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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회]
백우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2장이 넘는 호랑이 가죽, 더구나 표면에 눈곱만한 상처도 없다. 이런 가죽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다.
지금 백우인의 머릿속에는 상인 특유의 계산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휙휙 돌아가고 있었다.
신황은 약간은 차가운 표정으로 백우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다분히 연출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백우인은 약간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신황에게 입을 열었다.
“저.......저!”
“말하십시오.”
말을 더듬는 백우인의 말에 신황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백우인이 더욱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호랑이 가죽을 저한테 파십시오.”
“싫은데.”
“아.........아!”
단호한 신황의 말에 백우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말을 더듬었다.
백우인이 난주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작게 성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거절을 못하고 장사꾼답게 계산은 빠르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
너무나 모순적인 기질, 그것이 이제까지 백우인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신황은 백우인의 태도에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기세 좋게 호랑이 가죽을 팔라고 할 때는 언제고 거절 한마디에 저렇게 몸 둘 줄을 몰라 하다니. 보기보다 꽤나 순진한 사람이었다.
잠시 후 백우인이 다시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그러지 마시고 저한테 파........파십시오. 값은 잘 쳐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더듬거리는 목소리였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터지려했다.
“당신 상인이오?”
“그........그렇습니다. 난주에서 조그만 상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자 신황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마 예전에 아룡이 말한 우인이 아저씨라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더듬으면서 어떻게 성공을 했는지 모르겠다.
“값은 잘 쳐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저한테 파십시오.”
“그래도 안판다면?”
신황의 말에 백우인이 침을 삼키며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룡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최 씨 아저씨에게 말할 겁니다.”
협박치고는 매우 유치하다. 그러나 백우인의 성격에 이정도의 협박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난주에서 상회를 운영하는 그는 오직 정직과 신용으로 일관했지 감히 협박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훗!”
마침내 신황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의 순진한 친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팔지.”
“아.........!”
신황의 말에 백우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연거푸 머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에 신황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으니 그만하시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별것도 아니라니요. 이렇게 큰 호랑이의 가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이 듭니다. 더구나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가죽은............”
말을 하다 말고 백우인의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가죽을 어떻게 얻었을까? 활로 이런 녀석의 가죽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정은?
‘호랑이의 몸에 상처하나 남기지 않고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것도 맨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아룡이 이야기 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 보니 정말 숨은 고인이 아닌가.
백우인은 자신이 정말 아무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또다시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신황의 입가에는 의미한 미소가 걸렸다. 저 친구의 속은 정말 알기 쉽다. 생각하는 게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니 말이다. 때문에 먼저 그가 말을 꺼냈다.
“호랑이 가죽을 얻었다는 것을 비밀에 지켜준다면 당신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지 않을 겁니다.”
“예!”
그제야 백우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값을 쳐드려야겠군요. 보통 호랑이 가죽이 금 한 냥에 거래되니까 이렇게 큰 녀석의 경우는 금 다섯 냥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은 두 냥이면 다섯 가족이 한 달을 먹고살 수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런데 금이 다섯 냥이면 얼마나 큰돈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신황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십니까? 그럼 돈을 더······.”
“훗! 돈은 됐소. 이곳에서 생활하는데 돈이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럼?”
돈을 원했다면 호랑이 가죽을 넘기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십년간 세상을 떠돌면서 그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꽤 얻었고, 실제 그것들을 팔면 세상에서 말하는 잘사는 사람 분류에 들것이다.
때문에 그는 돈에는 별 미련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백우인이라는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때문에 호랑이 가죽은 그에게 선물하는 셈치고 싶었다.
“난 이곳에서 몇 년은 더 있을 것이오. 그런데 보다시피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별 환영을 받지 못해 생필품을 구하는데 꽤 어려움이 있소.
내가 원하는 것은 몇 년 동안 내가 필요한 물건을 구해다 달라는 것이오.”
“아...........!”
그제야 백우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리한 부탁을 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 부탁이면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야 저야 좋지만 너무 손해 보시는 게 아닐지...............”
“훗! 이곳에 사는 이상 돈은 별 가치가 없다고 보는데...............”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뭐든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백우인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죽을 싸게 구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난주에 있는 난주이가(蘭州李家)에 받칠 선물을 수월하게 구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난주는 감숙성의 성도로, 그곳의 지배자는 관이 아니라 난주이가였다.
비록 다른 무림의 세가들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세력이지만 최소한 난주에 사는 사람들의 생사여탈권만큼은 그들이 쥐고 있기에
백우인과 같이 조그만 상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적당히 기어야 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난주이가의 가주가 환갑을 맞이한다.
때문에 난주에 사는 상인들은 그의 생일선물로 모낼 선물을 구하기 위해 다들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우인도 마찬가지여서 무엇을 선물로 보낼까 고민하던 차에 신황이 잡은 호랑이 가죽을 본 것이다.
이정도면 난주이가의 가주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 틀림없었다.
신황은 좋아하는 백우인의 얼굴을 잠시 보다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찌 되시오?”
갑자기 나이를 묻는 신황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지만 백우인은 순순히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난 스물여섯이오.”
“예?”
“.................”
“아!”
백우인은 그제야 신황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왠지 그자신도 눈앞의 차가워 보이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 자신과 상반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때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말을 꺼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훗~!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호칭의 문제를 해결해야할 것 같아서.”
신황이 어설프게 변명을 쏟아냈다.
그는 눈앞의 순박한 청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왠지 끌리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뱉어내고 만 것이다.
“호랑이 가죽은 놓아두고 가. 내가 손질해줄 테니까. 그리고 내일 이곳으로 올라와. 술이나 한잔하게.”
“알겠습니다. 형님.”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신황,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백우인, 그것은 매우 이상하면서도 자연스런 광경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날 백우인은 한참을 신황의 통나무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내려갔다. 그를 환영하는 잔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황은 초대받지 않은 자리였다.
다음 날 저녁, 신황의 집에 백우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룡까지 있었다. 백우인의 손에는 자신의 집에서 파는 특산품인 매화주가 몇 병 들려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신황이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달랑 멧돼지만을 굽는 게 아니었다. 멧돼지의 갈라진 배안에는 여러 가지 과일과 천산에서 나는 약초가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신황이 천산에서 구한 것들을 모두 활용한 요리법으로 본래 그가 천축에서 배운 조리법중의 하나였다.
단지 재료만이 천산에서 나오는 것을 바뀌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어서 와라.”
신황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평상시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지만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만큼 그의 기분은 좋았다. 오랜만에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냄새가 좋군요.”
“정말요!”
백우인과 아룡이 고기에서 나오는 향긋한 냄새에 감탄을 했다.
노란 기름이 줄줄 떨어지는 고기에서는 과일의 향긋한 냄새와 약초의 쌉사름한 냄새가 섞여서 매우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그들의 코를 사정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앉아라.”
“예!”
마침 고기는 거의 다 익어서 노릇한 색깔을 띠고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바로 먹을 수 있었다.
고기에는 과일과 약초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가득베어 있어 한입 베어 물자 그 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향긋하면서도 달콤했다.
덕분에 아룡은 아예 고기를 접시에 가득 담아 얼굴을 처박은 채 먹는 데에만 열중했고,
신황과 백우인은 향긋한 매화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즐겼다.
봄의 길목에서 달밤에 마시는 술자리가 운취를 더했다.
그날 밤 그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매화주가 담긴 병은 모두 빈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룡은 골아 떨어진지 오래였고, 신황과 백우인은 얼큰히 취한채로 평상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달밤이 좋아. 특히 만월이 떠오른 밤이 말이야. 그래서 이곳이 좋아. 이곳은 내 고향만큼이나 밝은 달을 볼 수 있거든.”
신황은 벌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 올라와 있었다.
내력으로 취기를 억누르거나 주정을 발출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정말 취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도 이곳이 좋습니다. 이곳은 저에게 고향이며 마음의 안식처이거든요. 난주에서 이미 혼인을 하여 정착을 하였지만 이곳은 늘 돌아오고 싶은 곳입니다.”
백우인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장사로 어느 정도 작은 성공을 하였지만 상인의 삶이라는 게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법이다.
약간의 방심만 해도 기득권을 빼앗기고 치열하게 머리싸움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때문에 백우인은 항상 이곳을 그리워했다.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지 그러나? 그게 뭐 어려운거라고.”
“저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를 붙잡고 있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저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난주로 온 아내와, 너무나 약해서 약이 없으면 살수 없는 딸아이까지.
딸아이의 한 달 약값으로 들어가는 돈이 일반 가정집의 몇 달치 생활비입니다.
만약 제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그 아이의 약값을 어떻게 벌겠습니까. 그래서 전 난주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까요.”
주르륵!
딸 이야기를 하는 백우인의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처갓집의 모진 반대를 무릎 쓰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 일로 인해서 아내는 집안에서 쫓겨났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딸아이는 천성적으로 허약했다.
의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병명, 수많은 이름난 의원을 찾아다닌 끝에 알게 된 아이의 병명은 구음절맥(九陰絶脈)이었다.
구음절맥, 신체의 음기가 지나치게 강성해 해가 갈수록 전신의 심맥이 서서히 얼어 붙어가면서 마침내 죽음으로 빠져든다.
구음절맥에 걸린 사람은 스무 살 이전에 모든 심맥이 얼어붙은 채 죽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딸아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일곱 살 이전에 치료를 하지 못한다면 죽는다고 하였다.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매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백우인이었다.
백우인의 이야기를 들은 신황은 만월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구음절맥을 타고 난 아이는 천성적으로 뛰어난 오성을 타고난다 하였다. 하지만 음기가 지나치게 왕성해서 몸의 조화가 깨어져 죽는 것이다.
만약 몸의 양기를 복 돋을 수 있는 영약과 음기를 제어할 수 있는 고수가 도와준다면 살수도 있다.’
신황은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우인아, 지금부터 내가하는 말을 잘 듣거라. 구음절맥이 비록 천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고칠 병은 아니다.
만약 네가 양기가 가득한 영약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만년삼왕이나 구지영초 같은 영약을 구할 수 있다면 너의 딸아이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구음절맥의 음기를 제어할만한 고수가 도와준다면 천형을 털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 영약은 모든 돈을 털어 구한다 하더라도 구음절맥의 음기를 제어할만한 고수를 어디서 구합니까?
제가 알기로 구음절맥의 음기를 제어하려면 음공(陰功)에 통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데 그런 사람이 저 같은 상인의 부탁을 듣겠습니까.”
백우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구음절맥을 제어할만한 고수는 구대문파정도의 커다란 문파에 있는 장로 정도에 불과한데,
그들이 과연 변방에서 조그만 상회를 운영하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과 격이 맞는 사람이 아니면 만나주지조차 않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백우인의 말에 신황이 웃음을 지었다.
“넌 영약만 구하거라. 비록 구지영초나 만년삼왕이 귀하긴 하지만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물건은 아니니까.
그러면 그 후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해주마. 구음절맥의 음기 따위는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는 천산에서 월영심법을 익히는 그이다. 구음절맥의 음기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입니까? 형님.”
“그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또다시 백우인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솔직히 이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신황의 말은 그에게 또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딸아이의 나이 이제 두 살, 앞으로 사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는 반드시 그때까지 영약을 구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신황은 백우인의 얼굴을 보며 흐릿하게 웃음을 지었다. 비록 성격이나 덩치는 차이가 나지만 백우인을 보면 자신의 친동생인 원이가 생각났다.
아마 그 순박한 성격이나 나이가 비슷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우인이 남 같지 않았다.
그날 백우인은 밤새도록 신황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거의 포기하고 있던 딸을 구할 수 있다는 감격에 그는 하늘과 신황에게 감사를 했다. 덕분에 신황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백우인 그로부터 며칠을 더 탑리 마을에 머물렀다. 그리고 탑리 마을에 머무는 내내 신황의 통나무집에서 붙어살다시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뒤에서 숙덕거렸지만 백우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을 구할 수 있다는데 뭐가 두려울까.
신황은 그와의 작별선물로 그가 겨우내 잡았던 짐승들의 가죽을 주었다.
그가 잡은 가죽은 매우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백우인은 매우 감사해했다.
그는 신황에게 받은 가죽을 마을아낙들에게 맡겨 가공을 부탁했다.
비록 적게 만들어서 그렇지 이곳 탑리 마을의 아낙들이 가죽을 이용해 만드는 수제품들은
중원에서도 인기가 있었기에 백우인은 그들에게 고가의 임금을 주고 물건을 만들어 난주로 돌아갔다.
백우인이 돌아간 후 신황은 더욱더 월영인을 갈고닦는데 매진했다.
달이 뜨지 않는 날이면 그는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월영봉을 올랐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천이백장 높이의 절벽을 온몸에 팔십 근 짜리 쇳덩이를 매달고 오르내리는 것이다.
처음엔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질 뻔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다행해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를 붙잡고 멈췄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봄의 천산은 매우 위험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암벽 곳곳에 균열이가 쉽게 부서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황의 도전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는 몇 번씩 월영봉에 오르면서 전신의 근력을 키웠다. 그에 따라 그의 몸에 달린 쇳덩이의 무게도 더욱 늘어갔다.
지금 그의 몸에는 백오십 근 가량의 쇳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팔다리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도 조끼모양의 쇳덩이가 걸쳐져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이미 단련이 될 대로 된 그의 몸도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변화가 있었으니 바로 최 씨가 아룡이 신황에게 무예를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아들이 밤마다 신황을 만나러 간다는 것을 안 최 씨는 처음에 불같이 화를 냈으나 아들의 뜻이 너무나 확고한 것을 깨닫고 정식으로 신황에게 아룡을 부탁했다.
신황의 몸에 걸친 쇠 조끼도 그가 보답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퍽 퍽 퍽!
신황이 달릴 때마다 바닥에는 깊숙한 발자국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맨몸의 아룡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아룡은 아버지에게 솔직히 고백한 뒤로 이제는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이렇게 매일같이 신황을 따라 다녔다.
물론 월영봉에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이외에는 신황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무예를 배웠다. 덕분에 이젠 찌르기가 제법 틀이 잡혀 베기를 배우고 있었다.
삼재심법에 배우는 것은 오직 찌르기와 베기뿐. 그래도 아룡은 불평하나 하지 않았다. 그는 신황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찌르기 천 번에 베기 천 번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 몸에도 상당한 근육이 붙은 아룡이었다.
슈슈슉!
아룡은 정신을 집중해서 작년 겨울부터 자신이 찔러온 나무의 몸통을 찔렀다. 이젠 손에 굳은살이 박여 손바닥이 아픈 일은 없었다.
때문에 그는 하루에 천 번이 넘게 나무를 찔렀고 덕분에 나무의 몸통부분은 반 이상 움푹 패여 있었다.
신황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일지라도 남에게 가르치다 보면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배우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신황이 그랬다. 아룡에게 기본중의 기본을 가르치다 보니 자신도 이제껏 무심코 넘어갔던 부분을 많이 느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삼재심법이었다.
삼재심법은 천지인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심법으로 비록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오히려 그 단순함이 장점이었다.
단순하다 보니 잡것이 없고 깨끗하다. 때문에 모든 것을 아우를 수가 있었다. 때문에 요즘 신황은 월영심법에 삼재심법의 묘리를 가미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작년 겨울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엄청난 진전이었다.
그것은 신황이 천재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워낙 가문의 무예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월영봉의 수련으로 인해서 그의 몸이 무예를 익히기에 최적의 상태로 변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가문의 무공을 익히기에는 부적합하지만 어느 면에서 그의 몸은 육체가 단련할 수 있는 최고조로 활성화된 것이다.
요즘 신황은 달이 뜨는 밤에는 월영봉에 오르고 달이 뜨지 않는 날에는 이렇게 몸에 쇠 조끼와 각반 등을 차고 천산을 뛰어 다녔다.
목표는 바닥에 발자국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 바로 경공의 수련이었다. 그는 자신의 월영심법에 맞게 경공을 창안하려는 것이다.
덕분에 천산은 온통 그의 발자국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신황은 서두르지 않았다.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다고 할지라도 완벽하게 무예를 익히기 전까지는 세상에 나가지 않으려 작심한 이상 하나라도 완벽하게 만드는 것에만 신경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신황의 봄은 지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곳 천산의 짐승들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신황이 평소보다 짐승을 더 많이 사냥한다는데 있었다. 그와 의형제를 맺은 백우인을 위해서였다.
비록 난주에서 상회를 하고 있지만 구지영초나 만년삼왕 같은 영물을 구하기에는 그 수입금이 너무 적었다.
때문에 신황이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기위해 그러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그는 자신의 보따리에 꼭꼭 숨겨둔 물건을 처분해서라도 도와줄 용의가 있었다.
그는 결코 쉽게 정을 주지 않지만 일단 한번 정을 준 인물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우인은 대단히 행운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황에게 신뢰를 받으니 말이다.
여름이 되자 천산의 숲에도 푸른빛이 감돌았다. 이젠 이곳에도 약간이긴 하지만 더위가 찾아왔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신황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신황은 이제 집에 있는 날보다 밖에 있는 날이 훨씬 많았다.
이제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도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월영봉에서 보내거나 산을 누비며 수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아룡을 가르치는 시간이 적어졌으나 이미 아룡에게 가르쳐주려 작정한 것은 모두 알려줬다.
남은 것은 이제 그것을 능숙해질 때까지 수련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모두 아룡의 몫이었기에 신황은 이제 한결 편하게 자신의 수련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사사삭!
천산을 누비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신황이었다.
얼마나 깎지 않았는지 부스스한 머리와 수염, 누가 보면 천산의 설인이 나타났다고 오해할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적이 전혀 없는 이곳에 그를 볼 사람도 없었기에 그는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몸에는 변함없이 무거운 쇠 조끼와 쇠 각반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벌써 몇 달째 그렇게 무거운 몸으로 천산을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이제는 땅에 파이는 발자국이 한결 희미해졌다. 그만큼 그의 몸이 가벼워지고 경공이 발전한 것을 의미했다.
“음!”
신황은 요 며칠 계속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매우 은밀하면서 날카로워 신황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신황이 시선의 주인을 찾고자 하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시선의 주인이 신황의 시선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은신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을 천외천이라고 해야 하나?’
어이가 없긴 했지만 시선의 주인에게서 악의는 느낄 수 없었다. 때문에 신황 역시 시선의 주인을 억지로 찾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인연이 되고, 또한 시선의 주인이 나설 때가 된다면 나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황은 다시 월영봉을 향해 움직였다. 요즘 그는 다른 봉우리에 올라가느라 최근에는 월영봉을 올라가지 못했다.
때문에 오랜만에 월영봉을 올라가려고 마음 먹은 것이다.
신황은 월영봉 밑으로 다가와서 위를 올려다봤다. 아직도 윗부분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암벽이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뚜두둑!
신황은 잠시 몸을 움직여 뼈마디를 풀고는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고양이가 절벽을 오르는 것처럼 그의 움직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수십 수백 번 오르내리느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놀림이었다. 때문에 그의 움직임은 번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빠르기 그지없었다.
예전에 처음 오를 때는 거의 이틀이 걸렸는데 지금은 불과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상에 도착했다. 그만큼 그의 육체적인 능력은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신황은 오랜만에 월영봉의 정상에 서서 눈 밑으로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깨끗하고 맑은 날씨 때문에 저 멀리까지 펼쳐진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상 꼭대기에 홀로 존재하는 이 느낌은 그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역시 월영봉이 제일 좋구나.”
신황은 상쾌한 공기를 폐부 가득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어디를 가도 이곳만큼 신황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곳이 없었다.
때문에 신황은 드넓은 천산에서 이곳을 제일 좋아했다.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얼음이 녹아 물결을 찰랑이고 있는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오지 않은 사이에 완전히 얼음이 녹은 것이다.
“후후! 이제까지 호수위에서만 수련을 했지 정작 호수 안쪽은 어떻게 생겼는지,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구나. 몇 달이나 이곳에서 생활했으면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호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생각이 들자마자 신황은 주저 없이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벗어던졌다.
하늘아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그만의 전용 목욕탕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풍덩!
그는 물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뼈 속까지 차가운 기운이 몸을 엄습했다.
만약 그가 내력을 익히지 못한 일반인이었다면 심장마비에 걸릴 정도로 차가웠다. 밖은 여름 날씨지만 아직 이곳은 겨울인 것이다.
호수 물은 너무나 투명하고 깨끗해서 마치 거울처럼 깊은 곳까지 환히 보였다. 그런 물속에서 부유하는 느낌이 너무도 좋아서 신황은 한참을 물살을 가르며 유영했다.
그렇게 한참을 유영하던 신황은 이곳이 산 정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고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깊은 곳에 투명한 물고기들이 때지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립된 곳에 어떻게 물고기가 존재하는지 몰라도 굉장히 생명력이 강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겨울에 꽝꽝 어는 이런 곳에서 생존해온 것을 보면 말이다.
한참을 물속에 있다 보니 숨이 가빠왔다. 때문에 신황은 몸을 돌려 수면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가 월영봉에서 심후한 내력을 키웠다고 하지만 엄연히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 수면위로 올라가려던 신황이 잠시 몸을 멈췄다. 수면위에 낮선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녀석인가? 이제까지 날 따라다니던 녀석이.’
뜻밖에도 이제까지 신황을 따라다니던 은밀한 시선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신황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어디······.”
신황은 녀석을 만나기 위해 수면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
방이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월영봉,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무림고수들도 올라오고 내려가기조차 힘이 드는 이곳에서 순식간에 흔적을 감춘 것이다.
그것도 신황의 이목을 피해서 말이다.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군.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나에게 물을 먹이다니 말이야.”
신황은 순수하게 녀석에 대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건 정말 당할 재간이 없는 것이다.
잠시 물 밖을 바라보던 신황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다시 나왔다.
푸드득!
신황의 손에는 호수에 사는 물고기 몇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뭍으로 던지고는 다시 들어가 몇 마리 더 잡아 밖으로 나왔다.
월영봉에는 나무라고는 존재하지 않기에 신황은 그저 월영인을 이용해 물고기의 배를 따고 내장을 걸러낸 다음 회를 쳤다.
그렇게 십여 마리의 물고기를 다듬은 신황은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날로 물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사르륵!
물고기를 한입 베어 물자 살이 사르륵 녹으면서 그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비록 날로 먹지만 세상 어느 진수성찬에 비할 맛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에 사는 물고기가 답게 그 맛도 기가 막힌 것이다.
신황은 순식간에 네다섯 마리의 물고기를 해치웠다.
“훗!”
순간 신황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자신의 발밑에 드리운 바위 그림자 위로 녀석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신황이 아직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은밀한 눈으로 신황이 물고기를 먹는 것을 조심스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후후! 물고기가 좀 많은걸.”
신황은 기지개를 켜며 먹지 않은 물고기들을 옆으로 밀어놓고 팔베개를 한 후 드러누웠다.
그러자 녀석이 안절부절 못하며 망설이는 모습이 그림자를 통해 보였다. 신황은 미소를 띠고 그 모습을 보며 즐겼다.
바위 위의 그림자는 한참을 물고기를 보며 망설였다. 아마 꽤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신황은 물고기 한 마리를 집어 들며 그림자가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물고기 한 마리를 던졌다.
“배부르니까 다 못 먹겠는걸. 아깝지만 버려야겠군.”
말과 함께 신황은 남은 물고기를 차례차례 절벽 밑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림자가 움찔 움찔 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신황은 물고기를 절벽을 향해 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손에서 미끄러진 것처럼 해서 물고기 한 마리를 바위위로 던졌다.
“좋아! 이제 배도 부르니 수련을 시작해볼까.”
신황은 바위 위를 살짝 쳐다보고는 호수가 옆 공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월영인을 펼치며 한바탕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 형을 잡아가기 시작한 그의 월영인이 그 은밀한 모습을 보였다.
바람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은밀한 그의 월영인,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미친놈이 그저 손발을 휘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손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호숫가에서 월영인을 수련하기를 두시진, 온몸이 녹초가 되고 나서야 신황은 바위가 서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바위 위를 쳐다보자 이미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이 벌써 해치운 것 같았다.
‘정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군.’
두시진이나 수련을 했더니 또다시 배가 고팠다. 이끼로 대신할 수도 있었지만 신황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왔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불청객을 위해서였다. 그는 또다시 물고기의 내장을 손질하고 몇 마리를 날로 먹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던져주는 대신 한쪽 옆에 물고기를 밀어놓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위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쫑긋거리는 두 귀와 어른 주먹만 한 몸통, 눈처럼 하얀 털과 왕방울처럼 큰 눈이 인상적인 조그만 동물이었다.
마치 조그만 하얀 고양이와 같은 모습의 이 동물은 암향혈표(暗香血豹)라는 동물로 이곳 천산에서만 산다고 알려진 동물이었다.
이름 그대로 마치 어둠속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향기처럼 은밀하게 움직이며 눈이 덮인 천산에서만 사는 이곳의 영물이다.
이 녀석은 완벽하게 성장하더라도 어른의 주먹이상 안 크지만 성격만큼은 어느 육식동물보다 강하고
또한 빠르고 은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표범마저도 설설 피한다고 알려진 녀석이었다.
그런데 최근 수백 년 사이에 아무도 보지 못해 멸종했다고 알려졌는데 아직까지 생존한 녀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살아남은 암향혈표가 있었나?’
녀석이 정말 암향혈표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암향혈표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제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기척을 발견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신황이 돌아다니던 천산의 어느 숲이 녀석의 구역이었나 보다.
암향혈표는 처음 보는 낮선 침입자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이곳까지 은밀히 따라온 것이고.
비록 주먹만큼 조그만 녀석이지만 이삼 장 정도의 높이는 쉽게 도약할 수 있는 녀석이다 보니 이곳 월영봉도 수월하게 올라왔을 것이다.
암향혈표는 한참을 신황을 향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다 조심스럽게 신황이 잡은 물고기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서도 한참을 신황을 향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물고기를 물고는 사라졌다. 아마 절벽 어디선가 물고기를 먹을 모양이었다.
‘앞으로 심심치는 않을 것 같군.’
신황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신황은 모르고 있었다.
암향혈표가 따르는 자, 그는 평생을 피의 향기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천산의 전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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