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에서 보살이란 석가모니 부처님 전생의 수많은 생의 가기 다른 모습과 이름을 하나의 명사 '보살'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불렀으니.. 그때 보살이란 석가모니 전생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된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 보살이란 부처님 전생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북방의 대승불교에서 보살이란 부처님이 되기 전 모습으로 '선행'에 촛점을 주니..
지금 여기서 부처가 되겠다고 선행하는 불자들 역시 보살이라 불러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보살은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가 된다.
4홍서원에 나오듯 우리는 언잰가 부처님이 될 것이며, 부처님이 되려면 평서 선행을 많이 쌓아야만 한다.
하여 보살이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불자[우바이, 청녀]를 보살이라 칭하고, 남자[우바새, 청남]는 거사라 칭하고 있다. 내가 듣기로 일본이나 중국, 배트남, 티벳 등에선 여성 불자를 보살이라 칭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언어는 유행을 따르니 유행을 억지로 돌릴 필요는 없다. 다만 뜻은 바르게 알고 사용해야만 하리라.
초기 경전에 나오는 보살은 석가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요, 대승 경에 나오는 보살은 관세음보살처럼 마하보살이라 하여 보살 가운데 보살이 나온다.
한편 <금강경>을 보면 보살이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衆生)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도록 제도하리라.' 하여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했어도,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라는 나(相)가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 제3. 대승정종분>
그 뿐 아니라 대승불교에서 보살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더 고양되어
보살 가운데 보살인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같은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급이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은 귀의 대상이 되어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가 되었다.
하지만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과 보살님께 귀의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전자의 목표는 지금 여기서 부처가 되는 것인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서는 보살마하살을 그냥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불자이기를 서원하니..
수행하고자 앉아있는 불자가 아닌 사회에서 정의와 평화, 행복을 목표로 실천하는 불자가 되어..
그 모습은 기독교인의 실천과 비슷하다.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 불교 1800여 년은 처음부터 대승불교였는데.. 기독교와 같은 보살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나 불교 전성이었던 고려 그리고 불교를 박해한 조선은 모두 절대 왕권국가였다.
절대 왕권이다 보니 겉으로는 만 백성 모두가 자기 자식과 같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이 협력하거나 집회하는 것을 강제로 막았다.
그랬기에 참으로 민중을 위하는 보살 불교 운동을 벌이는 자가 나타나면 역적 모임을 한다 모함하여 극형을 처했다.
역사를 보면 왕에게 도전하려는 세력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승려들이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민중을 위한 보살심이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된 제도 속에 있었기에
20세기 한반도에 민중이 중심인 민주국가가 들어서기 전까지 진정한 보살행 모습은 개인적으로는 전해지고 있지만 단체적인 활동은 찾기가 어렵다.
그 말은 민주주의 국가는 보살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습에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불교는 아직도 보살행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과거와 별 차이가 없는 불교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세력이 보살행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인지 적극적으로 보살행을 추구하는 리더가 적을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기독교의 보살행에 많이 뒤쳐져 있다.
21세기 보살행은 부처님을 마음에 새기며 사회 속에서 정치, 경제, 교육 분야 등에서 권력자가 아닌 민중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이 아닐 수 없다.
냉정히 말해 대승불교 운동인 보살행은 부처님 보다 올바른 사회[정토]가 되는 것을 우선하는 불자 행동이다.
그 목적을 바르게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지만.. 부처님이 목표가 아니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