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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제왕 "아틸라(Atilla)"와 헝가리
4세기 중반경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며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켜 전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결국 로마제국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던 훈족의 제왕 "아틸라(Atilla:Ad 395~453)"와 헝가리에 대한 저의 몇가지 생각을 적어볼까 합니다.
.........(중략)
우선 신라와 가야지역에 출토된 유물중의 하나인 기마인물형 토기(특히 말잔등에 올려진 솥단지)와 편두형의 두개골(중국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은 편두를 하지 않음)등으로부터 훈족계와 신라가야계의 공통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덪붙여 훈족들이 사용했다는 활이 "예맥각궁"으로써, 유럽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훈족 전사의 마상활쏘기 장면은 고구려 무덤벽화의 그것과 다름아닙니다.
여러 가지 사실로부터 추정해낸 저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훈족은 바로 신라-가야의 지배층과 명백히 같은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부분은 "아틸라(Atilla)"라는 대왕의 호칭 자체와 헝가리 신화에 나오는 인물중 하나인 "불추(Bulcsu)"라는 인물의 이름입니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의 신라 임금의 이름이 "아달라(Adalla:Ad ?~184)" 이사금으로 나옵니다. 이 분은 바로 신라 8대 임금님입니다. 물론 시기적으로 아틸라 대왕과 아달라 이사금의 활동시기가 2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두 사람의 혈연적 연관성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니고, 여러분들도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두 대왕의 발음입니다. 비슷한 이름체계를 가졌다라는 것입니다.
아틸라 대왕의 형의 이름은 블레다(Bulleda->불달 또는 부달(우리식 발음))이며, 헝가리 신화중에 "불츄(Bulcsu)"라는 인명이 보입니다. 신라초기 임금들과 왕족들중 미츄(추발음보다는 츄발음이 더 원형에 가깝다고 본다), 벌휴(벌츄로 발음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구츄(구추: 벌휴 임금의 아버지) 등의 이름이 있기도 합니다.
즉, 훈족과 신라 초기 왕계의 이름들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사실 고고학적으로 고증된 유물 증거만으로 특정 두 민족의 친연성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공간적으로 상이한 문화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물증거 위에 일종의 문화적 친연척도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이름체계(언어의 동질성 내포)까지 비슷하다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유물증거와 유럽의 눈을 통해 훈족을 기록한 각종 문헌들, 그리고 신라가야계통의 유물증거, 이름체계 증거 등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훈족은 바로 신라가야와 같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덪붙이자면 훈족과 흉노를 같은 계통으로 보는 시각이 그동안 우세했었고 저 또한 그 지리적 친연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흉노족들의 이름체계와 훈족-신라가야의 이름체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눈여겨 본다면 훈족신라가야는 분명 흉노와는 다른계통임을 확신합니다.
다음은 훈족과 헝가리의 어원 분석입니다. 훈(Huns)의 뜻을 우리 국어학자들과 헝가리 학자들에게 동시에 묻는다면 어느쪽에서 나오는 대답이 더 정확할까요? 뻔하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 견해이지만 "한, 칸, 간"등 우리와 몽골계통에서 사용한 임금 명칭에 나오는 모음 "ㅏ"는 원형이 "아래아 . "에 가깝다고 봅니다. 많다 또는 크다 라는 의미의 "하다"가 아래아모음의 "ㅎ다"와 일맥상통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놀랄 정도로 아래아 발음을 자연스럽게 통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유럽인들이 "한. 또는 ㅎㄴ"(aㅏ와 o ㅗ의 중간발음)을 그들식으로 발음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모음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영어의 예로 든다면 "a e i o u" "Han, Hen, Hin, Hon, Hun" 정도인데, 이것을 인도유럽어족의 사람들에게 발음하게 해보면 틀림없이 "Hun" 을 가장 편하게 발음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따라서 "훈족(Huns)"명칭에서 "Hun"은 다름아닌 "한,칸,간"을 의미하는 우리말입니다.
헝가리 학자들은 "헝가리(Hungary)" 의 어원을 "온오구르(On ogur)"로 해석합니다. 헝가리어의 언어계통은 우랄어계인 핀위구르어로써, 그로부터 헝가리 학자들이 "On oguur"를 어원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을 차지했던 여러 민족들(유목민들)의 광범위한 이동교차를 생각한다면 헝가리 학자들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견해 역시 부분적인 것이라는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가리(gary, gari)"라는 단어는 누구라도 "고려,고리,가우리,구리"등과 일맥통함을 느끼실것입니다. 아마도 이말은 우리말 고어에서 "영역"이나 "나라"의 의미를 가진 일정한 명사형 뜻을 내포 했을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따라서 제가 내린 결론은 "헝가리(Hungary)"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한땅<한국"이 됩니다.헝가리 학자들이 주장하는 "On ogur"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의미가 해석된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훈족은 아틸라(제 추측으로는 아딜라가 우리말 원형에 더 가깝습니다) 대왕 사망 후 구심점을 잃고 역사에서 사라져 미스터리로 남게 되고,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 기원후 천년 전후로 예전의 훈족 후예들과 주변 제민족(이란계 알란족을 모계기원으로 본다)들로 이루어진 헝가리민족을 기반으로 중세국가가 성립되게 됩니다. 아틸라 대왕이 유럽에 남긴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는지(기독교에 근거한 주변 유럽국가들 틈에서의 생존문제는 헝가리인들에게는 업보였을 것이므로), 헝가리 학자들은 훈족의 직계후손(동양계 후손)을 꺼려 하며, 민족뿌리를 이란계 알란족 등에서 찾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고 헝가리인들 역시 터키인들이 우리를 형제로 부르는 것처럼 그들은 자매나라로 생각하는 뿌리 깊은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 신화속에 등장하는 아틸라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제 추측으로 아틸라를 비롯한 훈족들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반항하는 자들에겐 철저하고 잔인하게 응징했지만, 귀화하는자들은 훈족과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는 사십입니다. 우리 고대 선조들의 특징도 그러했듯이 중앙아시아의 타 민족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을것이라고 봅니다. 아틸라대왕이 출정할 때 실제 훈족 병사의 숫자는 8000~10000명 정도로써, 백분율로 보자면 전체 병사의 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현대 헝가리의 민족구성 역시 주변민족들의 혈연도가 훨씬 높을것이라고 봅니다.
이상 저의 짧은 분석입니다. 훈족의 위대한 유럽 점령의 역사는 요즘 각종 증거유물들로부터 새롭게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징기스칸 이전에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놓은 소수 영웅집단이 우리 한민족이었다는 것은 우리학자들과 헝가리 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삼국 초기 중국 사서 기록에 고구려에는 "좌식자(생산활동하지 않는 자들, 아마도 전사계급)" 무리가 수만을 헤아렸다는 것을 보면, 훈족의 특성도 파악되리라 봅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들(유목농경 복합사회)은 사회적 이합집산의 속도가 세계 어느곳보다 빨랐을 것이고, 훈족의 활동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헝가리 정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들의 역사를 보면 기원후 천 년경부터 시작됩니다. 정말 아쉬운 부분입니다. 헝가리인들도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밝히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헝가리인들의 피속에는 비록 얼마 되지 않을 지라도 한국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자명합니다. 유전적인 연구도 병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필자; empeior 08.03.04 19:40
출처; https://cafe.daum.net/malaysia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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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 제왕' 아틸라, 동·서로마 무너뜨려 유럽 지형 리셋
중앙선데이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2020. 11. 14. 01:13
민족 대이동, 현 국가 위치로 정착 / 아틸라, 신사적인 영민한 리더
사가들 혹평과 달리 포악 안 해 / 동로마 두 차례 정벌 후 속령 삼아
'팍스 로마나' 해체 뒤 중세 시작 / 아발·불가르족 등 고조선 후예
유럽 진출 길 열어주는 역할도
훈족 제왕 아틸라는 서양 사가들의 편견에 찬 혹평과 달리, 최후의 시기만 보아도 스마트하고 위풍당당하며 매우 영민한 리더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디시우스2세는 콘스탄티아 평화조약을 잘 이행하지 않았다. 훈 제국 고트족 출신 장수를 송환하지 않고, 도리어 훈 제국 공격용 장수로 기용했다. 동로마 마르고스(Margos) 주교의 동로마 영내 훈 왕족 무덤 도굴 사건이 발생하자, 아틸라는 441년~442년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1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아틸라 군대는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접근했다.
위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서로마 군사령관 아에디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에티우스가 달려와 아틸라에게 자기 아들을 인질로 맡기며 사정하여, 평화조약 준수를 서약했다. 아틸라는 국경지대의 동로마 측 군사 요새를 모두 파괴하여, 훈족에 대한 침략 진지를 없애버린 후에 443년 전선에서 귀환했다.
10만 기병 이끌고 이탈리아 진군
445년 형 브레다가 사망하여 아틸라가 훈 제국의 단독 제왕이 된 후에, 아틸라가 전쟁을 자제한다는 사실을 안 동로마는 또 조공 공납금 지불을 미루었다. 도망해 들어간 훈 제국 신민 게르만 족 병사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평화조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아틸라는 446년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2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속속 아틸라에게 항복했다.
매우 다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보내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동로마의 조건은 ①국경선에서 동로마 쪽으로 5일 거리 이내의 비무장지대 설치
②전쟁 배상금 황금 6000 리브레(약 2700kg) 지불
③매년 조공액 3배 인상, 2100리브레(약 945kg)씩 공납
등이었다. 이렇게 ‘아나톨리우스 협정’은 전쟁 배상금 지불까지 서약을 했으니 객관적으로는 ‘항복’이었다. (약속만 지키면) 동로마 제국은 훈 제국의 속령이 된 것이었다.
아틸라는 참혹한 전쟁을 피하여 동로마의 ‘항복’을 받고 전투 없이 귀환하였다. 449년 테오디시우스는 환관들과 아틸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 훈의 사절단 일원인 에데콘을 매수하고, 하수인으로 동로마 통역 비길라스를 시켜 아틸라를 시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동로마의 음모를 모른 채 친선사절단에 동행한 인물이 당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에데콘은 동로마 친선사절단이 아틸라의 궁전에 도착하자 암살 음모를 아틸라에게 고해 버림으로써, 암살 음모는 무산됐다.
아틸라는 451년 원정 구실로 로마의 속령 갈리아 지방을 호노리아(Honoria)의 지참금으로 요구하면서 20만 명(훈족 기병 10만, 동고트 등 게르만 족 보병 10만)을 인솔하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지방으로 향했다. 서로마의 군사령관인 갈리아 총독 아에티우스가 20만(로마군과 서고트왕 데오도리크의 군대, 절대다수가 보병) 대군을 인솔하고 대응하였다.
대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있었다. ‘카탈루니아 대전투’ ‘살롱 대전투’라 부른다. 양축 군은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에드워드 기본에 의하면 하루 전투에 16만2000명이 전사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서양 사가들은 로마가 처음으로 아틸라를 참패시킨 승리라고 썼다. 증거로는 아틸라 군대의 철수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훈의 기병대는 전진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해서 뚫리지 않으면 철수하여 다른 뚫릴 곳을 공격한다. 철수가 전혀 패전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 연구는 이 전투에서 서고트왕이 전사하고, 서로마 사령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아틸라군이 철수했음이 밝혀졌다. 구태여 승패를 더 따진다면 전사자 대부분은 양측 보병들이었고, 아틸라 기병대는 병력을 대부분 온존시킨 채 철수한 것이었다. 그 증거는 1년 후에 나타났다.
452년 아틸라는 훈족 기병 10만을 인솔하고 방어가 약한 서로마 제국 본국(지금의 이태리 반도)으로 진군했다. 서로마 황제는 갈리아 총독·군사령관 아네티우스에게 긴급방어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황제에게 긴급히 안전한 동로마 제국에 피란할 것만 권고하고 출병하지 못했다. 아직 ‘카탈루니아 대결투’의 손실을 회복하지 못해, 출정해도 참패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의 기병부대는 첫 방어선 아퀼레이아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았을 뿐, 나머지 도시들은 거의 무혈 입성하였다. 당시 수도 베로나도 마찮가지였다. 아틸라의 군대가 지금의 밀라노를 점령한 후 로마를 향하여 남진하고 있을 때, 서로마 황제의 요청을 받은 바티칸의 교황 레오(Leo) 1세가 평화 교섭을 하러 아틸라를 찾아왔다.
레오 1세 교황과 아틸라 사이에 협약이 이루어지자 아틸라는 부하들의 항의를 달래가며 진군을 중지시키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레오 1세-아틸라 협약의 내용은 비밀에 묻혀 있다. 단지 레오 1세가 로마 도시 파괴의 방지를 요청해서 아틸라가 수용했다는 것과 아틸라의 다음 원정 행선지가 사산 왕조 페르샤 왕국이라고 말해서 서로마에 평화가 왔음을 알린 것뿐이었다.
레오 1세의 비밀협약은 무엇일까? 왜 서양 사가들은 밝히지 않을까? 필자는 서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 이상의 조건으로 아틸라에 항복했다고 추정한다. 그랬으니까 다음 행선지가 중동의 왕국이라고 교황에게 말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기병 부대, 철제 등자 등 유럽에 전수
아틸라는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의 궁전으로 귀환해 속령 게르만 족 제후의 딸 일디코(Ildico)와 결혼한 뒤 연회에서 술에 취해 침실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늦게 기척이 없어 호위병들이 들어가 보니 아틸라는 피가 흥건한 가운데 사망해 있었고, 신부는 울고 있었다. 아틸라의 죽음에는 독살, 복상사, 타살 등 각종 설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틸라의 죽음은 허망했지만 아틸라는 당시 동·서 로마의 어느 황제보다도, 당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의 어느 족장보다도, 잔인하거나 포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신사적이었다. 그는 누구도 암살하지 않았으며, 배신자 외에는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살해와 약탈은 게르만족 족장들이 자행한 것을 아틸라에게 돌려 기록한 것들이었다. 아틸라에 대한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틸라 사망 후 훈 제국은 아들들이 승계했으나, 지켜낼 능력이 부족해 469년 멸망했다.
아틸라의 ‘훈 제국’은 단명했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유럽에 민족대이동을 일으켜 전체 유럽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훈 제국 이후의 유럽 각 민족 이동 결과, 정착지가 지금의 각 민족과 국가의 위치가 되었다.
둘째, 로마 패권 하의 평화체제(Pax Romana)가 붕괴되어, 결국 고대 사회체제가 해체되고 중세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셋째, 동방 고조선 문명의 다른 기마민족인 아발(Avars), 불가르(Bulgars), 마잘(Magyars) 그리고 투르크(Turks) 족들의 유럽 진출의 길을 열어 주었다.
넷째, 군사 조직상 기병 부대의 편제와 전술, 기마 용구를 유럽에 전했다.
■ 호노리아(Honoria) ; 「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딸. 호노리아가 애인 시종무관장을 황제로 만들려다 음모가 발각되어 시종무관장은 처형되고 호노리아는 동로마에 보내져 14년이나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450년 호노리아는 자기를 구해 서로마에서 지위를 되찾아줄 인물로 아틸라를 선택했다. 정략결혼을 위한 청혼이었다. 서로마 제국 정복을 구상하던 아틸라는 이 청혼을 정략적으로 수락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는 놀라서 이를 수락한 후, 귀찮은 호노리아와 환관을 서로마로 환송해 버렸다. 」
필자;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