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병자를 만나면 신분이 귀하고 천하거나 사이가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부탁이 있으면 곧바로 갔다.
가면 반드시 마음과 능력을 다하여 병이 나은 것을 본 후에야 그만두었고 늙고 귀함을 핑계 삼지 않았다.
원래 말을 치료하던 백광현은 꾸준히 노력하여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어의로서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백성도 돌보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 정신을 생각한다.
정래교(鄭來僑) : 조선 후기의 여항 시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윤경(潤卿), 호는 완암(浣巖) 또는 현와(玄窩)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다가 인의(引儀)․찰방(察訪)․제술관(製述官)을 역임했다.
홍세태(洪世泰)에게 시를 배워 당대 문사들에게 홍세태를 잇는 시재(詩才)를 가졌다는 평을 받았다.
1722년에는 당화(黨禍)를 피해 계룡산 완암곡(浣巖谷)으로 피신하게 되어 완암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그의 시는 강개하다는 평을 들었고 중인층 가운데 뛰어난 예술가들의 전(傳)을 6편 남기고 있다.
시조가 3수 전하고 있으며, ≪청구영언 靑丘永言≫의 서문을 썼다.
백광현(白光炫, 1625년 ~ 1697년)은 조선 후기의 침의(鍼醫)이다. 처음에는 마의로 말의 병을 고쳤으나, 사람의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해 한의학에서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침을 써, 종기의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내 깊은 악성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렸다.
그 명성으로 그는 신의(神醫)으로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