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퇴계원 예배소의 조직과 해산의 아픔
1955년 후반기에 최성훈 전도사가 떠나자, 퇴계원교회는 지도자의 공백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대회에서는 교회의 어려움을 빨리 수습하기 위하여 삼육신학원에서 한정선 학생전도사를 파송하였다. 1956년에 ‘퇴계원예배소’로 승격하여 조직하였으며, 예배소장으로 김순덕 의사를 세워 봉사하게 하였다. 또한 영적 갈증을 해갈할 수 있도록 1956년에 박성섭 학생전도사가 봉사하였다.
박성섭 학생전도사는 대구신학을 졸업 후, 전남 광주시 사동 그리스도 교회(현 광주 서부교회)에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다가 교회 건물과 전교인 87명이 함께 재림교로 개혁한 분이었다. 그때 같이 개혁한 분이 구연순 집사(박병규 목사 사모, 수년 전에 퇴계원교회 출석함, 구현주 집사 언니)이다. 박 목사는 연합회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중 온 가족이 교회에 살며 교회를 보살피며 지도한 후, 1957년 3월에 인동환, 전병덕과 같이 삼육신학원을 졸업하였다.
박성섭 목사의 누이 박금순은 도재필 중위(당시 춘천 부대 근무, 현 합천교회 장로)와 퇴계원교회 첫째 성전에서 문선일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여, 장남 도현석 목사를 낳았다. 박성섭 목사의 딸 박명숙은 당시 태강삼육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하여 경춘선 철길을 걸어 다녔으며, 영남합회에서 은퇴한 서정준 목사의 사모이다.
삼육신학원에서는 1957년 전반기에 류을기 학생전도사를, 후반기에는 정석우, 서옥주 학생전도사를 보내 분교 활동을 하였으며, 출석한 학생은 30명에 이르렀다. 1958년 교회지남 1월호에 중한대회 안식일학교부 주임 김선억 목사는 퇴계원교회에 대하여,‘청장년 16명, 유소년 8명, 영아와 유치 4명, 학생 도합 28명, 교인수 8명, 출석 평균 20명, 매일 공부 5명, 장년 과정책 15권, 유년 과정책 2권’으로 1957년 3기말 안식일학교부 자료에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원예배소는 지도자의 공백으로 운영에 계속 어려움을 맞았다. 1957년 10월 5일 최순희(교적 전입 10번, 김옥순의 딸, 현 제주중앙교회 출석)만이 전입하였고 1961년까지 수침자가 없었다. 결국 1958년에는 ‘예배소’를 해산하고‘퇴계원 안식일학교’로 운영되면서 계속 존속(存續)하였다. 퇴계원 안식일학교조차 어렵게 되자, 1959년부터 1960년까지 교회에 주재하는 사역자가 없이 삼육신학원으로부터 보조ㆍ유지 되는 교회가 되었다. 삼육신학원은 퇴계원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심혈을 기울여 교회 회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다.
1960년 11월에 퇴계원교회에서 40여년 동안 기둥 역할을 한 박노선(교적 5번)씨가 퇴계원에 이사를 왔다. 그는 최순희의 인도로 1961년 10월 21일에 지고석 목사로부터 삼육대학교 호수에서 침례를 받고 퇴계원교회에 입교하였다. 이 때 함께 침례를 받은 분들은 심복래(교적 3번), 박연관, 송인화, 정영순, 장귀순, 하두이(교적 7번, 12월 26일 받음, 현 퇴계원교회 출석) 등 7명이었다. 박노선 성도는 1968년 3월에 퇴계원교회에서 장로로 안수 받았다.
1961년에는 전병윤 전도사(현재 출석하는 문옥희 사모와 부부임)가 삼안리교회에 시무하면서 퇴계원교회를 지구교회로 돌보았다. 1967년에는 송권 목사의 주선으로 교회를 수리하고 전기를 가설하였다. 처음으로 전등불 밑에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으며, 마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는 것과 같이 기쁨이 충만하”여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1982년 3월 15일에는 교회에 전화를 가설하였다. 1984년 4월 15일에는 교회 창고를 교인들 힘으로 건축하였으며, 11월 30일에는 교회 자모실을 증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