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홍윤애기념사업회(대표 김순이)는 30일 오전 11시 ‘제6회 의녀 홍윤애문화제’를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홍윤애 묘역에서 제주도의원, 애월읍장, 애월문학회원 및 도내 문학인, 도민 등 200여 명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강선종 수필가의 진행으로 개최됐다.
의녀홍윤애기념사업회는 ‘제6회 의녀 홍윤애문화제’를 개최하고 기념 촬영을 했다.
강선종 사회자는 “제주역사에서 의녀 홍윤애 만큼 제주여인의 기개를 드높인 여인은 찾아볼 수 없다..“며 ”진주에 논개가 있다면 제주에는 홍윤애가 있다. 남원에 춘향이가 있다고 하나 그것은 한갓 소설이요, 홍윤애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이다.“라고 소개했다.
제향은 초헌관 김순이,아헌관 김봉오,종헌관 박병직,고유문 낭독 한 김정희 시인,좌집사 고경화,우집사 오석환,집례는 김원순 회장이 진행했다.
강재섭 애월읍장을 비롯해 애월문학회장, 도의원 등이 배려를 했다.
이어 제1부 제향에는 초헌관에 김순이 의녀홍윤애기념사업회 대표, 아헌관에 김봉오 제주문화원 원장, 종헌관에 박병직(밀양박씨종친회 종중), 낭송에 김정희 시인, 죄집사 고경화 전 제주향교 의전수석장의. 우집사 오석환 전 제주향교 의전장의. 집례는 김원순 제주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진행했다.
홍윤애 역에 시낭송가 문선희, 조정철역에 연극배우 이병훈 씨의 시극 ‘부활하라, 사랑!’를 연출했다.
박연술 무용 안무가는 홍윤애의 영혼을 위무하는 진혼무 영세불망(永世不忘)를 공연 했다.
이어 2부행사로 홍윤애 역에 시낭송가 문선희, 조정철역에 연극배우 이병훈 씨의 시극 ‘부활하라, 사랑!’를 연출했다. 박연술 무용가는 홍윤애의 영혼을 위무하는 진혼무 영세불망(永世不忘)를 연출 했다. 나종원 씨의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애절한 ‘동심초’를 연주했고, 서란영 씨의 펜풀륫으로 ‘그대 그리고 나’를 연주했다. 끝으로 고경권의 하모니카로 ‘사랑이여’를 연주하여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나종원 씨는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애절한 ‘동심초’를 연주했다.
고경권씨는 하모니카로 ‘사랑이여’를 연주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고 주최한 의녀홍윤애기념사업회측에 의하면 “의녀(義女) 홍윤애(?~1781)는 조선시대 정조 때 제주목에 살았던 여인으로 반역죄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왔던 조정철(1751~1831)이 모함에 걸려 죽게 되자 그를 살리려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순절, 제주여성의 정의로운 기질과 당찬 기개를 널리 알린 제주여성의 표상이 되는 여성이다.”라고 밝혔다.
“의녀(義女) 홍윤애(洪允愛)는 조선시대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연간에 생존했던 제주여인이다. 그녀는 반역죄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 온 젊은 선비 조정철(趙貞喆)을 뒷바라지 해주다가 그 인품을 존경하게 되고 마침내는 사랑하게 된다.”며
서란영 씨는 펜풀륫으로 ‘그대 그리고 나’를 연주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관리가 아니고 부귀와 명성을 누리던 양반이나 선비도 아닌 조정철은 보통 죄인이 아니라 임금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대역죄인이었다. 살아있으나 산 목숨이 아니요, 머지않아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찾아온다고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용서받을 길 없는 중죄인이었다.”고 했다.
이어 “홍윤애는 목사 김시구가 권력을 이용, 유배인 조정철에게 저지르지도 않은 혐의를 걸어 오랜 정치적 숙적(宿敵)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갈파하고, 고문과 회유에도 휘말리지 않는 대차고 명철한 여성이었다. 또한 불의(不義)한 흉계에 항거하여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냈다.”고 했다.
이어 “홍윤애의 죽음은 역사성이 매우 강렬한 사건이었다. 증거도 없이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 처참한 고문으로 살육한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으로 번졌다. 제주목사·제주판관·대정현감·정의현감이 한꺼번에 모두 갈리고 안핵어사가 파견돼 와서 석 달 열흘 동안 철저한 진상조사를 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하여 조정철은 억울한 음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목숨을 건지게 된다.”고 했다.
이어 “이 사건은 홍윤애를 통하여 제주여성의 내면에 잠재된, 권력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기질을 널리 선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홍윤애의 고결한 정신과 거룩한 행위는 제주여성의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조명되어 마땅하다.” 고 밝혔다.
“홍윤애의 이야기를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찾아내 빛을 보게 한 데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순만(洪淳晩) 선생의 노력과 정성이 컸다. 또한 양주조씨대종회의 조원환(趙源煥) 회장의 적극적인 호응도 감동적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9일, 양주조씨 문중회에서는 구천을 떠돌던 홍윤애의 영혼을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에 봉안해 해마다 10월에는 제를 지내고 있다.”며
“조정철이 29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제주목사로 자청해서 돌아와 홍윤애의 묘를 정비하고 통곡하며 헌정한 묘갈명(墓碣銘)과 추모시는 ‘유배문학의 꽃’으로 국문학과 역사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답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어 “고통과 슬픔에 대한 성찰 없이 인생에 대한 이해는 완전할 수 없다고 한다. 사랑과 정의가 황금만능주의에 밀쳐져 가는 이 시대에 의녀 홍윤애가 죽음으로 일궈낸 사랑의 가치와 정의에 대한 기개야 말로 우리가 되살려야할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홍윤애는 김만덕(金萬德)과 더불어 제주여인의 표상이 되기에 마땅한 여성이다. 그녀는 정의(正義)의 화신이며 불멸(不滅)의 연인이다.”며
이어 “의녀 홍윤애는 정조 5년 음력 윤5월 15일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의녀 홍윤애에 대한 인식과 정당한 평가가 확산되기를 바라며 제주바다를 건너 한국인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성으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며 주최 측은 밝혔다.
洪義女之墓
洪義女 鄕吏處勳之女 正宗丁酉 余以罪置耽羅 義女時出入余謫 辛丑 壬人欲搆余以義女作餌殺 機墮突血肉狼藉 義女曰 公之生在我一死 旣不服 又雉懸而殉 閏五之十五日也 後三十一年 余蒙恩以防禦來鎭 玆方象設墓道 系以詩曰
瘞玉埋香奄幾年
誰將爾怨訴蒼天
黃泉路邃歸何賴
碧血藏深死亦緣
千古芳名蘅荰烈
一門高節弟兄賢
鳥頭雙闕今難作
靑草應生馬鬣前
‘濟州牧使 兼 全羅道防禦使 趙貞喆 書’ 전문
홍 의녀의 묘
홍 의녀는 향리인 처훈의 딸이다. 정조 1년(1777) 내가 탐라에 귀양 왔을 때 의녀가 나의 적소에 출입하였다. 신축년에 간사한 사람들이 나와 의녀를 죄를 꾸며 죽이려고 형틀에 묶어 치니 혈육이 낭자했다. 의녀는 “공의 생사는 나의 죽음에 달렸다.”라 말하며 묻는 말에 불복하고 목매달아 순절했다. 이날이 윤5월 15일이다. 그 뒤 31년 만에 내가 방어사로 임명 받고 와서 묘 주위를 정비하고 시 한 수를 지어 붙인다.
구슬과 향기 땅에 묻혀 오래된 지 몇 해던가
그동안 누가 그대의 원통함 저 하늘에 호소했나
머나먼 황천길 누굴 의지해 돌아갔을까
푸른 피 깊이 묻혀버린 죽음은 나와의 인연 때문
영원히 아름다운 그 이름 형두꽃 향기처럼 맵고
한 집안의 높은 절개는 아우와 언니 모두 뛰어났어라
가지런히 두 열녀문 지금은 세우기 어려워
무덤 앞에 푸른 풀 해마다 되살아나게 하려네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 쓰다’ 전문
조정철이 세워준 의녀 홍윤애 묘갈(墓碣; 묘비)
□ 조정철이 세워준 의녀 홍윤애 묘갈(墓碣; 묘비) 번역 : 오문복
29년 만에 유배가 풀린 조정철(趙貞喆)이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1811)로 부임하여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내어 정비하고 위령제를 할 때 세운 묘갈에 새겨놓은 시. 이 비석과 시는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여인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비로 유배문학사에서 ‘유배문학의 꽃’으로 불리고 있다.
출처 : 미디어제주(http://www.mediajeju.com)
카페 게시글
제주-홍윤애
의녀 홍윤애기념사업회, ‘제6회 의녀 홍윤애문화제’ 개최
김어진
추천 0
조회 75
23.06.13 17:3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