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것들은 고요히 익어갑니다
구공탄, 아궁이, 큰 누님, 냇가의 추억, 추석 보름날, 배고픈 시절, 회초리, 중학교 입학하던 날, 어머니 회갑연, 국민학교 풍금소리와 같은 글들을 보면 고향이 연상됩니다.
고향은 태어나 자라난 곳이며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유년기 힘들었던 시골을 떠나 도시로 진출한 경쟁사회 속에서 잠시 나를 내려놓고 주위를 돌아볼 때가 있는데 우리 마음은 자연스럽게 잠시 잊고 살았던 고향으로 향합니다.
얼마 전 백석 시인의 ‘고향(故鄕)’이라는 시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소개합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나 한즉/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필자는 부모님이 월남한 이북 2세로 실향민입니다. 평북 용천군 외상면 000번지는 저의 원적(元籍)으로 평생 잊지 못하는 주소입니다. 백석의 시를 보니 평안도 정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평소 홍경래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역사적인 정주성 함락을 안타까워한 모습이 생각납니다.
얼마전 필자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태어난 고장에 대한 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의중님은 1951년생으로 보성 벌교가 고향입니다. 특수학교 교장으로 퇴임후 고향에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벌교가 나쁜 의미로 주먹이 센곳으로 잘못 알려진 연유를 알려주면서 일제 강점기때 우리 조선인을 괴롭히던 일본군 헌병을 의협심으로 때려죽인 한 청년의 이야기에서 와전된 연유라고 하였습니다.
박광현님은 1935년생으로 개성시 고려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 소년때 남하하여 지금은 큰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입니다만 그의 마음은 늘 고향 개성에 가 있습니다. 그는 자서전 ‘고리고개에서 추리(醜李)골을 거쳐 뚝섬나루까지’에서 개성인의 특징으로 “자유주의 정신이 강하나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며, 뚜렷한 주체성, 절약과 검소, 신용과 신의 중시, 청교도적 결벽성, 비축과 저축, 철저한 자립정신, 협동정신과 상호협력에 바탕을 둔 철저한 자립정신”을 말하며 고향에 대한 포괄적인 정서적 접근을 하였습니다.
하순명님은 고향이 진도인 여류시인입니다. 진도는 진돗개와 강강수월래, 명량대첩축제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방낙조로 유명한 다도해의 한 섬입니다만 역사적으로 호국과 저항의 지역으로 알려진 예향의 고장입니다. 최근 하순명시인은 진도의 왜덕산을 소개하며 명량해전 당시 전사한 왜군들의 100여 시신을 진도 백성들이 잘 안장해서 ‘조선이 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왜덕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동안 반일감정 등으로 쉬쉬하다가 진도문화원 박주언 원장의 노력으로 무덤들을 확인하고 최근에는 한일 합동 왜덕산 위령제가 진도군 고군면 현장에서 엄수됐다고 합니다. 낯선 땅에서 건너와 온갖 만행을 저지른 타 지역의 군인들을 고향땅에 안장해준 진도군민의 높은 정신이 돋보입니다.
조미영님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2002년에 한국으로 온 탈북민입니다. 한국에 정착한지도 벌써 20여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고향에 대한 사랑은 (사)통일미디어에서 운영하는 ‘조미영의 청춘통일’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탈북한 분들과 북녘 고향에 대한 감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특집에 참여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탈북민들이 라디오를 통해 고향의 그리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보면 가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남북한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남북한의 이산가족 상봉과 교류만큼은 반드시 해결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틋함, 그리고 고향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뜻을 모아 마침 금년부터 ‘고향사랑 기부’라는 새로운 제도가 선을 보였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자발적인 기부를 통하여 건전한 기부문화를 바탕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현안에 대응하려는 취지입니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자체에 기부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지역의 재정 확충에 기여하고 지역소멸 등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것이지요.
뜻있는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며 ‘고귀한 것들은 고요히 익어가고’ 라는 박노해 시인의 글로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