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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호미
헛간 구석에
낡은 호미 처연히 걸려 있다
삭은 손잡이에 녹슨 호미 날
육탈한 어머니의 손목뼈처럼 굳어 있다
햇볕 들지 않아 먼지만 뿌연 헛간
어머니 가끔 내려와
어둠 속 찬찬히 훑어보던 눈길 속으로
감자 싹 창백하게 트고 있다
고향 들판 속 구불거리는 밭길처럼
싹 구불거리며 올라오고 있다
어머니는 저 감자밭 속에서
한평생 호미질 하다 먼 길 가셨다
소나무의 벼랑
집채만한 바위에 붙어사는
그의 생애는 늘 위태로웠다
바위틈에 비좁게 다리를 세우고도
넘어지지 않는 끈질긴 집념 속에는
푸른 갑옷 같은 정신이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병 같지만
실은 황새와 놀 설렘으로 산다
설렘만으로도 소나무의 마음은 사시사철 푸르다
먹황새들 물똥 깔리고 날아가도
제비꽃 향기에 흠씬 젖다 놀다가는 나비 떼들 덕분에
뭉게구름은 눈부시게 희고
솔잎은 찬 서리처럼 빛난다
폐차장의 봄
한때는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것들
휘파람 불며 질주하던 날들이
녹슨 운명으로 끝날 때
인생도 필경 폐차처럼 변해간다
그래도 무덤은 운 좋게도
양지쪽 명당이다
바람이 음산하게 불고 가지만
제비꽃 숨어서 꽃눈을 뜨는 곳
살아나서 타이어처럼 굴러가라고
흔들어 깨어도
차갑게 식어버린 폐차
끝내 일어날 줄 모른다
콩꼬투리 1
콩꽃이 꼬투리를 맺었다
새끼콩들이 꼬투리 속에서 한가족을 이루었다
서열순으로 맺은 인연이 넝쿨처럼 늘어졌다
넝쿨을 탯줄삼아 영양을 불려가는 놈들
덩치가 커질수록
꼬투리 울룩불룩 배불렀다
언제 꼬투리 터질 줄 몰라
바람도 철조망을 흔들지 않았다
콩꼬투리 2
꼬투리가 콩을 뱄다
울퉁불퉁한 허리통 속의 젖빛 태아들
잔뜩 웅크리고 앉아
꽃핀 자리의 말씀을 듣는다
늘 예비하고 있어라
꼬투리 도둑처럼 터질 때
그 아래 험한 세상 건너뛰는 법을 배워라
(화요문학)
가을산의 내력
전쟁이 휩쓸고 간 것 같은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없다
온 산자락 피칠갑인데
저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군인은 눈에 띄지 않고
살육의 현장엔 구경꾼만 북적인다
가을이면 한바탕 터지는 저 사건
세상천지에
저런 이상한 혁명이 어디 있으랴
(작가회의 사화집)
저어새
그 놈은 늘 밥주걱을 입에 달고 다녔다
지독한 결벽증 환자였다
뜨신 밥 입에 넣어 주던
어머니의 밥주걱도 더럽다며
제 밥주걱만을 뻘 속에 갖다 댔다
밥주걱을 휘휘 저으면
물안개가 희뿌연 김처럼 솟아올랐다
하루 종일 바지락을 캐며
성큼성큼 뻘을 걸어 다녔던 어머니,
자식들 생계에 목을 맸던 어머니,
그 놈은 밥주걱으로
어머니의 하루치 품삯을 대신했다
뻘 속을 휘젓는 밥주걱에
물고기의 비늘이 밥알처럼 반짝거렸다
(시에 사화집)
오래된 열차
감꽃을 줍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보네
추억 한줄기 바람처럼 일으키며 오네
재봉틀처럼 털털거리는 쇠바퀴 속에
열차의 목쉰 소리가 들어있네
열차는 이미 늙었네
내 나이만큼 늙었네
오십 해의 세월이 흘러가도
철로변 민들레
역무원의 흰 깃발처럼 술렁이고
잠자리는 투명 날개 반짝이며 날아오네
감꽃을 먹다가
지나가는 열차를 보네
혀끝에 감도는 떫은맛처럼
열차는 떫은 세월을 싣고
풀뱀처럼 풀숲 철길로 사라져가네
추수 무렵
수수 모가지에 양파망이 씌어졌다
새털구름 향해 모가지를 흔들던
안락한 세월은 양파망에 갇혀졌다
모가지엔 새떼들이 쪼아 먹을 수수알만 가득
호시탐탐 수수알만 노리던
새떼들은 날아오지도 않았다
양파망이 벗겨지기도 전에
아버지는 낫을 들었다
곧 있으면 참수될 수수 모가지들
테러단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인질들처럼
수수 모가지 쓱싹 베어질 날도 머지않았다
들녘의 가을은 잔인하도록 청명하다
(시에)
파종
내가 흙과 사랑을 즐기는 날은 봄날이다
꽃들이 흥청거리는 밭두렁길 따라
느린 황소 탈탈 밭골을 탄다
쟁기질 하는 아버지 뒤를 따르며
밭골에 점뿌림을 한다
흙의 자궁에 씨 한 줌씩 넣을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번져오는 오르가즘,
내 사랑도 저랬었다
밤마다 아내와 가슴을 포개고 수없이 점뿌림을 했다
밭골에 생기가 돌면
꽃 피고 열매 맺는 재미에
푹 빠져 살 날이 올 것이다
(시에)
살구꽃 질 때
밝기로 친다면 수백 촉은 될 듯하다
산자락 뒤덮은 꽃불이 너무 밝아
거뭇거뭇 꽃그늘로 내려앉을 때 있다
산길에 도열한 살구나무 한무리
비바람 앞에서도 환하다
웬만큼 비바람이 불어서는 저 꽃불을 끌 수가 없다
꽃불이 꺼질 때는 단 한 번
세월이 짐짝처럼 무거워
지상에 한바탕 꽃무더기를 부릴 때이다
그때가 되면
봄날도 지쳐 벌떼처럼 웅웅 앓으며 먼길을 간다
(경남작가)
우시장
할 수 없이 그 놈을 우시장에 끌고 간다
갓 태어난 새끼 비척대며 따라 온다
제 어미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퉁퉁 불은 젖통 그리워 따라 온다
어서 가라, 이놈아
네 어미 내 아들 위해 팔려 가는 거다
치솟는 학비에 숨통이 막혀
그 놈을 나대신 끌고 간다
깡마른 나를 팔아 학비 댈 순 없지만
그 놈의 퉁퉁 불은 젖에 금값을 매긴다
찬 달빛 쓸고 간 우시장에
서늘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
새끼를 찾는 소리
그 놈을 보내고 잠 이룰 수 없어
다시 한 번 우시장에 가 본다
걱정마라, 이제 네 새끼도
너를 잊고 내 자식의 학비를 위해
열심히 여물통을 쑤시고 있다
(시선)
매미
한여름 매미는 편히 앉아 울지 못한다
도회의 불야성에 밀려 검찰청까지 날아 왔다.
왕벚나무 밑둥에 붙어 울부짖는 매미는 1인 시위자
그 애타는 호곡을 사람들은 소음으로 여긴다
시끄러울수록 외면하는 시대
차라리 입 봉하고 침묵으로 맞서라
검찰청 앞에서 마스크 하고 피켓 들고 서있는 여자
분노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매미의 울음소리보다 더 서슬퍼렇다
(대전문학 토론)
간이역
이미 인적 끊긴지 오래다
심심하면 철길에 내려와 놀던
고라니의 발길도 끊어지고
배롱나무만 역사 앞 외등처럼 불 밝힐 때
낙하산을 편 민들레 씨앗 느리게 간이역을 스쳐간다
그 옛날 추억 떠올라
철길에 살포시 앉았다 가고도 싶었지만
서로 부등켜 않고 뒤엉킨 잡풀들이
쉴 새 없이 바람을 일으켜
민들레 씨앗들을 멀리 철길 밖으로 밀어낸다
푸른 하늘은 가슴을 벌려
적막을 가슴 속 깊이 끌어않고
역무원의 흰 깃대 하나
기차를 기다리듯 철길에 나뒹굴고 있다
뻐꾸기만 흐느껴도 기차는 올 듯
마음 길 따라 아득히 울려 퍼지는 기적소리
철길 녹슬어 기차 뚝 끊긴지 오래지만
저 혼자 붉어 쓸쓸하던 배롱나무 시들어
꽃잎만 사무치게 흩날리고 있다
간이역
간이역에 생강나무꽃 노란 횃불 쳐들었습니다
손깃발 흔드는 역무원이 보고 싶어도
승객조차 없는 날이면
흥건한 꽃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철로의 침목은 낡아 가도
생강나무만 끝까지 남아
간이역을 수호신처럼 지켜 주고 있습니다
폐역
한번 폐역이 되면
역은 세월속에 묻히고 만다
햇빛 뒹굴던 철로엔 풀들이 번져가고
열차 바람에 제몸 흔들던 코스모스
무심히 꽃씨만 흩뿌린다
늙은 역무원 살살 손깃발 흔들 때마다
완행열차 느릿느릿 멈춰서던 곳
지루하게 열차만 기다리던 역은
그리움에 지쳐 늙어만 간다
하루에 한 번씩 열차가 서더라도
서러워 않고 온몸으로 맞는다
살살 손깃발 흔들던
역무원의 눈웃음처럼 맞다보면
언젠가는 폐역에도
집 떠났던 나비 살랑거리며 날아올 거다
장독대 옆에 올망졸망 무리져 폈던 맨드라미도
불콰해진 얼굴로 뜨거운 손 맞잡을 거다
한낮의 적막
녹슨 철길에 민들레꽃 향기 날리고
열차는 역 구내에 정차해 있다
설핏 낮잠이 들었는지
흰나비 풀풀 날아와 허리춤 찔러봐도
열차는 꼼쩍하지 않았다
공룡처럼 엎드려
민들레 향기만 킁킁거리고 있다
황간역
배밭 저 멀리 완행열차 달려오네
땡볕 등쌀에 팡팡 터진 배꽃 속으로
완행열차 달려오네
바람처럼 역 스쳐가는가 싶더니
긴 한숨 내뿜으며 멈춰선 열차
해바라기처럼 목 꺾고 졸던 역무원
깜짝 놀라 손깃발 살살 흔들려 뛰어가네
"잘 오셨습니다. 여기가 희망역인 황간역입니다,
종착역이 절망역인줄 모르니
백년쯤 푹 쉬었다 가십시오"
카랑카랑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승객들 녹작지근한 얼굴로 쏟아져 나오고
홑이불 같은 월유봉 노을 덮고
백년쯤 쉬어갈 준비를 하네
황간역 1
KTX 번개처럼 지나가는 곳이다
비둘기호 예전에 사라지고
무궁화호만 씩씩거리며 멈춰서는 곳이다
침목 틈에서 솟아오른 민들레
등 굽은 역무원의 흰 깃발처럼 흔들리는데
비둘기호 여전히 추억 속에 숨어 있는 곳이다
초음속을 꿈꾸는 세월속에서
사라진 비둘기호 추억 떠올릴 때 마다
낡아 가는 간이역 흑백 풍경처럼 머무는 곳이다
새마을호 폭풍처럼 지나가는 곳이다
민들레 꽃대 부푼 왕관 흔들면
씨앗들 뿌옇게 철길따라 흩어지던 곳이다
무궁화호만 거친 숨 팍팍 몰아쉬며
잠시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다
황간역 2
추억 속으로 비둘기호 풀뱀처럼 기어간다
침목 틈에서 흔들리는 민들레 꽃대처럼
늙은 역무원 하염없이 흰 깃발 흔든다
그때마다 환한 햇살로 내려앉는 고요
폐역이 되지 않기 위해 질주만을 꿈꾸지만
빠른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언제까지 간이역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시골역이라고 KTX 비웃듯 지나가도
무궁화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이
그래도 눈물 나게 살갑지 않더냐
늙은 역무원의 흰 깃발 그리우면
햇살 쏟아지는 황간역 그 철길에 나가
술렁설렁 꽃대 흔드는 민들레를 보아라
흰 깃발 향해 풀뱀처럼 달려오는
비둘기호의 순정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라
황간역 3
추억 속 비둘기호가 머무는 역에
아련히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무원
민들레를 닮아 등이 굽었네
나도 만들레를 닮아가네
무궁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에
늙은 역무원처럼 흰 깃발 흔들고 싶네
황간역
무궁화호만 잠시잠깐 쉬었다 가는 간이역
녹슨 철길에 호젓이 남아
추억을 불러모은다
햇살 쏟아지는 철로변으로
흰나비 정처없이 날아와
침목 사이 민들레꽃술 이리저리 찔러본다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던 늙은 역무원
잔주름 섞인 미소만 떠올려도
그렁그렁 눈물 맺히는 곳
무궁화호만 꿈결처럼 멈춰서도 좋아라
팔랑대는 흰나비와 한나절 놀다 가도 좋아라
저녁 열차
완행 열차가 고함을 지르며
모퉁이를 돌고 있다
재봉틀 소리를 내며 들판을 지나갈 때
가을은 수숫빛 노을 내리며 일몰의 시간을 갖는다
분 화장한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허리를 꺾는다
낮달이 하품을 한다
늙은 촌로 논두렁길 밟고 가듯
완행 열차 늘어진 몸통 끌며
흐릿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산그늘
철로는 늘 열기로 끓어올랐다
푹푹 찌는 폭염 속을
짓누르고 지나가는 쇠바퀴의 무게 때문이었다
고개 쳐들고 내지르는 기적소리는
철로변 코스코스를 긴장시켰다.
그 바람에 코스모스는 꽃씨들을 풀풀 흩날렸다
날이 갈수록 철로변은 슬픈 기운으로 감돌았다
철로변을 내려덮는 산그늘 때문이었다.
산자락 무너질 듯한 기차의 기적 소리에
철로는 평생 만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안고
산모롱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황혼녘 민들레
민들레는 녹 쓴 철길에서 늙어간다
급행열차의 쇠바퀴가 철길을 밀고 갈 때마다
민들레는 고독을 쓸어 모아 꽃을 피운다
꽃방석을 깔고 앉아
왕관처럼 부풀어 씨앗 날린다
고향집 툇마루에 등을 기대고 졸던 할아버지
반지르한 이마에 햇살을 쬐며
고향 떠난 내 새끼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철길 같은 위험한 세상의 길목 어디쯤에서
새끼들은 민들레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황간역
바람 들끓는 후미진 광장에 선다
탄차 몇 냥 뒹굴고 있는 철로 옆
바람 불 때마다 뿌연 탄가루 날린다
그 옛날 아련한 흑백들은 사라지고
가슴에 찬바람 든 듯 속이 시리다
정에 목말라 손 흔들던 친구들
완행열차처럼 미련 없이 떠나고
그 자리엔 57년생 전나무 하나 횅하니 서있다
떠날 것들은 죄다 떠났어도
전나무는 시퍼런 청춘으로 남아
거친 세월 타고 넘어온 저 고독을
느릿느릿 녹슨 철로로 실어 나른다
불러도 대답없는 메아리
지금쯤 어디에서 지쳐 쉬고 있을까
탄차들 널 부러져 있는 탄 더미 너머 산 쪽에서
절명한 듯 흐느끼는 뻐꾹새 소리 구성지다
봄꿈
열차가 구부러지며 모퉁이를 돈다
이제 늙었다는 뜻이겠지
쇠바퀴도 녹슬어 철걱대고
기적소리 노을에 날려 보내면
버릇처럼 눈시울 뜨거워지곤 했지
한물간 추억을 잊지 않으려
일기장에 지난 시절 끼적거릴 때
젖은 눈 속으로 밀물져오는 철로변 아지랑이
열차가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산 너머 달아난 봄꿈을 생각한다
민들레처럼 백발이 되어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무원을 생각한다
기차는 간다
만개한 코스모스 대열 속으로 기차가 간다
재봉틀로 박음질 하듯
철길을 누비며 달려간다
흐릿한 불빛 아래 달콤한 추억을
가슴에 묻으며 간다
김밥 먹고 배부르면
빽빽 기적소리 내지르고
달걀 먹고 체하면
간이역에서 쉬었다 간다
코스모스 꽃향기를 바지런히 날라 주는 기차의 일생을
감히 누구에게 비기랴
나는 남에게 꽃향기 같은 손길 전해준 적 있는가
재봉틀로 박음질 하듯
벌판 같은 남의 가슴 누비며 살아 본 적 있는가
꽃산행
쉼 없이 달리고도 지겨움을 모르는 것은
철길에 핀 코스모스 때문이다
꽃향기가 쇠바퀴를 감아 돌 때의 향긋함 때문이다
피곤하다고 덜렁 엎어져 자지 마라
간이역에는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너에게 달려가면 논일 하다 허리 쭉 펴는 엄마가 있다
모두들 꽃 산행 가자 야단인데
녹슨 철길엔 코스모스 꽃무리 한창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엄마
망아지처럼 자는 열차 채찍질로 깨워
꽃바람 싣고 엄마한테 달려갈게요
낡은 역
낡은 역에 열차가 묶여 있다
고향을 가고 싶어도 쇠바퀴 병들어 가지 못한다
병든 세월 속에 엎어져 자다 보니
코스모스 꽃향기만 날아와 쇠바퀴에 고인다
쇠바퀴 철걱대던 그날이 언제였더라
자작나무 숲 그늘 속으로 뻗어가던 철길은 안녕하신가
철길을 막던 뿌연 안개도 잘 있는가
꽃바람이 불어와도 꿈쩍 않는 열차의 등을
뭉게구름 내려와 솜이불처럼 덮고 있다
노모
올 여름엔 누가 온다고 했는지
노을이 유난히도 붉다
노모는 눈도 흐릿해 뿔테안경을 썼다
걸어다니던 골목길도 잃어버릴까 두려워
눈동자엔 잔뜩 핏발이 섰다
올해는 벌들도 더디 오는지
논둑길 콩덤불엔 냄새만 짙다
노모는 대문에 지팡이 걸쳐 놓고
오고가는 사람들 숫자를 센다
아카시아 꽃술에 앉은 도로변 먼지가
노모의 귀밑머리만큼 하얗다
봉숭아
꼬투리를 잡지 마세요
나쁜 짓 했다고 꼬투리를 잡으면
툭 터질지 몰라요
꼬투리 터지면 큰 일 나요
그 속에 쟁여진 울분이
씨알처럼 쏟아져 나오면
마당은 날아온 새떼들로 소란해져요
울분을 참는 소리들이 뒤섞여
허공으로 퍼지면
어느덧 서리는 내리고
꽃대는 힘없이 늙어가지요
아무리 울분이 하늘을 찔러도
절대 꼬투리 잡지 마시오
요즘 같은 세상은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지요
꼬투리만 잡다 툭 터지면
득볼 자는 아무도 없지요
밀원에서의 한 때
아카시아 꽃술만 보면 배가 고프던 시절이 있었다
음식이 넘쳐 흐르는 요즘은 거들떠 보지 않지만
그때는 아카시아 꽃술이 주전부리였다
튀밥처럼 희디흰 꽃술은 달고 달아서
벌들이 떼거리로 모여들었다
아카시아 밀원에서 놀던 때가 그립다
궁기의 저녁 한 때
아카시아 밀원 속에 들어가 꽃을 따 먹으면
배고팠던 시절이 더 아련해졌다
벌이 되어 노닐던 밀원에서의 한 때가
추억이 되어 내 머릿속을 하얗게 채웠다
별똥별 내릴 때
환해진 별무리 아래서
마당의 대추나무가 대추알 똥글똥글 매달았다
하늘의 별을 딴다고 일찍 가신 아버지
지금은 장대 삭아 지게 옆에 걸쳐 있고
고추잠자리 지게에 앉아 날개 팔랑이다 간다
아직도 대추알 떨어지는 소리를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개 패듯 장대를 휘두를 때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대추알들
아버지의 폭력을 지켜본 후로
해마다 이맘때면 대추나무에 가하는 폭력이 세다
책 읽는 밤
지하실에서 귀뚜라미가 끼륵거렸다
작년 가을보다 더 또랑거렸다
위층 사랑방에서는 성경 읽는 소리
그 소리에 맞춰 끼륵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누가 더 책을 잘 읽나
서로 내기 해보는 거 같았다
하늘엔 은하수 흘러넘치고
성경 옆구리에 끼고 동네 고샅길 도는 늙은 할매
귀뚜라미 소리가 할매 뒤를 따르며
돌돌돌 달빛 환한 고샅길 휘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