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 재단법인 광주기독병원으로 변경
1968년 - 본관 4층(1,467평) 증축, 의료기구와 진료과목을 확충하여 종합병원으로 발전
1967년 - 이철원 선교사(R.B.Dietrick)가 제7대 원장에 취임하다.
수피아간호학교 개교(3월20일)
1966년 - 심부선(W.L.Simpson) 선교사가 제 6대 원장에 취임
수피아간호학교 설립 인가(11월)
1964년 - 흉부외과 개설[심부선 선교사(W.L.Simpson)]
1963년 - 소아과 개설
치과 재개설[유수만 선교사(D.H.Nieusma)]
1961년 - 외과 개설[이철원 선교사(R.B.Dietrick)]
1955년 - 결핵환자 전용병동 신축(주한 미군 및 육군의 지원- 3층, 781평)
1951년 - 고허번(H.A.Codington) 선교사가 제5대 원장에 취임하고 병원 재개원(9월)
1940년 - 프레스톤(J.F.Preston,Jr) 선교사가 4대 원장에 취임(1월)
일제에 의해 병원 폐쇄(11월)
1938년 - 부란도 선교사 별세(3월 1일)
1937년 - 간호사 기숙사 건축(8월)
결핵전용병동 증축
(Alex Pieters 선교사의 기부금- 1인실 6개, 식당, 주방, 욕실)
1936년 - 결핵전용병동(남한 최초) 건립
(타마자(J.V.N. Talmage) 선교사의 기부금- 병실 5개)
1934년 - 화재로 소실된 건물 터 위에 중앙난방시설을 갖춘 2층 건물(693평) 신축
서서평(E.J.Shepping) 선교사 별세(6월 26일)
1933년 - 그라함기념병원 건물 화재로 전소 (10월 26일)
1932년 - 간호부 양성소 개교
1930년 - 부란도(L.C.Brand) 선교사가 3대 원장에 취임하여 결핵환자의 진료에 헌신
1926년 - 윌슨원장이 광주나병원의 한센환자들과 함께 여수(애양원)로 이주
1923년 - 여계남(J.K.Levie) 선교사가 치과 진료 시작
1912년 - 영국 '극동과인도구라협회'의 지원으로 나환자를 위한 E자형 거주지(광주나병원)를 건축하고 본격적인 나환자 진료 시작
1909년 - 한센병 환자 진료 시작
1908년 - 우월순(R.M.Wilson) 선교사가 2대 원장에 취임
1905년 - 미국남장로교 의료선교사 놀란(J.W.Nolan)이 진료를 시작하다(11월 20일)
광주 기독병원 원장 계보
광주기독병원은 1905년 11월 20일 미국 남 장로교 놀란 선교사가 유진벨 선교사의 사택에 진료소를 개설하고 첫날 9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놀란은 개인 사정으로 2년 만에 사역을 그만두었다.
이어서 1907년 윌슨 (구월순) 선교사가 2대 원장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18년간 헌신하며 병원 규모로 성장시켜 실질적인 광주기독병원으로 만들었다. 1909년 건물 착공하여 1912년 1월 3층 건물을 신축하고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그레함 병원 (혹은 광주 제중원)으로 불렸다. 같은 해 광주 나병원도 건축을 마쳤다. 그가 재임 시기에 간호사 쉐핑(1912), 치과 의사 레버(1923)도 부임하여 함께 활동하였다. 윌슨은 1927년 나환자를 집중 돌보기 위해 애양원으로 이동하여 광주기독병원에는 몇 년간 선교사 의사 없이 한국인 의사가 환자를 돌보았다.
1930년 브랜드(부란도) 선교사가 군산에서 이동하여 3대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프리차드 간호사가 이 시기 부임하여 함께 활동했다. 1933년 화재로 병원이 전소되었으나 미국 선교부 후원 및 광주 시민의 자발적 헌금으로 건물을 재건하고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6년에는 당시 가장 병이 많은 결핵 전문 병동을 건축하여 환자를 돌보았다. 탈메이지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신축한 것이고 브랜드가 결핵 요양원으로 발전토록 심혈을 기울였다. 같은 해 에비슨 부인과 토핑 부인이 공동으로 유아 진료소를 매주 금요일 오후에 운영했다. 같은 해 프리차드 간호사가 간호사 양성학교를 시작하여 1937년 4명의 졸업생 배출을 시작으로 많은 한국인 간호사를 양성하였다. 그 후 피터스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간호사 기숙사를 완공하고 체계적으로 간호사 양성 하였다. 많은 활동을 한 브랜드 선교사는 애석하게도 1938년 건강이 악화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1940년 프레스톤 2세(프레스톤 선교사의 아들)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결국 그해 10월 병원은 폐쇄되고 말았다.
해방 전 광주기독병원은 국내 최초로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 치과 의사로는 레비 (여계남, 1923~)가 활동하고 이어서 뉴스마(유수만, 1963~)가 이어받아 사역했다. 또 간호사로 헌신한 선교사는 쉐핑(서서평, 1912~) 프리차드(변마지, 1932~) 등이 있다. 또한 지역사회의 의료를 책임질 한국인 의료인(의사, 간호사, 의료기사 등)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도 잘 감당했다.
《 원장 계보 》
1대) 놀란(1905~1907)
2대) 윌슨(구월순, 1907~1925), 간호사 (오웬 부인)
간호사 쉐핑(서서평, 1912~14, 1919~34),
치과의사 레버 (1923~)
* 1909년 건물 신축하여 1912년 1월 3층 건물 완공
* 윌슨 이동 후 5년간 의사 선교사가 부재
3대) 브랜드(부란도1930 ~1938)
간호사 프리차드 (1932~)
* 1933년 10월 화재, 1934년 12월 건물 재건
* 1936년 결핵병동 신설
4대) 프레스톤 2세(1940~)
* 1940년 선교부 철수 및 병원 폐쇄
5대) 코딩턴(고허번 1959~1966), 치과의사 뉴스마(1963~)
6대) 디트리히(이철원 1967~1976)
7대) 허진득(1976~) 이후 한국인 원장으로 운영
해방 후 1951년 5대 원장 코딩턴(고허번) 선교사에 의해 병원이 다시 개원하였다. 그는 결핵퇴치사업을 계승하여 헌신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였다. 또한 어려운 환자에게는 무료로 돌보아 62%가 무료 환자였다. 그래서 광주시민들로부터 《광주의 성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967년 카딩턴이 원장직을 내려놓고 결핵 파트만을 어려운 다루기 위해 내과만을 맡았을 때, 외과 과장으로 일하던 디트리히 선교사가 6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광주기독병원은 1970년 11월 미국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 유지재단에서 재단을 분리해 <재단법인 광주기독병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 허진득 박사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7대 원장이 되면서 한국인 중심으로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