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16
우리집에는 화분이 200여개쯤 있다. 벽마다 책장이 있고 바닥마다 화분이 있어 굳이 따로 인테리어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북테리어’와 ‘플랜테리어’만으로도 충분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화분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마음에 드는 꽃을 사다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주고, 약을 뿌려 진딧물을 제거했더니 우리집은 1년 내내 만화방창 호시절이다. 30여년 동안 수없이 많은 꽃나무를 죽이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한몫했다. 너무 크게 자란 나무는 잘라서 삽목하고, 열매가 달린 꽃은 씨앗을 받아 심은 결과 화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창가에만 있던 화분이 마루로, 각 방으로, 현관 입구로 빼곡하게 들어찼고 급기야는 선반까지 동원해 층층이 쌓을 정도다. 그야말로 집 공간이 책 반, 화분 반이다. 새 화분에 심은 꽃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최근에는 베고니아에 꽂혀 렉스 베고니아, 베고니아 마소니아나락, 베고니아 마큘라타, 베고니아 스노우캡 등을 샀다. 그런데 베고니아를 기르면서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찢어지고 상처 난 잎을 버리기 아까워 수태에 심었는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모두 새순이 나왔다. 심지어는 절반만 남은 잎에서도 새순이 돋았다. 줄기도 아닌 잎사귀에서 새순이라니. 질긴 생명력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나는 언제 저 잎사귀처럼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꽃이 좋아 길렀을 뿐인데 교훈까지 얻게 되었다. 어느새 꽃은 미세먼지를 제거해주는 공기정화 차원을 넘어 인생까지 정화해주는 가이더가 되었다.
▲ 전(傳) 강희안.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 15세기 중엽. 비단에 색. 17.9×24.2㎝. / 국립중앙박물관
선비의 유별난 꽃 사랑
조선시대에도 식물을 기르는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선비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평소에 꽃나무 기르는 것을 좋아해 출근하거나 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여쭙는 일을 제외하면 화훼 손질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 난초, 서향화, 연꽃, 치자꽃, 월계화, 산다화, 자미화, 석류나무, 귤나무, 석창포 등을 심고 가꾸었다. 친구들은 그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기이한 꽃을 구하면 그에게 주어 그의 집은 꽃이 더욱 많아졌다. 그는 꽃나무를 감상하며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었고 때때로 친구들과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의 꽃 사랑은 단지 꽃을 감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고 밤나무, 귤, 수박, 가지, 포도 등의 과일과 야채 등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물론 전하지는 않는다. 또한 꽃나무를 기르며 터득한 실증적 경험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적이자 농서(農書)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집필했다. ‘양화’가 꽃을 기른다는 뜻이고 ‘소록’이 요점만 간단히 적는다는 뜻이니 ‘양화소록’은 식물을 재배하면서 느낀 단상을 수필 형식으로 쓴 글이다. 수필 형식이라고 하니까 자칫 가벼운 글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꽃을 좋아하는 필자도 ‘양화소록’을 완독하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만만치 않게 어려운 책이다. ‘양화소록’에는 강희안 자신이 꽃나무를 기르면서 터득한 재배법과 함께 중국의 원예서적에서 발췌한 내용도 상당히 많이 들어 있다. 그가 책을 집필하면서 무수히 많은 참고문헌을 섭렵했음을 의미한다.
‘양화소록’에 대한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강희안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부터 감상해보기로 하자. 화면에는 높은 담장을 배경으로 오른쪽에는 소나무가, 왼쪽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그 가운데 두 시동이 서 있다. 시동 옆에는 괴석과 매화를 조합한 석분이 설치되어 있다. 특이하게 생긴 괴석이 하늘과 삼라만상이라면 받침으로 쓴 석분은 땅을 상징한다. 당시 궁궐이나 사대부가에서는 석분에 담은 괴석을 정원석으로 많이 들여놓았다. 조경 방법은 단순히 석분에 괴석만을 담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괴석 옆에 매화를 심어 조화를 이룬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림 속에서 시동 중 한 명은 석분 위에 올라가 매화 가지를 꺾고 있다. 석분 아래 서서 옆모습을 비춘 시동은 손에 꽃병을 들고 있다. 한 명은 매화 가지를 꺾고(折梅), 다른 한 명은 꽃병에 꽃을 꽂기(揷甁) 위한 동작을 그렸다. 여기서 우리는 시동의 역할이 차 끓이고, 말과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짐을 메고 주인 뒤따르는 일 외에도 집안을 꾸미는 플로리스트의 자잘한 일까지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절매삽병도’는 상당한 재력을 지닌 사대부가의 정원 풍경을 짐작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절매삽병도’는 그 제작자가 강희안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나오는 작품이다. 강희안이 그렸다는 제발(題跋)이나 낙관 등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희안의 작품으로 전칭된 이유는 그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원예서적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절매삽병도’가 독립된 작품인가에 대한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설서현은 ‘전 강희안 필 <절매삽병도>, <소동개문도>, <고사도교도> 연구’(2019)라는 논문에서 ‘절매삽병도’가 ‘소동개문도’ ‘고사도교도’와 함께 ‘고사방우도(高士訪友圖)’라는 한 작품에서 떨어져나간 조각그림(片畵)이라고 추정했다. ‘고사방우도’는 조선 초기 문인들의 누정(樓亭) 문화와 원예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누정 문화는 16세기 초반의 고위 관료들이 대저택에 원림을 조성하고 벗을 초대한 일종의 사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수려한 경관을 보면서 시문을 짓고 누정 주인의 신선적인 면모를 상찬하면서 친목을 도모하였다. 말하자면 누정은 시끌벅적한 음식점과는 차별되는 고급스러운 ‘살롱’인 셈이다. ‘절매삽병도’ 역시 손님을 초대한 장소에 분매(盆梅)와 절매로 데커레이션할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즉 원림에서 꺾은 매화꽃으로 장식을 하려는 것이다. 당시 문인들은 원림에 매화가 피면 벗을 초대해 매화를 감상하면서 시문을 짓는 것을 즐겼다. ‘절매삽병도’는 그런 문화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절매삽병도’의 세부.
강희안이 꽃나무를 기르며 배운 진리
필자는 베고니아를 기르면서 식물의 질긴 생명력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고 했다. 강희안은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간다. 그는 식물인 화초가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르고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꽃나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모두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화분에 물을 너무 많이 주어 과습으로 죽이거나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에 두어 진딧물의 밥이 되게 한 경험 말이다. 손만 댔다 하면 죽어 나가는 화분을 보면서 자신은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책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몰라서 발생한 사태다. 무릇 모든 일이 그러하듯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양생법을 터득하게 되는 법이다.
강희안은 꽃나무를 기르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등의 자연 이치를 통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면서 그는 꽃나무의 양생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여도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깨달음이 바로 주자(朱子)가 얘기했던 ‘격물치지(格物致知)’다. 격물치지는 강희안이 덧붙인 바와 같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미물이라도 각각 그 이치를 탐구하여 그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 상태가 되면 “그 지식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결국 “꽃나무를 통해 천성의 이치를 연구하고 나아가 자신의 본성을 인식함은 물론 천하를 다스리는 법에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강희안은 꽃나무를 기르는 양화의 목적이 “심지(心志)를 두텁게 하고 덕성을 기르는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이것이 바로 ‘양화소록’이 단순한 원예서를 넘어 철학서가 되고 인문서가 되는 이유다. 화분에 나무 몇 그루 키우면서 ‘수신(修身) 제가(齊家)’를 넘어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까지 연결하다니 진도를 너무 많이 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은 평범해 보이는 사물을 통해 궁극의 진리에까지 도달할 정도로 사유의 지평이 넓고 깊었다.
이제 다시 ‘절매삽병도’을 들여다보자.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강희안에게 격물치지의 논리를 체득하게 해주었을 화분 몇 개가 보인다. 강희안은 저 화분들을 만지면서 자신의 사고를 발전시키고 심화시켰을 것이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화분 몇 개가 알고 보면 큰 가르침을 준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다. 내 주변에는 이런 귀한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역병의 유행이 장기화하면서 ‘식물집사’를 자처하며 집에서 식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홈 가드닝’은 단순히 집안에 화분 하나를 갖다 놓는 차원을 넘어 자신이 기른 식물을 인터넷에 파는 부업으로까지 연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몬스테라 알보’처럼 몇백만원이 넘는 희귀식물은 없어서 못 팔 정도라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꽃나무를 기르는 일은 좋은 취미다. 여기에 강희안처럼 꽃나무를 보면서 격물치지의 이치까지 터득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