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부산 동구 범일5동 매축지 마을 전경. 경부선·우암선 철길과 북항·55보급창에 둘러싸인 지리적 여건 탓에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
- 양철·슬레이트 빼곡한 지붕
- 아직 6·25 판자촌 모습 그대로
- 앞 미군부대, 옆·뒤는 철로·항만
- 사방 장애물로 빈곤의 섬 전락
- 고령화 가속, 행복지수 하위권
- 보안 이유로 도시재생은 답보
- 주민 "시민공원 개발 부럽다"
"반세기 동안 매축지는 변한 게 없어. 양철 지붕을 얹은 판잣집도 그대로잖아. 세상은 천지개벽했는데…."
매축지 마을. 지난해 10월 기준 4821명(2407세대)이 사는 부산 동구 범일5동의 다른 이름. 미군 55보급창과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다.
원래 매축지와 55보급창이 들어선 자리는 바다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고베 자본가 중심의 부산진매축주식회사가 매립을 했다. 수천 개의 마구간이 있던 매축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피란민 판자촌으로 변했다. 일제의 석탄저장소는 55보급창이 됐다.
"슬레이트 지붕 보이지? 언제 고쳤는지 생각 안 날 정도로 오래됐어. 바람 불면 허연 가루가 날려. 석면이라고 하던데…." 70대 노인의 말대로, 매축지 마을의 풍경은 195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붕 위에는 아직 비닐과 폐타이어가 얹혀 있다. 5대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주건호(61) 씨는 "미군 부대에서 구한 널빤지와 깡통으로 5평 남짓한 집을 지었다"면서 "집과 집의 처마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큰불 나면 끝장"이라고 했다.
개별 화장실을 갖춘 집도 드물다.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공동 화장실이 92개나 된다. 246세대는 연탄보일러로 겨울을 나고 있다. 젊은 층도 대부분 빠져나가 대낮에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한때 성업했을 미용실이나 철학관·약국도 문이 꽁꽁 잠긴 상태. 햇빛 가리개 용도로 유리창에 붙여놓은 2003년 발행된 신문지는 누렇게 변색이 돼 있었다. '친구' '아저씨' '하류인생' '마더' 같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
| 박삼석 동구청장이 지난 11일 취재진과 함께 매축지 마을을 답사하는 모습. 전민철 기자 |
지난 11일 취재진과 함께 55보급창~매축지 마을을 답사한 박삼석 부산 동구청장은 "동쪽의 55보급창이 개발을 가로막고 있다. 북서쪽의 경부선·우암선과 남쪽의 항만·부두 역시 매축지 마을 현대화의 걸림돌이다.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55보급창을 이전해야 매축지 마을에 햇볕이 들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매축지 마을의 행복지수는 부산에서 최하위권이다. 부산복지개발원이 지난 7월 내놓은 '복합결핍조사'에 따르면 범일5동은 혼자 사는 노인 비율이 44.01%로 208개 읍·면·동 가운데 상위 2위에 올랐다.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혼자 사는 세대인 셈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1128명이었다. 사회활동 참여 부문에서도 뒤에서 다섯 번째였다. 행복감지수 역시 하위 5위였다.
요즘 유행하는 '도시 재생'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주택·도로를 비롯한 기반시설이 워낙 열악하기 때문. 범일5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폐·공가가 259동이나 된다.
재개발도 번번이 좌절됐다. 1990년 5월 좌천·범일 3개 지구(제8·2·3지구)가 도시환경정비사업 추진 구역으로 지정됐으나 8지구(범일 오션브릿지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단된 상태다. 박 청장은 "미군은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워 범일 오션브릿지 초고층(48층) 건축에도 반대해 어려움이 많았다. 55보급창 일부를 주민 체육시설로 개방해달라는 요구도 수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매축지 마을 주민들은 하야리아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부산시민공원이 들어선 부산진구 초읍·연지·범전동의 발전상이 부럽기만 하다. 55보급창이 원도심의 부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부산대 차철욱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수십 년간 미군 부대 탓에 핍박받아온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야 한다. 북항 재개발이 한창인 지금이 55보급창 이전과 활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박 청장도 "55보급창을 그대로 두고 북항 재개발이 진행된다면 유라시아 철도와 해상로의 관문인 동구는 노후화가 심해질 것이다. 동천 재생도 기대하기 어렵다. 학계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토론회를 곧 개최해 55보급창 이전 전략과 활용계획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 민관 팀워크로 일군 하야리아 반환…부산시 '보급창 전담팀'부터 꾸려야
- 해양경제구역법→해양클러스터법
- 55보급창 통합 개발 악영향 우려
"미로처럼 얽힌 이해관계를 푸는 과정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하야리아 미군 기지 반환 운동에 앞장섰던 이성근 부산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의 회고다. 그는 "당장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이 개정돼야 55보급창을 이전할 수 있다. 국방부와 해양수산부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숙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부산시는 아직 관망하는 중이다. 55보급창 업무도 해양수산국(북항 재개발) 기후환경국(동천 재생) 도시계획실(토지용도) 시정혁신본부(민선 6기 공약사업)에 분산돼 있다. 전담 조직은 없다.
하야리아 반환 과정은 달랐다. 부산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하야리아가 부산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국방부와 주한미군에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했다. 행정부시장이 컨트롤타워가 돼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2006년 2월 부산시의 정식 기구로 출범한 '부산시민공원추진단'은 지난해까지 8년 동안 ▷미군으로부터 토지 관리권 이양과 토양 오염 치유 ▷국비 확보 ▷공원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았다.
김해몽 부산시민센터장은 "55보급창 이전은 부산역 철도시설 재배치 사업과 함께 원도심 살리기 프로젝트의 핵심"이라면서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앞에서 끌고 전문성을 갖춘 행정조직이 뒷받침하는 삼각 협력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에 계류 중인 '해양경제특별구역법'이 '해양산업클러스터법'으로 수정되면서 55보급창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양수산부가 애초 구상한 해양경제특별구역 제도는 항만과 배후지역인 55보급창·부산역까지 포함해 해양산업 융·복합 단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해양특별구역 입주 산업이 모호하고 세제 혜택도 과다하다며 반대했다. 결국 수정안에서는 사업 대상지역이 '인프라가 이미 조성된 유휴항만을 포함한 항만구역'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되면 부산역 철도시설 이전 부지와 55보급창과의 통합 개발은 불가능해진다.
◇ 매축지 마을(범일5동 일대)의 삶 | ▶혼자 사는 노인 비율 상위 5개 동 | 순위 | 읍면동 | 비율(%) | 1 | 모라3동 | 44.23 | 2 | 범일5동 | 44.01 | 3 | 동삼3동 | 41.85 | 4 | 초장동 | 39.24 | 5 | 반송2동 | 38.85 | ▶사회활동 참여 하위 5개 동 | 순위 | 읍면동 | 산출 지수 | 1 | 중1·2동 | 0.53 | 2 | 구포3동 | 0.60 | 3 | 범천1·2·4·동 | 0.78 | 4 | 수정1·2동 | 0.80 | 5 | 범일4·5동 | 0.82 | ▶행복감지수 하위 5개 동 | 순위 | 읍면동 | 산출 지수 | 1 | 모라3동 | 5.17 | 2 | 동삼3동 | 5.60 | 3 | 중1·2동 | 5.69 | 4 | 초량3·6동 | 5.70 | 5 | 범일4·5동 | 5.73 | ※자료 : 부산복지개발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