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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스케취여행
2001.8.16 - 8.20일(4박5일)
말레이지아 팡코르섬에 있는호텔에서(유화10호F)
팡코르인근섬에있는 해상호텔(유화10호F)
팡코르 해안가모습(유화10호F)
팡코르섬에도착하여 부둣가에서(유화10호F)
말레이시아 농가 모습 (10호F)
k말레이시아 여행기
2001.8.16-20일 진짜 큰맘 먹고 국내선 항공기도 안 타본 내가 외국을 다녀왔다. 여행목적은 드로잉회의 하계 스케취연수이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화구를 펼처 놓고 그릴 형편은 못 되고 진짜 스케취로 만족해야 했다. 이처럼 일생 일대의 모처럼 해외여행 이였는데 그냥 세월 속 망각속으로 버리기가 아까워 몇 자 적어본다. 여기 적어 놓은 말은 주어 얻어 든는 말이였으며,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음을, 또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정확치는 않지만 발음이 비슷한말임을 먼저 적는다.
8월16일
인천 국제공항출발시각이 12시5분이래서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새벽 4시에 일어나기로 맘먹고 눈을 부쳤는데 일어나 보니 4시15분이였다 허둥지둥 재국아빠를 깨우고 출발을 서둘렀다. 6시까지 광주문예회관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새벽 안개속을 서둘러 운전해 가까스로 정한시각에 도착할수 있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정한시각에 순천에서 출발한 일행들이 도착되었다. 순천회원포함 가이드포함 총22명이었다. 우리는 뻐스로 올라가고 가이드는 출국수속 때문에 먼저 출발하였단다. 준비해온 간단한 대용식으로 차내에서 아침을 떼우고 영종도 공항으로 직행하였다. 모두 설레이는 눈치였다. 내 경우는 더하였다 첫 비행기 탑승에다 더욱 국외선이고 또 테레비에서만 본 엊그제 개항했다는 인천공항 모습도 궁금하고- 이윽고 인천에 도착되고 차는 바다 위의 공항고속도로를 달리고있었다. 야 대단하다하고 우리나라의 국력을 실감 할수 있었다. 공항규모도 엄청났다. 우리의 차는 지정된 게이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온 또 한 분의 회원과 기다리고있는 가이드를 만나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여권을 돌려 받았다. 화물로 부칠 짐을 별도 탁송하고 우리는 출국대로 가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 환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환전소를 찾아 300달라 환전 하였다.여기서 다음 여행하는 분을 위해 적는다. 필히 얼마간의 현지 화폐로 환전을 권하고싶다. 물론 현지 호텔에서 환전 가능 할수도 있지만 해두면 현지의 작은가게에서 독특한 과일이나 음료수따위를 사먹을수 있음이다. 내 경우는 현지화폐가 없어 휴게소등 쉴 때 남의 먹는걸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의 면세점에서 어떤 분은 돌아와 선물할 물건을 미리 사두는 사람이 있었다. 세금이 면제되기 떼문에 좀 싸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곧 탑승게이트로 이동하여 5분정도 기다린후 탑승수속 후 기내에 들어갔다. 말레이시아 항공이였다. 말레이시아 전통복장을 한 승무원들이 영어로 반갑게 맞는다. 여기서부터 이제 외국가는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지정좌석에 앉았다. 창가 안쪽좌석 이였다. 바로 창가 쪽이였으면 좋았을걸 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바로 창가쪽 이였다. 얼마 후 영어와 한국어로 안내 안전밸트 구명조끼(라이프쟈켓)사용 안내방송 후 이륙한다말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 후 대지를 박차고 이륙 하였다. 드디어 나두 비행기 탔구나 혼자 비식 웃어보았다. 하면서 얘기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여승무원들이 이어폰을 분배하여주고 또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점심 식사 메뉴카드를 가져다주고 희망음식을 식판에 나누워 주었다. 백반을 겸한 비빔밥에다, 고기조각이며 과일조각이며 오랜지쥬스가 함께 나왔다. 그런데로 맛있었고 양도 충분했다. 우리나라와는 1시간 시각차임을 얘기를 듣고 알 수 있었다. 말레이항공 승무원중 거의가 우리나라사람인걸 나중에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영어는 물론 말레이어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것에 탄복 할수 있었다.그리고 승객들 3/4이 한국인 관광객들임을 알수 있었다. 말레이현지시각 17:40분 도착예정 이었다. 잠시 눈을 부치기도하며 상영되는 영화도 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16:00쯤 기류가 불안정하다는 말과 함께 기체가 상하 좌우 요동할떼 불안감이 들기도하였다. 좀 그러다가 곧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드디어 쿠아라룸풀 공항에 착륙하였다. 우리는 드디어 설레이는 맘을 안고 기내를 빠져 나왔다. 우리나라의 영종도 공항에 버금할정도 상당히 크고 규모있어 보였다 나중에 안것이지만 이 공항 이름은 델타공항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영영방올림픽대회 개최당시에 맞추어 2년전에 건립되었으며 쿠알라룸플 시내에서 70km정도 떨어진곳에 위치하고있으며 중간에 신도시건설을 추진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기내에서 나오자 출입국장과는 상당한1km정도 거리를 자체 전동차로 운행하고있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기다리고있는 버스에 올랐다.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중고였지만 에어컨 작동이 잘되고 있었다. 현지 온도는 8월 우리나라와 비슷해 보였다. 그런데 탈때는 몰랐는데 나중보니 운전석이 우리나라와는 반대였다. 이차뿐만 아니라 모든차가왼쪽에있는것이아니라 오른쪽에 있었다. 그리고 운행할때는 차선 오른쪽으로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운행하는게 너무신기해보였다우리의차는공항을 빠져나와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향해 달렸다.운행중 현지가이드가 자기소개와함께 말레이시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나이는 27-8세 되는아가씨로 최00라고 했다. 4년전부터 이곳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고있다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그녀의 꿈인 관광가이드로 일하고있는데 왜 하필이면 말레이시아냐는 질문에 이곳이 회교국가로서 치안이 제일 안정되어있고 고국과 가까웁고 살수록 정이가는 나라라고 했다. 나중 보니 그녀의 영어 와 말레이현지언어실력은 정말 수준급이였다.우리가말레이지아머무는동안 이 아가씨가이드는 그림자처럼 우리곁에서 우리의 가려운곳 불편해할 때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모든정보는 이아가씨한테 듣는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말레이시아에 대해서 소개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하며 자세함에 감탄을 금할수없었다. 다음 말레이지아에대해 그녀의 소개중 기억 되는대로 옮겨본다.
먼저 말몇마디
-감사합니다 (쓰리마 까떼)
-천만에요 (싸마 싸마)
-화장실 (싼다스)
-안녕하세요 (아빠 까발)
-좋습니다. (까발 바이)
말레이시아는 고온 다습한 연중27-34℃ 가유지되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여름만 계속되는 나라로 여름은 건기로 하루에 한차례 소나기가 거의 한차레 꼭 있는 4-9월에 해당하고 10-3월은우기로 년2500mm 비가 내린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큰재앙을 몰고오는 태풍이라고는 없다 한다. 주민은 55%가 원주민 말레이족이고 35%는 중국계이고 나머지15%는 인도계등의 다민족국가로서 면적은 남한의3배에 달하나 총인구는2270만정도이며 수도 쿠알라룸푸루는200만이고 뜻은 진흙강이 만나는곳의 뜻으로 120여년전에 주석광맥이 발견되자 하나둘씩 사람이모여들기 시작하여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석유, 가스, 팜유, 주석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참으로 살기좋은 나라라고 했다. GNP는 1인 4000불 그러나 이 나라는 기술인력이 부족하여 남의 나라에서 수입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즉 건물을 지을경우등 또 말레이족은 거의이스람교를, 중국계는불교, 인도계는힌두교를믿으며 국민의대다수인 말레이족의 이스람교의 코란이 이나라 법의 모태가 되어 운용되고 있다고한다. 그리고 혜택 역시 말레이족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즉 남자는 부인을 4명까지 거느릴수 있으며 결혼할때마다 현제부인 즉첫번째 부인의 동의가 있어야한다고한다 살때는 부인 모두에게 똑같이수입등 분배되고 모든 것을 나누어주어야지 만약 한쪽에 지우치면 종교법원의 판결을 받는다고 한다. 다산을 권장하고 많이 낳을수록 혜택이 주어진다고 한다. 특히 말레이족의 독특한 관습은 하루에 5회 목욕하고 사우디아라비아(메카)를 향해 기도해야하며 만약 이 기도를 방해하는 업주나 사람에게는 종교법원에서 과중한 벌을 준다고한다. 따라서 이 나라 호텔에 가면 메카를 향한 화살표가천정이나 벽에 표시되어있다. 이 나라에는 왼손을 남의 앞에 내밀어서는 않된다고 한다 .오른손은 밥먹는 손이고 왼손은 화장실에가서용변후딲는데사용하기떼문이란다그래서인지이나라화장실에는 꼭지에 호스하나가 꼭달려 있다 수세식 화장실에도-.그리고 무엇을 가르킬떼는 우리는 아무손이나 검지로 가르키는데 반해 이 나라에서는 꼭 오른손 엄지로 가르켜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예쁘다고 함부로 머리를 쓰다듬어서는 오해 받는다고했다. 또 이나라 사람들이 죽으면 백색천으로 둘둘 말아 메카를 향해 45도쯤 세워서 매장한다고한다. 또 이나라사람들은 집짓는게 난방이 필요없기 떼문에 벽막고 지붕덮고 천장에 선풍기하나 달아놓으면 끝이라고한다. 또 호텔에서 본것이지만 우리나라같으면 이런식으로 집을 지어놓으면 태풍으로 날아가기 쉽상의 구조들이 좀 의하해졌으나 태풍에다 지진조차없는나라라니 할말이 없다. 지나다 보니 아파트들이 많이 보였다. 아파트 신축시 꼭 수영장이 있어야 허가가 나온다고 한다. 이상 이런 이야기들은 앞에도 언급했지만 여행기간중 그 현지가이드 최양의 소개의 내용임을 밝히고 그 중에 내가 이해를 잘못한 부분도 있을수있겠다. 우리의 버스는 1시간정도 달려 시내 한국식당에 식사를 위해 차를세웠다. 한우리식당의 한글간판이 반가웠다. 쿠알라룸플(kl)에는 이런 식당이 몇 개있다고 했다. 불고기 백반 서울에서와 별다름 없이 김치 술 밥까지 거의 똑 같았다. 나중 주인의 얘기를 들으니 식당 운영하면서 제일 애로점이 재료 구하는 것이란다. 특히 채소 무, 배추가격이 장난이 아니란다. 몇 군데 좀 서늘한 곳에서 무, 배추룰 주문 재배하여 납품 받는다고 했다. 상사직원, 관광객, 우리나라상사의고용한 현지인이 주고객이란다. 소주한병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지않았다. 우리나라돈 5000원, 혹 이걸 보고 무슨 소리냐고 할는지 모른다. 이 나라는 아랍국가로 술값 비싸기로 소문나 있는터로 알고 있었기 떼문이다. 사실 시내 이런 한식당이아닌 다른 가게에서 보면 맥주한컵이 우리나라돈5000원 정도로 비싸서 보통사람은 이나라 사람은 먹지를 않고 외국인들이 먹는데 가격이 이렇게 세금매겨 비싸게 받는다 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묵을 호텔로 향했다. 시내 한 복판 상당한 규모의 호텔에 내렸다. 우리는 지정된 객실에 들어가서 쉴 차비를 하고있노라니 짐을 가져왔다. 우리는 팁으로 1불을 건넸다. 이건 사실 여행사 가이드분께서 가르쳐준 격식을 배움이였었다. 자고나갈때도 베게위에 또 1불정도 놓아두는게 청소원에게 예의라는걸 함께 교육(?)받음 떼문이였었다. 호텔에 든시각이 8시, 씻고나니9시경 잠이올 것 같지 않아 후론트에 내려가 일행중 내려온 이들과 차한잔 하고나니 10시, 내일을 위해 일찍 자리에 들기로했다. 내일아침 6시에 모닐 콜(깨움전화)거오기로되어있고 7시반까지 식사를마치고 또 차에 오르기로 에정 안내를 받음떼문이었다.
8월17일
아침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짐을 꾸려 식당으로 가지고 내려왔다. 12층까지 오가기 싫어 아예 챙겨 가지고 내려왔다. 식사는 뷔페식 이였다. 밥이 없는 순 양식부페식 별식으로 생각하고 거부감 없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어제의 그 뻐스에 올랐다. 그 현지 가이드 최양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북쪽 팡코르섬을 향해 출발했다. 쿠알라룸프르시내를 벗어나자 4차선의 시원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 하였다. 차창의 말 그대로의 이국풍경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 중에 특이한 것 팜나무 밭의 광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나니 영국인들이 이 나라를 장악할 때 기름 채취를 위해 권장한 거라고 한다. 한때는 이 나무 대신 고무나무 경작이 붐을 이루었으나 화학제품에 밀려 수요가 줄어들자 식용유 채취를 위한 팜나무를 심는 면적이 확창 되었으며 이 팜나무는 5개월에 한번씩 열매를 채취하여 기름을 짜 낸다하고 지금도 많이 심기 위해 지반 정리중임을 볼수 있었다. 더욱 이 나라는 미국과 사이가 별로여서 콩기름 수입도 없고 식용유 중에도 고급인 팜유를 세계 수십개국에 수출한단다. 우리나라도 수입하여 바로 라면공장에서 대량사용 한단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도로변에 있는 휴게소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우리나라의 규모있는 휴게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골 구멍가게휴게소이고 화장실 이용시에도 돈을 받는다. 목이 말라 무엇을 사 먹고싶어도 현지 화폐만 받으니 정말 재미 없다. 가이드가 사 올려주는 맛보기 여러가지 과일은 참 맛 있었다. 망고, 파파야, 파인애플, 작은바나나 이런 과일은 좀만 노력하면 쉽게 가꾸고 따 먹을수 있단다. 그러고 보니 차창으로 보니 일하는 모습은 도무지 볼수 없었다. 대신 가게에 앉아 음료수를 홀짝거리는 모습은 많이 볼수 있었지만 허긴 이런과일이 흔해 빠졌으니 배 부르고 누울곳 있으니 무슨 욕심 있으리요.얼마를 지겹게 달리다 점심때가 되어 우리는 작은 도시의 중국음식점에 들러가 식사를 하였다 특이한 것은 식탁을 빙빙돌리면서 먹는것이였는데 이름 모를 여러 가지 메뉴들이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준비해 간 포장김치였다. 중국 음식의 느끼함을 우리김치는 안성맞춤으로 해소시켜 주는 것이였다. 참 맛있게 먹었다. 다시 차에 올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1시간 반정도 달려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팡코르섬을 가기 위한 배를 타는 선창가란다. 우리는 차에 내려 잠시 시간이 있어 스케취 한장씩을 작업할수 있었다. 대합실에 뚜똥이라는 보자기를 쓴 말레이여자가 아기를 안고 앉아 있었다 . 그 모습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은근살짝 가린 그 모습 너무 고왔다. 또 들은 얘긴데 이곳 말레이여자들은 학교만 들러가도 교복이 보자기르 뒤집어 쓰는것이란다. 잘때까지 이 보자기를 쓰고자야한단다.밥먹을 때, 세수할떼, 목욕할때까지 우리가 보기는 처음은 답답한 감도 들기도 하였으나 자꾸 보니 그 모습이 더욱 곱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참 그리고 이 나라는 말은 있는데 글자가 없단다. 글자는 소리나는데로 영어알파벳으로 풀어쓴단다. 그러니 외국인이 보기는 영어도 불어도 아닌 이상한 글씨간판이 등장하여 외국인들을 혼란스럽게 한단다. 기다리기 얼마 후 우리는 눈 앞에 있는팡코르섬을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배는 그야말로 좀 노후된 배여서 타긴타도 유쾌하진 못 했다. 우리나라보다는 후진국에 여행온터라 그러려니 할 수밖에- 얼마 후 호텔에서 종업원이 기다리고 있는판코르섬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나온 버스에 타고 2km정도 가니 호텔이 나왔다. 우리는 지정된 호실에 입실하였다. 이제부터 저녁식사 시간까지 3-4시간 정도는 자유시간이라 우리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스케취북에 담았다. 호텔은 해안가 자체풀장이 있는 수준급의 호텔이었다. 좀은 너무 호화로워 정말 이곳에서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사실 산다면 지겨울런지도 모르겠지만-. 호텔에는 여러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투숙한듯했다. 야자 우거진 해안가 민물 풀장에서 몸을 담구고 쉬는 모습들이 사진에서만 보아오던 외국의모습 진짜그대로였다. 움직이면 땀이나는 기후 그늘에 가만히 있으면 견딜만한데 - 스케취 몇 장 한후 바닷가에서 일행들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가 맥주 한잔 걸치고- 호텔은 종업원들이 많았다. 20대 초반 피부색으로 보아 인도계 청년들인 것 같았다. 이 나라에 인도계 사람들이 들어오계 된 것은 영국인들이 점령 시 고무나무 팜나무를 심어놓고 관리를 할려하는데 현지 말레이인들이 너무 게을러 능률을 올릴 수 없어 인도에서 노예식으로 이 나라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 전해온다. 그 후 이 나라가 독립후 이들은 오갈떼없이 이 나라에 살고있는데 거의가 생활이 수준이하 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중국계는 주석 광산 개발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금 현제는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 한단다. 그러나 그들은 집치장은 거의 하지 않고 언젠가는 본국에 돌아간다는 소망을 안고 살기 떼문이란다. 집은 빈민주택 같아 보이지만 출 퇴근시 그들이 타고 나오는 차는 볼보등 최고급 차들이란다. 이 나라는 석유값은 우리나라 돈으로 휘발유 1ℓ에 400원정도 싼 편이나 기타공산품 가격은 수입한 물품투성이다 보니 엄청 비싸단다. 자동차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7-800만원가격의 차가 이곳에서는 우리나라돈으로 2500만원 가격이란다. 정부에서 70%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 떼문이란다. 그러나 자동차 보유대수가 국민1.5인당 차1대정도 보유하고있단다. 이들이 이렇게 돈을 잘벌어서 사는거냐 하며는 그게 아니라 상당수가 저렴한 이자로 정부에서 대출을 받아 산단다. 사실 차 없으면 생활하기가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의 통신비용-전화요금은 장난이 아니란다. 핸드폰도 사용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비용떼문에 현지 안내가이드경우도 큰 부담이란다. 우리는 시간을 보내다 날이 땅거미가 질 무렵 식사하라는 전갈을 받고 식당으로가서 식사를 하였다. 뷔페식 이였다.빵과 우유 게란후라이 파파야, 수박 등으로 배를채웠다. 그러나 역시 인기있는 것은 김치였다. 김치 한번 먹고 다른걸 먹을 수 있었지 다른거만 먹는다면 느끼함에 질려 즐거운 식사가 되지 못했으리라. 식사 후 일행 중 어느분이 낮에 골프장에서의 홀인원턱을 낸다하여 맥주 한잔 후 옆의 우리나라의 나이트크럽식 홀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현지아가씨들의 생음악 노래와 반주에 맟취 빠른 리듬에 몸을 흔들어보았다 한참 후 우리가 자리에서 내려오자 중국계 일행들이 그들 나름대로 재미있게 노는것도 볼 만하였다. 얼마 후 방에 돌아와 차한잔 후 잠을 청하였다. 엊저녁 호텔도 그리하였지만 우리나라같으면 냉장고가 있어서 그 안에 음료수들이 들어있어서 먹고 나중 책크아웃할떼 계산하지만 이나라에서는 어제같은 호텔은 냉장고는 있었지만 텅 비어 있었고, 이번 호텔은 그 마져 없고 홍차 커피 인스탄트제품과 커피포트가 있어서 스스로 끌여 먹도록 되어있었다.
8월18일
이튿날 일어나 세수하고 식당에 역시 부페식 식사를 하고 해안가로 내려갔다. 일행중 사정이 있어서 못가는 몇 사람을 제하고 쾌속보트를 타고 팡코르섬 다른쪽에가서 해안가 관광도하고 낚시, 제트스키나 바나나보트도 타고 새우와 꽃게 바비큐를 먹는다는 별도행사에 90불을 내고 참여키로 한 떼문이었다. 이미 바다에는 보트가 와 있었다. 우리 몇 사람이 내려가자 가까히 다가와 서울,코리아? 하고 알은체 한다. 이윽고 우리는 쾌속정에 몸을 실었다. 육지에서의 시속 70km는 별 것 아니지만 바다에서의 그 속도는 파도를 가르고 물살과 부딧치는 바닷바람과 함께 대단한 속도같이 느껴졌다. 여성회원 한분은 너무나 겁이나서 고개를 처박고 괴성을 지르기 시작 하였다 그 소리에 모두 웃고 우리는 더욱 즐거웠다. 모두다 구명조끼를 입은터지만 상쾌함은 이루 말 할수없었다. 어느섬에 이르자 이곳에서는 낚시를하라며 낚시줄을 하나씩 분배 받았다. 넣자 마자 손바닥만한 고기가잡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잘 잡는 사람은 잘 잡는데 나는 미끼만 따먹지 영 잡히지 않는다. 결국 나는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포기하고 해안가 스케취한장을 작업하였다. 많이 잡는 사람은 열마리를넘게 잡는사람이 있었다. 생각해 보건데 고기가 낚시줄에 전해 오는 감촉을 정확하고 느끼고 민첩하게 잡아다녀야 하는데 워낙 둔감 한편이라 매번 허탕인셈이다. 한참 후 자리를옮겨 수상 호텔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아예 포기하고 스케취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한쪽에서는 준비해온 초장에 즉석 회를떠서 찍어먹는 맛 카- 정말 좋았다. 한참 후 우리는 바닷가에 내렸다 넓직한 모래사장 그러나 한가로움 미리 에약이 된터라 원하는사람은 제트스키를 원하는만큼 탈수 있었다. 제트스키에는인도인 한분이 처음요령을 가르쳐주고 보조역활을 수행하였다. 야자나무 울창한 푸른바다에서 물결을 가르고 제트스키를 타는맛 너무 너무 신 났었다. 이곳에서도 스케취작업 한장 즐기면서도 그림그리러 왔으니 그림은 그려가지고 가야지하는 맘에서 였다. 회원들도 틈만나면 스케취북과 씨름한다. 얼마후 점심시간 구운 새우가 나왔다 식탁에 수북히 쌓아 놓고 마음껏 먹으란다. 먹고 나면 계속 구워 나오고 꽃게도 구어 나오고 -얼마를 먹었을까 아마 내가 먹는새우만도 40마리는 족히 되었으리라. 나중 비빔밥이 나왔다. 음료수와 과일도 나오고- 허긴돈이 90불어치 스케쥴이니 잘 나올 수밖에- 얼마후 우리는 한번에 5명이 타는 바나나 보트를 타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뿔사 한참을 달려 해안가로 되돌아 와서는 천천히 착륙토록하는게 아니라 더욱일부러 세게 달려 모두 바닷속에 전복을 시키는게 아닌가 전여 예상치 못한 수영복도 준비 않해간 상황이라 황당하였다. 너무갑작스런 행동이라 모두 놀라 기겁을하고 미꾸라지가 되어 육지에 올라오니 옆에서 재미있다고 웃고있는게 아닌가. 여자회원들도 너무나 어이가없었으나 그렇다고 성 내는이는 없었다. 한마디로 얼척없는꼴이 되어 돌아와 모두 홀라당 벗고 옷을 짜 말리는 수 밖에 그러나 안타겠다는 사람없이 너두나도 다 한번씩 타고자 한다. 나중은 미꾸라지가 되어 올라오고- 지금 생각하니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오후4시경 숙소인 호텔로 돌아왔다. 나중 못 간이에게 그곳에서 스케취 한걸 보여주니 몹시 부러워한다. 그런데 일행중 한 분이 우리가 놀던곳에 나무에 안경을 걸어놓고 그냥 와서 누구한테 말도못하고 상심해있는데 가이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모타 보트 주인으로부터 연락이왔는데 안경을 가지고 지금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누구 안경 잊어버린사람 있느냐고- 그분은 뛸 듯이 기뻐하는것이란-우리 역시 큰 감명을 받았다. 잠시 누어 쉬었다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는 분위기 만점이였다. 달떠오는 바닷가 야외에서 역시 뷔페식이었는데 특별히 생선새우등 부페식이였지만 낮에 워낙 새우랑을 냄새나도록 먹은터라 별로 식욕이 없어 과일로 배를채웠다. 저녁은 일찍 자리에 들었다. 참 자기전에 호텔 우리방 목욕탕 샤워후 욕조물이 빠지지 않지 않은가 마게부위가 고장이 났나보다. 함께 한 분과 아무리해두 되지않는다. 별수 없이 후론트에 가서 도움을 청해야하는데 영어실력이 짧으니 갑갑하다 망설이다 용기를내어 후론트에 내려갔다.
아까씨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는식의 말을 감으로 잡겠다.
사실 아까씨말은 한마디도 알아 먹지 못하고-
탱큐, 룸 넘바 투,제로,파이브 베이스 룸, 스몰 풀 워터 노아웃, 핼프 미-
입에서나오는데로 씨브렁댔다. 욕조를 뭐라해야 하는지 마게가 고장 났다는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아가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한다.
천천히 다시한번 말을했다. 그제야 아가씨가 웃으며 감을 잡았다는지
오 아임 쏘리 그다음은 모르겠다. 아마 기다리란 말인 것 같다.
댕큐-하고 대답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니 그분이 어떡했느냐 물어본다. 사실대로 이야기 하니 자기도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으나 암튼 잘했다며 기다려보자했다. 얼마후 방의 녹크 소리가나서 문을여니 기술자인듯한남자두사람이 서있다 안내하니 즉각 고쳐주고 아임 쏘리-하며 무어라 말하고 나간다. 지금도 나는욕조를 뭐라하는지 이럴경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건지 잘 모른다. 아무튼 고쳤으니 되었지 않은가-. 낮에 물속에서 놀던게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8월19일
다음날 우리는 6시에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가이드에게 맡기고 식당에 가서 빨리 식사를마쳐야 했다. 오늘 스케쥴이 빡빡하기 떼문이다. 차에 올라 어느 여성회원 한 분이 늦어 상당한 시간을 기다린 후 출발하였다. 다시 오던 길로 선착장에 도착하고 다시 배를 타고 내리니 뻐스는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올때는 가다가 가장 전형적인 시골 농가모습 농가전경을 잠간 시간을내어 담아가자는 의견이 나와 크록키나 사진 한장씩을 찍고 차에 다시올라 쿠알라룸프르로 되돌아 왔다. 이 말레이시아에는 우리나라의 63빌딩처럼 자랑하는건물이있는데 쌍둥이 건물이란다. 그 건물은 하나는 일본인이 하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나라 삼성에서 완공을 했단다 높이가 어마어마 하다. 정부청사 일반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고한다. 이윽고 점심때여서 중국음식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였다. 느끼함 떼문에 별로였으나 모두 가져간 김치도있어 즐겁고 맛있게 식사를 마칠수 있었다. 이 말레이지아는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있단다. 지금수상은 전직병원의사였는데 치료하면서 주민들을 만나서 많은 어려운애기를듣고 정계에 입문하여 전임 수상시에는 부수상이라는 직에까지 올랐으나 권한은 시간떼우는게 고작이였단다. 당시 말레이시아에는 무슨 다리 큰 공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 수상은 막강한 실력자로 권한을 행사하고있었는데 그 공사도 일본인에게 공사키로 밀약이 되었있는 상황이었더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대에서 이00를 정주영회장이 이곳에 보내 공사를 무조건 따오라는 특명을 내렸더란다. 와 보니 다되어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수상 접견신청을하면 만나주지도 않더란다. 본국에 그날그날 보고는 해야하고 답답하여 부수상이나 접견신청하여 만나서 이 심심한 부수상과 시간 같이 보내주고 이런 저런 얘기와 한국의여러가지 이야기 새마을사업 이야기등으로 시간보내고 몇일을 이리 보내다 부수상과 아주친해졌단다. 부수상도 아무 실권없는 자기를 찾아준 이00를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한국에 대해서, 현대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단다. 한국에는 부수상과 만났다고 보고하고 그러나 얼마를 이러다 그냥 포기하고 이00는 귀국을 했더란다. 그런데 얼마후 갑자기 수상이 물러나게 되었단다 .그리하여 당시 부수상이-, 현수상이 취임하게 되었단다. 현수상이 취임하자 추진중이던 그 다리공사를 백지화하고 다시 재 입찰하여 현대에서 맡게 되었더란다. 그러나 엄청난 대규모 공사를 현대에서 할수없을것이라는 염려속에 수상은 이00를 믿고 현대에 공사를 맡기고 또 현대는 아주 훌륭하게 기한내 완공시켰단다. 이리하여 이00와함께 한국에 대해서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또 한가지 수상이 이00에게 부탁한 얘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타고온 말레이항공을 서울에 취항시켜 달라고 하였더란다. 그래 이00는 당시 대한항공 조00회장을 찾아갔었는데 깨끗이 거절하더란다.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러나 나오며 이00는 그러면 현대에서 항공사를 하나 만들도록 해야겠다고 하면서 나오니 다시 불러 마지못해 취항 할 수 있게 되었더란다. 이렇게 이00는 현 수상과 신의를 유지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했다. 그리고 현 수상은 한국을 배우자며 말레이 새마을운동을 시작 했더란다. 그러나 워낙 더운나라에서 국민성 자체가 적극성 결여되여 있어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단다. 그러나 이 국민성을 개조시켜 볼 양으로 이스람교를 적극 받아 들여 적극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단다. 이스람교는 알다시피 사막에서 살아남기위하여 치열한 전투를치르며 생성된 종교임을 알고있으리라. 계율 역시 매사 적극성을 유도하고 있다. 예로 라마단이라는 금식기간을 들수 있겠다. 하면서 타민족이 들어와 이 나라에서 말레이족을 넘볼수 없도록 이민, 영주권은 절대 허가 해 주지 않는단다. 그 예로 말레이족과 결혼한 타 민족여자가 아이를 낳은다해도 아이는 영주권을 인정하지만 부인은 매년 갱신하는 체류허가권은주지만 영주권을 허가 해 주지 않는단다. 또 현 수상이 작년대학졸업식에 참석해 정부는 우리 말레이족이 보다 잘 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배려를 다 하고있는데 여러분의 공부하는 실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눈물을 흘리며 분발을 호소 하는것이 인상 깊었다 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을수 있었다. 그리고 현 수상은 20여년을 통치하고있는데 즉 그러할수 있는힘이 코오란에 근거하는 현행법 떼문이란다. 그런데 과거에는 한국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노력하면 추월 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맘을 하고있단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정계뉴스, 화재, 또 사건소식은 국내보다 대서 특필한단다. 특히 부끄러운 것은 삼풍사건 ,한강대교 무너지는 사건 때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 였단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국립 미술관을 향했다. 미술관은 역사가 짧은지 조상의 미술품 전시라기 보다는 현대화가들의 전시에 비중을 두고있음을 느꼈다. 그 나름대로 조형예술기법 등이 특이했고 말레이지아만의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우리는 바투동굴로 향했다. 주위경관 바위절벽 중앙에있는 동굴로 힌두교 미술의 면모를 엿볼수 있었다 앞 가게에서 보니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얼마나 다녀갔는지 상당한 한국말로 사세요 비싸면 이것을-하면서 권하기까지 하는게 수준급이다. 이스람국가라 힌두교를 이단시해서 그랬는지 주위가 정화되지 않고 좀 주위여건이 어수선한 것이 거슬렸다. 그다음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똥갓알리 신비의 나무뿌리 제품을 취급하는 가게에 들렸다. 정력과 고혈압 당뇨등에 특히 좋다는 설명과 함께 몇분이 제품을 구입하였다. 그다음은 주석공장 주석 -내가보기는은을 닮은 백색 광물로 보였다. 이걸로 여러 가지 컵,쟁반, 장식품등 공예품을 가공해서 팔고 있었다. 그 다음은 바틱공장-인도네시아 전통수공예 염색기법으로 100%실크에 완전 수공으로 그려만들었다는 머푸러등을 생산판매하고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돌아가서 선물할 머푸러를 몇장 구입하였다. 가격은 수제품이여서 그런지 상당히 비싼편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 우리는 왕궁에 갔으나 입장할 수는 없었고 앞에서 사진한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정부청사 앞의 잔디밭에서 좀 시간을 보내다 저녁식사를 위해 한국식 식당으로 옮겼다. 메뉴는 김치찌개에 낙지볶음 우아 몇 년만에 보는 식단인양 너무 반갑고 맛있게 먹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다. 얼마 후 11시40분에는 이곳 말레이시아를 떠나야한다. 첫 번째 해외여행으로 너무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울수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우리는 공항을 향해 달려야 했다. 현지 가이드아가씨 최양과도 이별을 해야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짐을 부치고 면세점에 구경을 하다가 탑승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 우리 가 탄 말레이항공기는 이륙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안녕, 말레이지아-!
8월 20일
기내에서 늦은 시각이고 피곤해서인지 이내 골아 떨어졌다. 얼마 후 눈을 뜨니 6시, 아침식사를 하란다. 밥에 고기를 얹어 비벼먹었다.오는길은 내가 창가에 앉았기 때문에 밖을 내다 볼수 있었다. 구름위를 나르는 기분은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라 할까, 한반도 위를 이윽고 날고 드디어 영종도 공항이 눈 아래 보였다. 위에서 보니 공항 건물만 지어있지 주위에 별 시설이 없는 모습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7시경 드디어 착륙하고 입국 수속 후 짐을 찾기 위해 찾는 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테레비에서 보았듯이 화물처리능력이 늦다는 말 그대로였다. 앞으로 개선을 해야지 짜증 날 정도였다. 한자리에서 30여분 넘게 화물 올라오는 구멍을 처다 보고 기다리는 기분, 외국인에게는 첫인상이 흐려지지 않을까- 얼마 후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되었다. 우리의 차는 광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차안에서 서로의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얘기꽃을 피우며 다음시간을 기약하였다.
이리하여 말레이시아 여행이 끝난 셈이다.
이렇게 나도 비행기 한번 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