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말명초 주요 세력 군주
명하의 초대 황제. 모든 한국 명씨의 시조이다
묘호 : 태조(太祖)
시호 : 흠문소무황제(欽文昭武皇帝)
왕호 : 농촉왕(隴蜀王, 자칭 왕호)
연호 : 천통(天統)
성씨 : 명(明)
휘 : 옥진(玉珍), 개명후 정(貞)
부황 : 선무제(宣武帝)
모후 : 정숙황후(貞淑皇后) 조씨(趙氏)
생몰년도
1331년 ~ 1366년
재위 기간
1362년 ~ 1366년.
명옥진은 오늘날 후베이성 쑤이저우 출생으로 몸집이 크고 눈동자가 2개였다고 한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정 11년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농민 1천명을 모아서 거병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농민 집안은 아니고 그 지역의 유력자 정도는 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서계 홍건적 서수휘가 세운 천완국(天完國)의 군세가 강성해질 무렵 서수휘의 반협박에 군을 이끌고 합류한다.
이후 서수휘 휘하에서 원수로 활약하던 도중 부관 대수의 충칭의 수비가 나약하니 충칭을 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뒤 불시에 기습하여 충칭성을 함락한다.
충칭이 당시의 촉(蜀), 오늘날 사천성 일대 주요 요지였던 만큼 완자도가 평장 낭혁대, 첨장 조자와 함께 수복하려고 하였으나 패했고, 명옥진이 기세를 몰아 그들이 주둔하던 가정을 함락한 뒤 끝까지 회유에 응하지 않던 세 명의 목을 벤다.
그러나 다른 군웅들과는 다르게 위 세 명의 시신을 예를 갖춰 장사를 지내면서 추이를 지켜보던 다른 군들이 모조리 명옥진에게 귀의하게 된다.
그렇게 세력이 강해지던 찰나 지정 20년에 서수휘가 진우량에게 살해 당하고 진우량이 진한을 세우게 되면서, 명옥진은 단번에 진우량과 관계를 끊고 농촉왕을 자칭한 뒤에 군사들에게, 호북에서 사천 분지로 들어가는 중요한 지역인 구당을 지키게 하였으니, 사실상 자립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후 참모 유정(劉楨)의 건의에 따라 지정 22년, 명하(明夏)를 세우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또한 충칭을 수도로 하고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촉(蜀), 즉 사천성(四川省) 일대가 고립지여서 다른 군웅들에 비하면 그 세력이 약소하였기에 적극적인 진출보다는 내정의 정비에 힘쓰게 된다.
명옥진은 백련교도로써 미륵을 신앙하여 불교와 도교를 없애버렸지만 그의 통치 하에 서촉은 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정 26년에 35세라는 길지 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 아들과 신하들을 불러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서촉은 험하고 고립되어 있으니 좌우 측근과 세자가 한 마음으로 협력하면 능히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후사를 알 수 없다.
그러나 10살밖에 안 된 아들 명승(明昇)이 즉위하기 무섭게 공신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명하는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1371년 명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명승이 항복했고 명하는 멸망한다.
주원장은 의외로 명승을 죽이지 않고 귀의후(歸義侯)에 봉하여 명승과 그 일족을 죽이지 않았으며, 후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을 우려해 고려로 내보내는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
주원장이 고려 공민왕에게 명승을 보내며 전한 말은 "그를 백성으로 삼지 말고, 신하로도 삼지 말라"였다고 전한다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이성계는 명승을 화촉군(華蜀君)에 봉하였고, 국빈(國賓)으로서 예우하였다.
명승의 후손이 바로 대한민국에 현존하고 있는 연안 명씨, 서촉 명씨가 된다.
명씨 뿐 아니라 승(昇)씨의 조상이기도 하다.
명승의 막내 아들이 성을 아버지의 이름인 승(昇)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씨와 담씨도 명옥진의 휘하에서 발생한 성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