는 발로 땅을 밀고 있다. 모든 인력에는 줄다리기처럼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다.
피그미가 작아진 이유
자연선택설은 이동설과 충돌한다. 자연이 선택하려면 동물의 이동이 차단되어야 한다. 가둬놓고 선택하는 것이다. 철새는 자연이 선택하기 전에 계절 따라 맞는 자연을 선택한다. 자연선택은 종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핀치새의 다양한 부리는 이동이 차단된 섬에서 관찰된다. 섬의 특수성이 작용한 경우다.
피그미가 잘 먹지 못해서 작아졌다는 설은 쉽게 부정된다. 주변의 다른 부족도 못 먹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신장이 정글에서 활동하기 좋기 때문에 작아졌다는 설이 다수설이다. 거짓말이다. 피그미는 원래 정글에 살지 않았다. 사막에 사는 코이산족도 키가 작다. 피그미는 키가 큰 부족에 쫓겨 정글로 도망친 것이며, 코이산족도 신체적 불리함 때문에 사막으로 밀려난 것이다. 자연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종이 비어 있는 생태적 지위로 떠밀리는 것이다.
피그미가 작은 이유는 밸런스 때문이다. 피그미는 키만 작은 게 아니다. 9살에 결혼하고 20살에 노인 대접을 받고 40살에 죽는다. 생애주기의 밸런스가 전반적으로 짧게 맞추어진 것이다. 호르몬이 그렇게 나온다. 피그미의 키가 커지려면 생애주기도 느려져야 하는데 변이의 비가역성 때문에 밸런스의 조절이 쉽지 않다.
유전자를 조사해보니 두 피그미 부족이 전혀 다른 돌연변이에 의해 키가 작아졌음이 밝혀졌다. 커지거나 작아질 확률은 유전자에 의해 언제든지 담보되어 있다. 키가 커지는 쪽으로 진화가 많이 일어났다. 키가 큰 편이 성장, 임신, 출산, 육아의 생애주기에 따른 밸런스 조절이 쉽기 때문이다. 자연은 하기 쉬운 것을 한다.
자연선택설 – 우연히 환경과 맞는 것이 살아남는다.
상호작용 방향설 – 환경, 신체, 생애주기, 본능의 밸런스가 맞을 때까지 변이를 생산한다.
작은 개는 오소리, 여우, 토끼의 굴에 기준을 맞추고 큰 개는 사슴을 쫓는 스피드에 기준을 맞춘다. 생태적 공백이 발생하면 공백을 메우는 쪽으로 변이를 일으켜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인간의 뇌가 작아진 이유
인류의 뇌는 수만 년 전부터 작아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극대기에 비해 140CC나 작아졌다고 한다. 인간의 뇌가 작아지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인간의 자기 가축화 가설이 유력하다. 소련 과학자가 여우로 실험한 결과 여우의 가축화 유전자가 머리통을 작게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도 가축화되면서 머리가 작아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3천 년 전부터 뇌가 작아지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3천 년 전부터 인류의 뇌가 작아지기 시작했다면 문명인과 접촉이 없는 안다만 제도의 부족민은 평균보다 뇌가 클 것이다. 이건 쉽게 검증할 수 있는 문제인데 조용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지만 구조론은 밸런스에 주목한다. 모듈 진화론이다. 머리통이 작고 턱이 짧은 것이 더 고도화된 문명과 밸런스가 맞다. 치아를 도구로 쓰려면 치악력이 강해야 한다. 사랑니가 퇴화하는 것이 치악력의 증대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치아를 펜치로 쓰려면 지렛대 받침점과 힘점의 거리가 짧아야 하므로 짧은 턱이 유리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화에 방향성이 있다는 거다. 큰 쪽으로 방향을 정하면 계속 커지고 작아지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면 계속 작아진다. 자연선택설이 맞는다면 자연환경이 다르므로 도시는 뇌가 작아지고 시골은 뇌가 커진다거나, 아시아인은 작아지고 인디언은 커진다거나, 유럽인은 개미가 되고 아프리카인은 코끼리가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중구난방이 된다. 날씨와 위도에 따라 자연환경이 다르고 산업이 발전한 정도에 따라 인공환경이 다르므로 뇌 크기가 제각각이 된다. 모든 인류가 일제히 커지거나 작아졌다면 DNA와 관련된 내재적인 이유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는 과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슬프다.
자연선택을 주장한다면 수렴진화, 생태적 지위, 선택압과 같이 방향성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들은 구조론에서 주장하는 상호작용의 조절 메커니즘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은 탁구와 같다. 상대방이 탁구대에 바싹 붙어서 치면 자신도 붙어서 쳐야 한다. 상대방이 멀리서 세게 치면 자신도 뒤로 물러나서 받아야 한다.
인간의 뇌가 커지거나 혹은 작아진다는 것은 스포츠 경기의 종목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축구선수는 허벅지가 굵고 수영선수는 팔이 굵다. 환경과 인간의 DNA가 핑퐁 게임을 하면 작아지거나 커지거나 둘 중에 하나이지 중간이 없다.
인간의 뇌가 커진 이유
3 만 년 전부터 인류의 뇌가 작아졌다고 하지만 그전까지는 커졌다. 보통은 뇌가 커지는 이유를 지능과 연결한다. 그러나 호빗족은 뇌 용적이 적은데도 당당하게 생활했다. 까마귀는 뇌가 콩알만 하지만 문제해결 능력은 세 살 아기보다 낫다. 지능은 뇌 용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요소일 뿐 절대적이지 않다. 고래나 코끼리의 뇌가 커서 지능이 높은 것은 아니다.
영장류의 뇌가 커진 이유는 밸런스 때문이다. 인간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밸런스가 깨진 것이며 새로운 밸런스를 찾아낼 때까지 변이는 대량생산 된다. 의외로 짧은 시간에 대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밸런스는 하나가 바뀌면 서로 연동되어 여럿이 한꺼번에 바뀌기 때문이다. 모듈 진화를 하는 것이다. 유전자 시스템 안에 밸런스를 조절하는 장치가 있다.
환경과의 밸런스 .. 손과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는데 다양한 지능이 필요했다.
생애주기 밸런스 .. 생애 주기가 느려질수록 다양한 학습이 필요했다.
신체구조 밸런스 .. 오래달리기에 맞는 두개골의 균형이 필요했다.
집단과의 밸런스 .. 사회생활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발달했다.
짝짓기의 밸런스 .. 균형 있게 생긴 사람이 짝짓기에 성공했다.
두개골의 크기는 지능보다 다양성이 중요하다. 뇌가 콩알만 해도 아이큐는 높을 수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획득하려면 일단 용적이 커야 한다. 뇌가 커져서 문제해결 능력이 늘어난 게 아니고 공부하는 과목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환경과의 밸런스, 신체 내부 밸런스, 집단과의 밸런스, 생애주기 밸런스, 짝짓기의 밸런스를 모두 맞추려면 뇌 용적이 커지는 편이 유리하다. 뇌 내부의 밸런스 때문이다. 뭐든 공간의 사이즈를 키우는 게 밸런스 조절이 쉽다. 집이 커야 식구들 사이가 좋아진다. 어린이의 신발을 살 때는 조금 큰 것을 산다. 신발에 맞춰 사람 발 크기를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뇌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뇌의 주된 역할은 신체의 관리다. 뇌의 여러 부위는 담당이 정해져 있다. 인간이 손과 도구와 언어를 사용하면서 새로 추가된 기능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할당되어야 한다. 기득권이 방해한다. 장기와 조직과 눈코입귀와 피부를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구조조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장기를 담당하는 뇌 부위의 기능을 빼앗고 새로 도입된 언어기능을 할당할 수는 없다. 뇌의 크기를 줄여서 밸런스를 맞출 수 없으므로 커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커질 때마다 허들이 높아져서 더 커져야 했다. 사회도 그렇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모두 해결하다 보면 결국 물가가 올라가 있다. 시장의 모든 압력이 그쪽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불만을 해결하면 원래 불만이 없던 사람까지 불만을 터뜨린다. 균형점이 이동하여 갈수록 허들이 높아진다. 진보할수록 진보가 어려워진다.
뇌가 작으면 턱이 돌출해서 머리가 앞으로 숙여지므로 그만큼 목이 굵어져서 주변을 살피기 어렵고 밸런스가 맞지 않아 오래 걷지 못한다. 고릴라의 굵은 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은 뇌는 머리가 앞뒤로 흔들려서 달리기에 불리다. 사피엔스의 특별한 장점은 지구력에 있다. 지구력의 발달에 맞게 신체의 다른 부분이 일제히 조정된 것이며 뇌도 그중 하나다.
19세기에 영국인들이 가발을 쓰고 다닌 이유는 머리가 작으면 열등해 보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머리가 큰 사람이 인기가 있었다. 원시시대에는 머리가 큰 사람이 성숙해 보여서 짝짓기에 유리했을 수도 있다. 큰 머리가 더 생존에 유리하고, 사회생활을 잘하고, 짝짓기를 잘하고, 신체 밸런스가 잘 맞고, 생애주기가 느려지는 경향과도 맞는 것이다.
원숭이는 나무에 매달리므로 팔의 힘이 세다. 염소는 태어나자마자 걷는다. 반면 강아지는 개굴 속에서 2주 동안 눈을 뜨지 못한다. 눈을 뜨면 굴 밖으로 나갔다가 포식자를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 치타는 머리가 작고 사자는 머리가 크다. 치타는 속도 중심으로 밸런스를 맞추었고 사자는 체중으로 사슴을 제압\했다. 인간은 사헬 지대에서 지구력으로 대결한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이유
학생 때 교과서에서 기린 그림을 보고 크게 위화감을 느꼈다. 목이 짧은 기린은 풀을 먹으면 되잖아. 풀이 없으면 이동하면 되잖아. 말은 목이 짧은데도 왜 멸종하지 않았지? 초딩이 봐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이건 과학계의 수준 낮음을 들킨 것이다. 학계가 시스템을 가지고 이렇게밖에 못 하나? 성의가 없잖아. 진지하지 않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사바나는 가만 놔두면 아카시아 종류가 빽빽하게 자라서 정글이 된다. 정글은 동물이 살기 어렵다. 정글을 녹색 사막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관목숲은 동물의 이동을 방해하여 건기에 굶주리게 한다. 시력이 나쁜 얼룩말은 관목숲에 갇혀서 길을 찾지 못한다. 키가 작은 동물은 들불이 사바나를 휩쓸고 간 후 일제히 이동하여 어린 새순을 먹어야 한다.
코끼리 부대가 선발대가 된다. 관목을 짓밟아 정글에 길을 연다. 다음 기린부대가 나뭇잎을 먹어 치워 나무의 키와 숫자를 조절한다. 시력이 나쁜 얼룩말 부대는 일제히 기린의 뒤를 따라간다. 그다음 누 떼가 지나가며 갈댓잎의 부드러운 윗부분을 잘라먹는다. 키가 작은 스프링벅, 워터벅 차례는 마지막이다. 키 순서대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나뭇잎을 먹는 기린은 이동하지 않아도 되지만 키가 작은 동물은 건기에 이동해야 한다. 동물은 이동할 때가 취약하다. 맹수들은 길목을 차지하고 지나가는 동물을 저격한다. 대이동을 하려면 충분한 쪽수를 만들어야 한다. 누 떼는 수백만 마리가 이동한다. 기린의 딜레마다. 풀을 먹으며 몰려 다니면 쪽수를 만들 수 있지만 나뭇잎을 먹으면 흩어져서 쪽수가 안 된다. 수만 마리의 기린이 떼 지어 이동하며 일제히 나무를 조진다면? 대규모 환경파괴가 일어나서 사막화된다.
목이 짧은 기린은 키가 작은 나무의 잎을 먹다가 관목 숲에 숨은 포식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수가 있다. 기린은 7킬로까지 볼 수 있다. 뛰어난 시력으로 사자를 발견하려면 나무보다 키가 커야 한다. 관목을 죽여야 한다. 사헬 지대가 말라붙었을 때 다른 동물은 무리 지어 이동하는 길을 선택했고 기린은 뿔뿔이 흩어져 키를 높이는 길을 선택했다.
들어가기는 쉽고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공간이 있다고 치자.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는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동굴 물고기와 같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는데 동굴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어떤 생태적 지위가 비어 있다면 종은 그쪽으로 떠밀리는 힘을 받는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신도림역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빈 곳으로 떠밀린다.
기린은 관목을 죽이고 나무 숫자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지점의 생태적 지위가 비어 있었고 그쪽으로 떠밀린 것이다. 달리기 실력을 연마하여 이동하는 대신 키를 키워서 잎을 먹었다. 기린이 키를 낮추고 풀을 먹으며 무리 지어 이동하는 기술을 쓸 수도 있지만 그쪽은 이미 경쟁이 치열하다. 누 떼와 얼룩말과 들소와 영양이 선점해 버렸다.
기린은 목만 길어진 게 아니고 생태적 지위에 맞게 여러 가지가 최적화되었다. 신체뿐 아니라 본능도 같이 변해야 한다. 산발적인 변이는 의미 없다. 전략과 맞고 방향과 맞고 생태적 지위를 찾아가는 변이만 유효하다.
남자의 선택
남자가 예쁜 여자를 선택했다는 생각은 남성우월주의 편견에 불과하다. 입술 접시를 사용하는 무르시족은 그게 뭐가 예쁘다는 말인가? 목을 길게 늘이는 카렌족은 그게 뭐가 예쁘다는 말인가? 문화권에 따라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은 부족민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다. 그게 인종주의 편견이다.
부족민은 대부분 흉측한 문신을 하고 있다. 문신은 부족을 구별하는 표지다. 다른 부족원은 보는 즉시 죽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성적 표지와 같다. 이종 간 짝짓기하거나, 동성 간 짝짓기 혹은 미성숙한 개체와 짝짓기를 하면 곤란하므로 표지를 사용한다. 부족민의 다양한 관습도 일종의 표지다.
예뻐서 선택된다면 흑인은 멸종했을 것이다. 남자도 멸종했을 것이다. 예쁜 것을 밝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남자는 많은 씨앗을 퍼뜨리는 데 관심이 있을 뿐 결혼제도가 생기기까지 여성의 미모에 관심이 없었다. 고릴라나 침팬지는 암컷의 미모에 관심이 없는데 사람은 특별히 관심이 있다는 게 이상하다. 짝짓기는 냄새로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부족민은 원래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의 역사는 사유재산의 역사와 같다. 남자가 여성의 미모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부일처 결혼제도가 생긴 이후다. 씨족사회에서 남자와 교류하는 주변 여자는 거의 근친이라서 여자로 보지 않는다. 씨족 단위가 작으므로 근친혼을 피하여 족외혼을 하는데 대개 습격의 형태라서 얼굴을 보지 않는다.
본질은 권력이다. 모계사회는 많은 남성의 숭배를 받는 예쁜 여자가 권력을 가진다. 여자가 예쁜 이유는 부족원에게 숭배받는 여자가 많은 자녀를 낳았기 때문이다. 여자도 예쁜 여자를 숭배하므로 모계 집단 내부에 서열이 만들어진다. 모계사회에서는 많은 자녀를 두는 것도 권력을 쥐는 방법이다.
무르시족의 입술 접시는 권력적 장치다. 젊은 여성은 큰 접시를 사용할 수 없다. 입술이 늘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접시 크기로 서열이 정해지고 집단 내부에 의사결정 구조가 정착된다. 카렌족의 목늘이기도 마찬가지다. 목이 긴 사람은 미인이 아니고, 할머니다. 집단의 결속이 본질이다.
동물은 냄새로 건강 여부를 판단한다. 수컷에게서 건강한 냄새가 나면 짝짓기한다. 인간 아기는 체취로 엄마를 유혹한다. 침팬지는 4년마다 새끼를 낳는데 인간은 매년 아기를 낳는다. 침팬지라면 어미가 죽어도 새끼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성장 사이클이 유독 느리다. 네 살 먹은 침팬지는 혼자 정글을 날아다니지만, 네살 먹은 아기는 입양되어야 한다. 아기는 귀여워야 입양될 수 있다. 여자 족장은 입양을 통해 자기 세력을 유지한다. 아기의 귀여움과 여성의 미모는 입양과 보육을 돕는 장치다. 귀여움과 미모는 부족을 결속하는 장치다.
사람들은 진돗개가 주인에게 충성한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개가 사람에게 충성한다면 그게 일종의 정신병이다.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사람에 의존한다면 이미 망가져 있다. 야생 환경이라면 늙고 병든 두목 개는 냉정하게 버린다. 개가 주인을 따르는 것은 집단의 세력이 약해질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유튜버 올리버 쌤이 키우는 진돗개 왕자와 공주는 두목인 올리버보다 부인과 딸을 더 챙긴다. 왜 개가 서열이 낮은 아기에게 충성하지? 집단의 결속을 추구하고 세력의 약화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세력이 커지면 동네 개가 되어 주인을 무시한다.
여자는 미모가 권력이고, 남자는 사냥 능력이 권력이고, 아기는 귀여움이 권력이고, 현대사회는 돈이 권력이다. 종교를 믿는 이유도 부족의 결속을 얻으려는 것이다. 본질은 집단의 의사결정 구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에 머무르려는 것이다. 상호작용이 긴밀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은 내가 올바른 길을 가는데 왜 무리가 따르지 않느냐고 대중을 오해한다. 급기야 대중혐오로 가면 진중권 병이다.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한 방향으로 가는 구조를 끌어내면 말 안 해도 대중이 지식인을 따른다.
사람이 예뻐질 때는 뺨과 가슴과 엉덩이가 동시에 예뻐진다. 호르몬이 미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뺨만 예쁘거나 가슴만 예쁜 사피엔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다. 이러한 특징은 동물에게도 관찰된다. 까부는 아기가 있는 것처럼 까부는 새끼 염소도 있고 까부는 망아지도 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특징은 동물에게도 똑같이 관찰된다. 그것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세팅된 것이다.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낙타는 등에 지방을 저장하고 사람은 엉덩이에 지방을 저장한다. 낙타는 건조한 사막에 적응한 동물이고 인간은 반건조 사막인 사헬 지대에 적응한 동물이다. 낙타는 한 달 동안 물을 먹지 않고 견딘다. 코이산족이 이동할 때는 한 달을 굶는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시킬 물이 필요하므로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겨울잠을 자는 유전자가 남아 있다. 겨울 동안 잠만 자고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인디언 부족이 있었는데 겨울에도 음식을 먹게 되자 주민의 반이 당뇨병에 걸렸다고 한다. 곰도 동물원에서 키우면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믿는 게 사실은 환경에 따라 기능이 잠복하거나 발현된 것이다. 그것을 조절하고 격발하는 장치가 DNA에 숨어 있다.
진화의 전략
선택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선택은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이다. 유전자나 호르몬은 실제로 있다. DNA는 실물이 있다. 선택은 결과다. 결과론은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일종의 말장난이다. 눈에 보이는 원인을 제시해야 한다. 유전자든 호르몬이든 현미경에 보이는 입자를 들고 와야 한다.
개미는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할까? 개미가 이타적이라는 근거는? 호르몬으로 보면 여왕개미와 일개미는 동일체다. 이기심도 없고 이타심도 없다. 이기나 이타는 인간들의 관념일 뿐 자연에 없다. 무엇을 선택한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이타적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과학의 언어가 아닌 것을 들고나오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은 오해를 부르는 레토릭이다. 책은 팔리겠지만. 자연은 이기심이 없다. 대신 의사결정 단위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고 한다'는 식의 표현은 문학가의 언어이지 과학가의 언어가 아니다. 현미경에 보이는 물질을 제시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이지 특별히 유전자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결과론이다. 결과론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원인론이다.
왜 한국인들은 미친 듯이 멸종을 향해 달려갈까? 유전자를 남겨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를 남기려 한다는 이론이 왜 한국인에게는 맞지 않을까? 애초에 개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개체가 의사결정 단위라는 말이고 이타적이라는 말은 집단이 의사결정 단위라는 말이다. 인간은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다. 의사결정 단위는 실제로 있다. 있는 게 원인이다.
개체가 계속 살아있으면 생태계에 좋지 않다. 대나무는 9년이 지나면 에너지 효율이 마이너스가 된다고 한다. 9년이 지난 대나무는 베는게 낫다. 대숲이 전체적으로 늙으면 일제히 꽃을 피우고 죽는다. 그 주기가 보통은 50년이다. 에너지 효율의 한계다. 이걸 빌미로 산림청이 대량으로 벌목하다가 오마이뉴스에 씹혔다.
개는 왜 15살밖에 못 사는가? 왜 대부분의 동물이 빨리 죽는가? 이기적 유전자가 있다면 천살 만살 사는 게 맞다. 자연선택이고, 적자선택이고, 성선택이고 간에 모든 선택은 허튼소리다. 그것은 애초에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원인은 언제나 입자 형태이고 입자는 밸런스다. 그것은 유전자와 호르몬이다. 메커니즘이 입자다.
넙치의 유생
넙치는 진화의 중간단계 화석이 없어 오랫동안 학자들이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 다윈도 당황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로 접근했다고. 근래 중간단계 화석이 발견되어 문제가 정리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하다.
넙치는 눈만 틀어진 것이 아니라 사냥법이 바뀐 것이다. 신체와 본능이 함께 변하는 게 모듈 진화다. 추적 사냥이냐 매복 사냥이냐. 플랑크톤을 먹느냐, 물고기를 먹느냐다. 플랑크톤 먹는 넙치 유생은 추적 사냥을 하는데 성체로 자라면 매복 사냥으로 사냥법이 바뀌고 자신에게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물고기는 유생과 성체의 생태적 지위가 다를 수 있다.
포유동물은 많은 변화가 어미의 자궁 속에서 일어나고 물고기는 자궁이 없으므로 유생 단계를 거친다. 벌레가 고치 속에서 변태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인간의 자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이상하다. 사실 인간은 여전히 어류이고 어미의 자궁은 물속과 같다는 말도 있다. 인간도 자궁 속에서 거의 원숭이가 되었다가 사람으로 바뀐다. 인간에게는 아직도 물고기 시절의 아가미 흔적이 남아있는데 인류의 5%가 가진 이루공이 그것이라고 한다. 아기는 손에 무엇을 쥐여주면 본능적으로 매달린다. 이는 원숭이 행동이다. 갓난아기는 헤엄을 잘 치는데 물고기 시절의 영향이 남은 것이다. 피부가 물을 느끼면 조건반사로 입을 다물고 호흡을 멈추고 헤엄을 친다. 태아는 원숭이처럼 꼬리뼈를 움직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넙치보다 인간이 더 이상하다.
틀린 판단 - 돌연변이에 의해 눈이 조금씩 돌아간 개체가 살아남았다.
바른 해석 -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가도록 변이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다.
틀린 판단 - 우연히 변이가 일어나서 얼룩소와 얼룩 염소와 얼룩 고양이와 얼룩 바둑이와 얼룩 인간이 살아남았다.
바른 해석 - 협력 전략을 따르면 눈에 잘 띄게 하는 얼룩이 세트로 따라온다.
열성 유전자는 생존확률이 낮아 자연에서 쉽게 활성화되지 않는다. 인간의 손을 타면서 열성인자가 활성화된다. 금발과 빨간 머리가 말하자면 얼룩 인간이다. 금붕어나 닭도 인간의 손을 타서 얼룩 금붕어와 얼룩 닭이 있다.
유전자는 외부 환경을 모른다. 일정한 확률로 정탐을 보내서 외부의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진화로 이어지는 변이는 원래 일정 비율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연에 의한 변이는 대부분 기형을 유발하므로 태아 단계에서 죽는다.
보호색.. 잘 안 보이게 하는 위장 색
경계색.. 독이 있음을 나타내는 강조 색
짝짓기색.. 암컷의 이목을 끄는 색
입양색.. 눈에 잘 띄는 얼룩이 색.
늑대는 원래 일정 비율로 성격이 온순해지는 열성인자가 있고 세트로 붙어가는 얼룩 유전자가 있다. 늑대가 온순하면 야생 환경에 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얼룩을 강조하여 사람 눈에 잘 띄게 하여 사람에게 입양되어야 한다. 다수의 종에서 관찰되는 얼룩이를 만드는 유전자는 환경변화에 대비하여 생태적 지위를 찾아내는 정찰대다.
넙치는 고등어처럼 빠르게 추적할 것이냐 아니면 조용히 모랫바닥에 숨을 것이냐로 전략을 선택해야 했고 매복전략을 선택했다. 그쪽으로 밸런스의 추가 기울었다. 매복전략을 선택하는 순간 눈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유전자가 활성화된다. 전략이라는 표현은 변이가 모듈 단위로 연동되어 일어난다는 말이다. 하나가 변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일제히 변한다. 그러므로 자연선택이 아니다. 종은 미래의 환경변화에 대비하여 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낼 때까지 계획적으로 변이를 일으킨다.
돌연변이가 아니라 계획변이다. 생태적 지위를 찾아내기 위한 정찰대 파견이다. 환경이 변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르몬이 나오고 호르몬이 나오면 변이를 일으킬 확률이 증가하는 식으로 생태적 지위를 찾아가는 계획변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있을 수 있다. 혹은 환경이 변하면 포식자가 없으므로 열성인자가 활성화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