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들에서 띄우는 편지 2 ---산행의 즐거움 마루에는 오디가 가득 든 양푼이 놓여있다. 굵지도 않고 빼빼 말라 단물조차 싹 빠져나간 오디였지만 저절로 손이 갔다. 뒤안에 깔아놓은 망에 떨어진 오디들을 매형이 양푼에 주섬주섬 쓸어 모아 마루에 올려놓았는데 이것이 입이 심심한 사람들의 간식거리가 된 것이다. 마루에 앉아 오디를 맛보는 동안에도 뽕나무에서 떨어지는 오디들이 후둑후둑 양철지붕을 때리느라 시끄러웠다. 마루 아래 토종벌통에서 들락이는 벌들이 앵앵거리며 초여름의 흐린 날씨를 달구었지만 마루에 있는 오디에는 달라붙지 않았다.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벌들이었지만 오디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니 그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한 것이었다. 토종벌통에 날아두는 벌을 보며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누나가 화장실 벽을 가리켰다. 나무 둥치를 엮어 맨 틈으로 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다 새끼를 찾아 날아온 어미새가 가죽나무 끝에 앉아 꽁지를 까닥거리고 있다
“여기로 가끔씩 새가 날아 들어가는데 이 안에 새집이 있는 지 봐” 혹시나 하고 한 눈을 지그시 감고 나무 틈새를 들여 본 아내가 깜짝 놀라며 한바탕 웃었다. “고모, 저 안에 새끼가 있어요. 입을 쩍쩍 벌려요, 한번 봐요” “어디어디” 화장실을 시골스럽게 꾸미기 위해 벽돌로 벽을 쌓지 않고 굵은 나무 둥치를 덧대 테두리를 만들었는데 새가 그 틈새로 날아들어 보금자리를 튼 것 같았다. 나도 한 눈을 찔끈 감고 나무 틈새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새끼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작고 귀여운 노랑 부리만 허공을 향해 쫙쫙 벌리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산딸기 사람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어미를 애타게 기다리는 새끼들이 우리들을 눈물겹게 했다. 어미 새는 왜 하필 저렇게 사람들이 들락이는 곳에 둥지를 틀었을까. 숲이 울창한 산속도 있고 꽃향기가 머무는 나무도 있는데 하필 저렇게 위험한 곳에 둥지를 튼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일 뿐, 새의 입장에서 보면 화장실 옆 나무 둥치 틈새가 가장 안전한 장소인지 모른다. 떠들썩한 웃음소리도 가라않고 주위가 조용해질 무렵, 새 한 마리가 마당가 가죽나무 가지 끝에 앉아 꼬랑지를 까닥거리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아랫배가 황금빛이고 위쪽 날개가 까만,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쉴 새 없이 꼬랑지만 까닥거리던 새, 한 눈에 봐도 귀엽고 예쁘기 그지없는, 그 새는 새끼의 동정을 살피러 온 것 같은데 마루에 앉아있는 사람들 때문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그만 어디론가 포로롱 날아간 게 틀림없었다. 새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매형은 우리를 이끌고 산을 올랐다. 산에 지천인 오디와 산딸기 맛을 보여준다고 앞서 우리를 인솔한 것이다. 여기에 몇 번 왔었지만 산행은 처음이다. 사돈집과 누나네 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숲이 울창한 산속을 보면 여러 가지 산열매와 약초가 많이 자생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망초꽃이 씨앗을 날리고 있는 묵정밭을 타고 올랐다. 밭가에 드문드문 서있는 산뽕나무를 만났는데 나뭇가지에 매달린 오디는 따먹기도 귀찮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굵기도 잘고 빼빼 말라 입안에 넣어도 단물이 배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오디 속을 자잘한 벌레들이 기어 다녀 씻지도 않고 입안에 넣는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청정한 바람과 햇살이 머무는 산속인데도 뽕나무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돈 집 뒷길, 골짝 옆은 완전 산딸기 밭이었다. 빨간 열매를 매단 산딸기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져 산자락을 뒤덮고 있었다. 접근 금지를 알려주듯 산길을 경계로 쳐놓은 철조망이 앞을 가로 막았지만 난 빨간 산딸기의 빛깔에 유혹당해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일행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질 무렵, 윗쪽에서 날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어진 나뭇가지를 따라 조롱조롱 매달린 산딸기들, 햇살에 반짝이는 빨간 살결, 부드러운 촉감, 달콤한 맛, 무성한 산딸기 나무속을 휘젓고 다니다 보니 내가 마치 어릴 시절로 되돌아간 착각마저 들었다. 아득한 옛날 어린 시절에도 산딸기를 신물 나게 따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는 산자락에 널린 산딸기로 배를 채우곤 했다. 그때는 구황 대용으로 먹었지만 갖가지의 음식들이 입맛을 자극하는 요즘에는 순전히 건강 차원에서 먹는 일이 많았다. 똑같은 열매지만 서로 다른 세월 속에서 먹는 맛은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색다른 맛을 품고 있었다.
돌나물꽃 오솔길이 끊어진 곳에서는 울퉁불퉁한 넓은 길이 이어졌다. 벌목꾼들이 소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임시로 닦아 놓은 길이다. 한참을 올라갔더니 잔가지를 말끔히 쳐낸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어디론가 끌려갈 날을 잡아 놓은 듯 음울한 바람결만 스치는 산속에는 구슬픈 새소리마저 애간장을 녹였다. 더구나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로 앞을 막아서는 야생화는 내 마음을 몸살 나게 했다. 카이젤 수염처럼 휘어진 까치수영이나 보랏빛 가시로 무장한 엉겅퀴꽃, 오복히 모여서 핀 돌나물꽃, 어름 덩굴 등, 눈물 나게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뽑아 집 화단에 심고 심었지만 이내 욕심을 거두었다. 청정한 바람과 햇살을 받아 자라난 야생화는 공해가 많은 도회에서는 환경부터 달라 생각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것, 똑같은 꽃이라도 야생화는 야생화답게 산에서 꽃을 피워야 더 아름다움으로 다가선다는 사실은 꽃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느낄수 있는 일이다.
산딸기를 따고 있는 사람들
이렇게 재미있는 날이라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쓸쓸해진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울음을 내쏟으면 마음이 여간 심란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개구리 울음소리는 공허한 내 마음속을 더 시끄럽게 빢빡 긁어댔다. 집 앞에 벼들이 경쟁적으로 모가지를 빳빳이 세우고 초록빛으로 익어가는 다랑논들이 펼쳐져 있는 까닭에 개구리 울음소리는 아주 시끄럽게 들판 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오디를 따러 산을 오르는 여자들 울음소리만 들어도 개구리들은 지금 최고의 애절한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귀청이 아프도록 따가운 개구리 소리들도 그렇지만 가끔씩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는 더 애간장을 녹였다. 쿡쿡, 삐융삐융, 온갖 색다른 빛깔로 우는 새소리들을 들어보면 어둠의 한 가운데 떠있는 적막한 섬에 온 것 같아 갑자기 머리끝이 쭈볏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누나는 휘파람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전번에는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가 휘파람새 울음소리에 놀라 잠을 설친 적이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휘파람새 울음소리는 말이여, 여자를 유혹하는 소리라는 걸 몰라. 그 소리에 홀려 집을 나간 처녀들도 여럿 있다더군,” "어머, 그게 진짜냐. 거짓말 하는 거지" "농담이야" 그때서야 누나는 안심이 되는 듯 가슴을 쓸어 내렸다. 누나는 그 휘파람새 소리를 왜 그렇게 기분 나쁜 소리로 들었을까. 나는 풀피리처럼 맑고 고운 음색이 청승스러워 좋기만 한데, 그러고 보면 똑같은 새 울음소리도 사람에 따라 다른 빛깔의 소리로 들려오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