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월의 시골은 허허벌판이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겨울의 끝을 알릴 뿐, 초록은 흔한 색이 아니다.
가끔 보이는 조그만 잡초와 토끼풀 정도…. 그리고 쑥….
부는 바람은 분명 꽁꽁 겨울바람인데 봄 소풍이라니.
언제부터였지? 이곳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시작한 지가.
준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연화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부터, 어머니의 취미인 각종 나물 캐기에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례행사인 봄 소풍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습한 곳에 가면 좀 있으려나…. 여기저기 냉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은 30분만 하니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다.
하지만 멀리 두 모녀는 엄청난 속도로 냉이를 삽으로 캐고 있었다.
이 마을의 냉이를 다 뿌리 뽑을 계획인가?. 벌써 한 포대다. !
”오빠! 힘들지 않아? “
멀리서 연화는 준영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뜨개 모자를 쓴 연화는 귀까지 감싸 눈만 똥그라니 보인다.….
허허벌판에 있는 깡충대는 토끼.
처음 봤을 때 마르고 윤기 없고 메말라,
잡으면 부스러질 것 같던 그 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추위 때문인데 복숭아색의 빰은 보기만 해도 탐스럽다. 추운지 콧물이 조금 맺혀있다.
준영은 연화에게 손수건을 건네줬다.
” 콧물이나 닦아요. 토끼 씨“
연화는 많이 먹어 키가 쑥쑥 자라 이제는 준영의 턱밑까지 왔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까만 속 눈썹을 깜박이는데 요즘 이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지고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오늘은 내가 반드시 냉이 캐기 일등이다.“
준영은 저도 모르게 뇌 속을 거치지 않는 헛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오…. 우리 거북님! 느릿느릿하면서 야심은 크네!
그나저나 배 안 고파? 나 배고픈데 점심 먹고 할까? “
” 좋지! 엄마 부를까? “
준영은 미소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쪽으로 가신 거 같던데….“
” 그래? 내가 모셔올게! 저기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돗자리 펴고 먹자“
준영은 자주 와서 익숙해진,
허허벌판 끄트머리, 마을이 시작되는 곳의 500년 된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준비해 놓고 있을게“
”응! 얼른 엄마 모시고 올게,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
” 오빠 좋아하는 두부, 달래 밥과 어묵탕! “
”뭐야? 고기를 넣어야지. 담엔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가득한 김밥으로 부탁해! 연화야“
” 좋아! 그럼 오늘 우리 장에서 냉이 팔아서 저녁에 고기 사 먹을까? “
기대에 찬 연화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 그것도 좋지. 근데 오늘 날씨 정말 좋네. 바람만 안 불면 따뜻하고“
”그러게. 봄이 오는 것 같아“
준영은 어느 순간인가 연화의 손을 바라보았다. 추워서 그런지 손가락이 빨갛게 보인다.
”장갑 안 끼고 냉이 캤어?
준영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연화의 손을 잡아 자신의 두 손을 비비며 호호 불어주었다.
“아…. 불편해서”
“안돼. 너 그러다 다시 손가락 아프다. 얼른 껴”
“네네…. 거북님. 어서 어머님이나 모시고 오시죠!
연화는 웃으며 준영이 잡고 있던 손을 은근슬쩍 뺐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방향으로 준영의 등을 밀었다. 아쉬운 듯 준영은 발걸음을 옮겼다.
준영은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다 토끼풀을 발견했다. 네 잎 클로버다.
허리를 숙여 네 잎 클로버를 뽑으려다 그만두었다.
” 엄마! 점심 먹어요. 연화가 배고프데요. “
” 벌써 점심시간이야?
“ 네. 연화 배꼽시계는 정확하니까요”
“ 그래! 가자”
영옥은 일어나려 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준영은 엄마의 어깨를 잡으며,
“오늘은 그만하죠? 인간적으로다가.어머니? 응? ”
“너 고기 먹고 싶다며? ”
“ 그건 어떻게?”
“ 다 들려! 한 포대 더 캐!
준영은 이 지독한 모녀에게서 고기 얻어먹기가 얼마나 힘들지를 깨달으며, 점심을 먹으러 연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매년 오는 겨울이고, 끝나는 겨울이지만
겨울만 오면 연화와 처음 만난 그 겨울이 준영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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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하얀 눈이 설탕 가루처럼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면 환상적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걸어갔다.
설탕 가루 같은 눈은 하얀 솜털로 바뀌었고 땅에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눈이 좀 더 쌓이길 기다렸다가 눈사람을 만들 생각에 한참을 설레며 동동거렸다.
그 설렘을 참지 못하고 눈싸움을 하는 아이도 있었고, 눈밭 위에서 뒹굴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건조해서 눈이 거의 오지 않은 해였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하얀 눈을 소리 없이 내려 발목까지 쌓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발을 묶었다.
뉴스에서는 폭설 주의보가 떴다.
길이 막히고 도로에는 자동차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교통지옥이 되었다.
준영의 눈에는 어머니가 오늘따라 불안해 보였다.
옆집에 살던 조그마한 여자아이 연화가 걱정되어서 그렇겠지?
연립주택 지하 옆집에 두 달 전 이사 온 연화의 엄마는 자주 집을 비우곤 했다.
어린 연화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혼자 집에 있거나 문밖에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사실 문이 잠겨 있어서 연화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엄마가 깜박하고 문을 잠그지 않을 때만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기온은 영하 20도로 내려가 있었고,
만약 집에 문이 열려있지 않다면, 연화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어린 준영은 어머니의 반찬가게가 끝나고 돌아가면, 여섯 살 연화는 지하실 집 문 앞에 항상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울거나 때를 부리지도 않았다.
”연화야. 안녕! 엄마 기다리고 있니?
아줌마는 배가 너무 고파서 배랑 등이 붙었단다.
배가 너무너무 고파!
괜찮으면 아줌마 집에 가서 같이 밥 먹을까?
연화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눈이 영옥을 보며 빛을 냈다.
“정말이요? ”
“그럼. 준영이 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들어가자! ”
준영은 앉아 있는 연화의 차갑고 작은 손을 붙잡아 일으켜 자신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하곤 했다.
눈이 온 그날은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어린 준영도 어머니를 도울 만큼 바빴다. 밖에 눈이 온다는 걸 깨달은 건 손님을 통해 듣고 나서였다.
영옥은 계속 바쁜 와중에도 눈이 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 순간인가 9시가 되어있었다.
보통은 7시에 가게 문을 닫는데 가게의 모든 음식을 다 팔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드는 생각이 드는 잠시, 연화가 걱정되었다.
‘연화의 엄마는 돌아왔을까?’
‘눈이 많이 왔으니 집에 돌아와 있겠지…. ’ 영옥은 불안한 맘을 스스로 달랬다.
영옥은 얼른 가게를 마감하고, 발목까지 오는 눈을 밟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떼며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하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어린 준영은 무릎까지 온 눈이 좋아 눈을 만지며 좋아했지만, 금세 손이 시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버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스치는 바람에 귀가 따갑도록 시렸다.
어떻게 집으로 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영옥은 준영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은 그녀의 걸음을 더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그 시간 연화는 자신의 지하 집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온몸에 감싸는 추위는 입이 달달 떨려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이빨을 안 부딪치려고 힘을 줘 한참을 입을 꽉 깨물고 있던 그녀는, 손가락에서 뭔지 모를 통증이 밀려왔다. 발가락에서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춥다. 나도 따뜻한 장갑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
연화는 차가운 문에 몸을 기대고 혼잣말을 했다.
통증이 밀려오는 손가락 색깔이 이상하게 보인다. 어두워서 그러나?
천장 위도 깜박이는 형광등을 보며 연화는 아줌마가 언제 오나 궁금해졌다.
‘오늘은 아줌마도 늦으시네.
눈이 많이 와서 그러나? 얼른 오세요.
연화! 아줌마 보고 싶어요’
연화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지하로 들어오는 문 쪽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연화는 일어나 문 쪽 계단으로 갔다.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안 보였다.
깨끗하고 하얀 눈을 보며 연화는 왠지 무섭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아주머니가 오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으면 어떡하지?
천천히 걷고 있는 발은 통증과 둔감한 기운이 들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까만색 허름한 바지와 얇은 잠바는 추위를 전혀을 막지 못했다.
‘빨리 이 겨울이 갔으면 좋겠다.’
지하 계단 끝 벽 쪽에 앉아 연화는 자신의 엄마가 아닌, 준영의 엄마 영옥을 기다렸다.
지하실 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를 꽉 깨물고 아줌마가 오면 놓치지 않고 함께 따뜻한 준영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은 그녀를 지치게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준영의 엄마는 오지 않았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연화는 힘이 없었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
그녀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다시 한번 소리를 내었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밤 지하실 문 앞 계단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준영의 엄마가 눈길을 헤치고 지하의 문을 열어 그녀를 발견했을 땐,
연화는 일어나지 못했다.
연화는 파랗게 얼어있는, 마치 인형처럼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얼어버린 아이의 이름을 불러도 보고, 안아서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음에 손과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연화의 두 볼과 비비며, 차가운 연화의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넣으며 울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이 아이가 아프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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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먹어봐! 연화야 ”
어린 준영은 장조림 속에 있는 메추리 알을 연화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우와…. 너무 맛있어.”
연화는 조그만 입으로 준영이 올려준 반찬에 밥을 가득 퍼서 냠냠 야무지게 먹었다. 벌써 두 그릇째다.
“채소도 먹어야지, 오이도 먹고 당근도 된장에 찍어 먹어봐”
“응! 오빠”
우걱우걱 조그마한 입에서 오물오물하는
연화의 모습은 당근을 먹는 토끼 같다.
병원에서보다는 살이 붙은 듯하다.
“오빠. 당근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
“근데…. 연화 밥은 잘 먹는데 왜 얼굴이 해골 같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준영은 다짐하듯 연화의 눈을 봤다.
”우리 집 반찬가게 한다…. 내 동생 되면 맛있는 밥 매일 줄게”
“정말? ”
“정말!”
준영은 잘 먹는 연화의 모습이 보기 좋아 씩 웃었다.
웃는 오빠 모습이 좋은 건지 밥 먹고 기분이 좋은 건지 연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빠!”
“응?”
“오빠 웃으니까 너무 잘생겼어.”
"응?“
잘생겼다는 소리에 준영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 갑자기?“
” 오빠 웃으니까 거북이 닮았어?!“
”뭐? 거북이? “
”거북이 닮았어! “
잠깐! 연화야. 거북이가 잘생긴 거야? 준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거 칭찬이야? “
”거북이 이쁘잖아! “
연화의 함박웃음에 준영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거북이를 닮아 잘 생겼다는 게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하지만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히히히“
”오빠! 왜 웃어?“
”그러는 너는 당근 먹으니까 토끼 닮았다. 눈이 동그랗고 얼굴은 하얗고! “
”토끼?“
”토끼!“
” 그럼 우린 거북이와 토끼네?“
”그러네!“
” 난 토끼처럼 잘 달리지 못하는데?. “
” 그래. 책에선 거북이가 이겨. 그렇지만 연화야…. 쉬지 말고 먹어서 쑥쑥 커! 살도 찌우고!
그럼 오빠랑 하는 경주에서 꼭 이길 거야! “
” 응!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돌아오셨나 보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 그래! 준영아! 그리고 연화야“
둘이서 사이좋게 밥 먹는 모습이 보기 좋은 영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선영은 연화에게 사과를 깎아주며
“ 당분간 연화 우리 집 딸 할까?
“ 엄마! 정말? 연화 내 동생 되는 거야? ”
연화는 동그란 눈으로 영옥을 쳐다보며 신이 나는 듯 영옥의 팔을 붙잡았다.
"연화도 그럼 오빠 생기는 거예요? “
”물론이지! “
조용하던 집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지는 소리가 나자 영옥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랜만에 사람처럼 사는 집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그냥 그 순간 열심히 살기로 하자.
지금의 행복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