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의 없이, 그러나 거리를 두고
창조의 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이 무렵에 친했던 두 친구에 대하여 언급해 두고 싶다. 그들에게서도 배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때 우지(宇治) 분교에서 교토 대학 요시다(吉田) 분교로 옮긴 후, 3학년이 되어 대학 본교의 이학부로 옮겨서 수학을 전공한 나는 아키즈키 야스오((秋月康夫) 교수의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아키즈키 교수 세미나의 분위기, 거기서 내가 배운 것 등에 관해서는 나중에 ‘특이점 해소’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요시다(吉田) 산 기슭에 있는 지금의 교양학부로 옮길 무렵에 함게 수학을 배운 후지다 오사무(藤田牧)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사였다. 옷차림도 항상 단정했고 사고방식도 명쾌해서 학생이라기보다 어른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은 학문에서도 나타났다. 모호한 것을 한 가지도 남기지 않고 준엄한 태도로 일관되게 배우는 것이 그의 학습 방식이었다.
후지다를 중심으로 몇 명이 모여서 수학 전문서를 돌려가며 읽는 윤독회(輪讀會)를 만들었다. 그 모임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반나절 정도 폰트랴긴의 「연속군론(連續群論)」을 영어 원서로 읽으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후지다가 이 모임에 매우 열심히 참석한 데 비해 나는 가끔씩 빠지기도 하는 불성실한 회원이었다.
당시 내게는 이 「군론」뿐 아니라 다른 수학 전문서도 자세히 보지 않고, “이 문제는 이 아이디어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태연하게 말해 버리는 무책임한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면 후지다는 반드시 다음날이나 그 다음날에 문제를 자세히 푼 노트를 나에게 보여 주면서 “네 아이디어로 풀어 봤지만 그것만으로는 풀 수 없더군.”하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겸연쩍게 머리를 긁어야 했다.
수학에서는 90퍼센트까지 문제가 풀려도 나머지 10퍼센트를 풀 수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 10퍼센트를 풀 수 있을 거라는 억측을 하고 논문을 발표하면, 나중에 뜻밖의 대가를 꼭 치르게 된다. 실제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고민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수학자도 있다.
나는 후지다와 사귀는 동안 수학에서는 아무리 작은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또 한 사람, 같은 수학과 친구로서 인상 깊은 학생은 고바리 아키히로(小針曉宏)이다. 고바리의 아버지는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부터 엄한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고바리 집안의 엄격한 기풍(氣風)은 군인의 아들로서 자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인 모리타 집안의 엄격함과는 달랐다고 생각된다.
그는 수학과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문학을 좋아했다. 그가 쓴 소설을 가끔 읽었는데, 인간 심리의 질퍽한 부분을 드러내는 듯한 음침한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대체로 어두운 문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읽은 후에 상쾌한 느낌이 남는 밝은 문학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좋은 평을 해줄 수가 없었다.
때때로 “자네같이 이렇게 흙탕물에 흠뻑 잠겨 있으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겠군.” 하고 혹평을 했지만 그의 풍부한 감수성에는 마음이 끌렸었다. 그는 나에게는 없는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고바리와 둘이 중심이 되어 「Eous」라는 학회지를 만들 정도로까지 친해졌다.
이 학회지는 수학하고는 관계없이 급우들의 대화의 광장을ㅇ 마련하기 위하여 창간된 것으로, 고바리가 제안한 것이다. 창간호는 각자의 원고를 묶어서 회람하는 방식이었고, 제2호는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고바리의 뒤를 이어 나는 제2호의 편집장을 맡았다. 학회지에는 새로 앙케트 란을 만들어 “지금 10만 엔을 주우면 어디에 쓰겠는가?”, “군대 영장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등의 설문을 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바리와 함께 다음 호의 편집회의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또 한 가지 그에게서 배운 것은 배짱이다. 나도 데카탕스(Décadence)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빈축을 살 만한 일을 가끔 그와 같이 벌여 놓았다. 그러한 경험을 되풀이하다 보니, 남이 어떻게 보든지, 또는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다라는 배짱이 생겼던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술에 취해서 길거리에 벌렁 누워 버리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아무리 많이 취해도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비교적 정신이 멀쩡한 편이다. 그런데 그는 술에 취하면 길거리에 누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큰소리를 지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달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런 그를 혼자 놓아두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술이 깨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날이 밝아 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것은 나의 청춘시절 한때의 거칠은 추억이다.
하여간 인생에서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다가는 비약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것만은 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배짱이 필요하다. 그러한 배짱을 나는 그와 사귀는 동안 배웠다고 생각한다.(고바리는 교토 대학을 졸업한 후, 그 대학 이학부 조수와 교양학부 조교수를 지냈는데, 1971년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내가 고바리와 완전히 뜻을 같이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다양한 감수성에 끌리기도 했지만, 내 마음의 한구석에는 그의 그런 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어떤 사건으로 전교 수업 거부가 있었을 때 나 혼자만 교수실에서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단체 행동을 깨뜨릴 작정은 아니었고 단지 수업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노트를 보여 주기로 약속을 한 덕분에 단체 행동 파괴라는 비난은 면했지만 나의 그러한 면은 고바리와 사귀고 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완전히 그와 의기투합하고 있었더라면 강렬하고 자극적인 개성을 가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고, 그 후의 나의 인생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인 후지모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늘 심원한 명제를 놓고서 사색하던 후지모토와 친교를 맺고 영향을 받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흙냄새가 강한 철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맞는다든가, 의기투합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으로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을 삼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친구,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친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사귀어 왔다. 그 때문에 아주 친해지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세계에 친구가 들어오려고 할 때에는 단호히 배격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러한 교우 방법을 냉정하고 계산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이것을 지켜 왔기 때문에 남에게서 한 번도 배반당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약간 쑥스럽지만 내 사전에 ‘배반당한다.’라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때로는 속마음까지 털어놓고 개방적으로 대하기도 하지만, 나의 제일 중요한 주체성까지 영향을 받음으로써 나중에 후회하게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친하고 존경하는 친구더라도 그 친구에게 홀딱 빠져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친구 사이에 항상 어느 정도의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사귀는 나의 교우 방법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라고 하는 한 인간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내 방식이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영어에 loneness(고독, solitude)와 loneliness(외로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와 뜻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명확히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loneliness는 loneness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loneness를 잃었기 때문에 loneliness가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loneness를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사람과 어떻게 접하더라고 loneliness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편견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가진 중요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배우기 위해서도 자기 자신의 loneness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즐거움 / 김영사 1991년 판 / 히로나카 헤이스케(廣中平祐) 지음 / 방승양 옮김
※ 옛날 옛날에 깊이 묵상했던,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준 글이 있어 다시 생각해 본다.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는 죽음 이후의 일이다. 한때 내 카톡 대문 글이 "외로움은 혼자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고, 고독은 혼자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