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경험담>
퇴계원교회 사택 시절을 추억하며
김정순A 원로 집사
퇴계원교회가 60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귀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축복하심에 감사드리면서 1960~1980년대의 경험을 추억하며 글을 씁니다.
저는 불신자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며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때마다 ‘오직 신앙생활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가정과 적합한 배우자를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박노선 장로를 만나 1963년 12월 11일 결혼을 하고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행복도 잠시,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중한대회에서 강화도에 간척지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각 교회에서 추천받은 26가정 중 한 가정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간척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평택 바닷가로 옮겨 허허벌판에서 추운 겨울을 대형 텐트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의 간척지 사업도 망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최낙환 장로님 가정과 함께 음성군 원통산 골짜기로 입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 때까지 가정에 자녀가 없어 매일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희들에게 자녀를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하던 중, 결혼 4년 만에 아들(박일규, 광릉내교회 목사)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기이하신 섭리로 퇴계원 산 밑에 아주 초라하고 낡은 구 교회 사택으로 들어가 살게 하셨습니다. 사택이라고 해봐야 교회의 한쪽 칸을 막아 단칸방을 만들고 부엌을 조그맣게 달아낸 구조였습니다. 겨울이면 외풍이 매우 심한 공간이었습니다. 그 때가 1969년 6월로 둘째 아들(박문규, 중계동교회 목사)을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태어나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7년 8월까지 햇수로 19년을 그 사택에서 교회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담임목회자가 없던 시절인지라, 예식 목사님과 여러 학생 전도사들이 많이 다녀가셨다. 지금은 모두 훌륭한 목사님, 교수님이 되셨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모습과 얼굴, 사역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생활이 넉넉지 못하여 더 정성껏 잘 대접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좁은 사택이었지만 안식일이면 안방이 어린이 교실이요 식당이 되고, 부엌이 교회의 주방이 되어 국수를 끓여냈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이마를 맞대듯이 정겹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웠던 추억이 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북건재 김세현 사장님께서 ‘가난한 집에 손님이 많이도 온다.’고 하시면서 쌀을 한 가마 보내주셔서 감사하고도 요긴하게 사용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교회 청소는 늘 우리 가족의 몫이었는데, 한 번은 교회를 청소하던 중 노후 된 교회 천장이 푹 꺼지며 불룩하게 내려앉으려 해서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그때 당시는 너무 연약한 교회라 주변의 천성교회와 삼안교회를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님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크고 아름다운 교회, 성도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아울러 ‘우리 가정에도 살 집을 준비해 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1987년, 교회는 6월에 입당하였고, 우리 가정은 8월에 이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때 그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60주년을 맞이한 나의 사랑, 퇴계원교회!
그 건물 규모나 성도들, 사역들을 볼 때마다 때로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많습니다. 굽이굽이 인도하시고 기도를 응답해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교적 5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