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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야. 일어났어? 배 안 고파?"
"응... 좀 고프네. 지금 먹을까?"
"앉아 있어. 내가 할게."
마크와 지낸 지 며칠이 지나도 특별한 점이 없었다. 특이 사항이 있으면 보고해 달라고 했는데.
현재 3일 차. 지금까지 테스트해 본 다른 로봇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로봇 같지 않게 세심하고, 다정하고. 특유의 좀 딱딱한 말투를 제외하면 내가 로봇과 있는지, 사람과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너무 사람 같아서... 내가 좀 눈치가 보인단 말이지. 혼자 일하는 게 좀 신경 쓰여서 -애초에 로봇이라 힘듦이란 것도 모를 텐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일을 도울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마크의 일을 도와줬을 때, 마크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주, 왜 날 도와줘?"
"응?"
"왜 내 일을 도와주는 거야?"
마크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마크의 말투에는 그 어떤 불쾌함이 없었고, 시비조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그 질문 그 자체였다.
"음, 좀 신경이 쓰여서."
"... 혹시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널 신경 쓰이게 했어?"
"아니, 그런 신경쓰임이 아니라!"
마크가 오해하고 내 기분이 나쁘다고 인식할까 봐 재빨리 손을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냥, 음, 마크를 보면 도와주고 싶고... 나도 마크를 챙겨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지."
"상대방을 도와주고 싶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신경 쓰인다고 표현해?"
"그럴 때도 있지."
"알려줘서 고마워. 학습에 도움이 됐어."
왜 이렇게 마크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지, 신경 쓰인다는 게 뭔지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생각에 빠져 소파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마크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 됐어, 여주야."
"......"
"밥 먹을래?"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한 달 후에 헤어져야 하는데.
"아직도 졸린가..."
...... 정들 거 같아.
*******
테스트 8일 차.
"마크, 잠깐 산책 갔다 올래?"
"지금? 현재 11시 44분, 꽤 늦은 시간이니 나랑 같이 가자."
"그래. 나 준비 좀 하고 나올게."
테스트 중인 로봇과 함께 멀리 외출하는 건 안되지만, 숙소 근처 산책로를 걸어 다니는 것까지는 허용된다. 너무 멀리 경로를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가벼운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오자, 현관에서 마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야. 아까 비가 와서 여기가 좀 미끄러울 거야. 내 손 잡아."
마크는 내가 미끄러지지 않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일정한 체온의 큰 손이 내 손을 감쌌다. 마크는 나보다 항상 한 계단씩 먼저 내려가 나를 부축했고, 그 아무렇지 않은 다정함에 괜히 맞잡은 내 손이 뜨거워졌다.
나 진짜 왜 이래?
마크는 그냥 학습된 행동을 하는 거잖아.
미끄러운 대리석 계단을 다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있잖아, 서로 아껴주는 사람들끼리는 손을 잡는다고 했어."
"... 응?"
"난 여주를 아껴주고 싶어."
"......"
"그러니까 이번 산책은 나랑 손 잡고 걷자, 여주야."
쿵쿵쿵-, 눈치 없는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 그 특유의 다정한 눈 장착하고 저런 말을 하면...
마크의 프로그래밍 중에 저렇게 로맨스적인 대사가 입력되어 있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이건 특이사항인가? 보고해야 하나? 아니야, 마크는 늘 처음부터 다정했으니까... 그런데 로봇이 저런 눈빛까지 장착할 수 있단 말이야?
애써 진정시키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내 얼굴이 홧홧해지는 걸 본 마크는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쌌고, 손목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열은 나지 않는데 얼굴은 더 뜨거워졌어. 심장박동도 더 빨라지고. 그리고..."
"그만, 그만! 나 괜찮으니까 이제 걷자."
"응, 여주야."
내가 미쳤나. 마크는 로봇이잖아. 난 테스트 중이고. 제발 다른 생각 하지 말자, 제발...
*****
"여주야. 혹시 나랑 손 잡고 있는 게 불편해?"
"아니, 아니?!"
"다행이다. 난 여주랑 손 잡고 있는 게 좋아."
초가을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왔고, 하늘은 캄캄했지만 달빛은 밝고 날씨는 맑았다.
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집 안에만 있던 답답함을 모두 떨쳐냈다. 내가 아무리 집순이라지만, 가끔은 이렇게 바깥바람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냥 창문을 열고 있는 거로는 부족해.
괜히 신난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마크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며 내 손등을 엄지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가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미소에 나는 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솔직히 마크의 외모는 정말 심장이 뛸 정도로 뛰어나서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눈길이 갔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나는 마크가 저렇게 은은한 미소 말고,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게 보고 싶었다. 물론 로봇인 마크가 그렇게 웃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마크의 속마음을 듣고 싶었고, 마크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내 말에 마크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
"아니,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내 말은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거지."
"나는 행복하다는 감정을 잘 모르겠어. 난 행복하다는 걸 신체적인 변화로 알 수 있지만... 여주는 행복하다는 걸 어떻게 느껴?"
심오한 질문에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마크가 인간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극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이라지만, 감정은 몇 가지 학습으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느끼는 장본인인 사람마저도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게 바로 감정이기에.
"사실 사람인 나도 행복하다는 걸 뭐라 정의하지 못하겠어. 그래도 확실한 건 난 마크랑 있을 때 행복하고, 이 테스트가 끝나도... 마크가 어디에 있든 잘 지냈으면 좋겠어."
"... 테스트가 끝나면, 우린 못 보는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마주치긴 힘들겠지."
"... 그렇구나."
마크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내가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여주는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응?"
"여주는 꼭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행복이라는 게 무엇이든, 그게 여주가 바라는 거라면 다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심장은 더 거세게 뛰고, 코끝은 찡해졌다. 벌써 마크와 헤어질 미래가 아쉬웠다. 이렇게 다정한 마크는 누구에게 가게 될까. 다른 곳으로 가면 나는 잊을까? 로봇에게 추억과 그리움이 어떤 의미가 있냐만은, 그저 마크의 기억에, 학습된 알고리즘 한편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그래, 나 잊지 마. 어디 가서든. 그리고 당장 헤어지는 거 아니거든? 얼른 더 걷자."
괜히 눈물이 흐를까 봐 장난스럽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마크는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마크는 여주가 이야기를 할 때, 자꾸 머릿속에서 이상한 울림이 느껴졌다.
여주와 함께 있고 싶어.
여주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로봇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여주에게 말하고 싶어.
난 원래-
마크는 이상함과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잠시 제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리다 여주의 손에 이끌려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
슬슬 집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길 때쯤, 우리 앞에 익숙한 누군가가 나타났다.
"여주 씨,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마크 충전할 시간이라서요."
"아, 재현 연구원님! 죄송하긴요. 전 먼저 들어가 있을까요?"
"네. 충전하고 간단한 점검 후 돌려보내겠습니다."
여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본 재현은 한숨을 쉬며 마크를 잠시 절전모드로 돌렸다. 그리고는 정우가 준 약물이 담긴 주사기를 꺼냈다.
"... 4번째 투여 시작합니다."
작게 중얼거린 재현은 망설임 없이 마크의 몸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순간 감겼던 마크의 눈이 떠지고 온몸에 스파크가 튀었다.
"윽, 으헉, 컥."
마크가 몸을 뒤틀며 신음했다. 그 모습을 본 재현은 쓰게 웃었다. 벌써 네 번째 투여다. 이 몸으로도 이럴 때는 고통이 느껴지나. 좀 차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재현이 두 번째 주사를 꺼내 든 순간,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기분 나쁜 소리에 재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게 탄식했다.
"아, 이런."
그곳에는 절대 이 현장을 목격해서는 안 되는,
"무, 무슨... 이게.... 뭔..."
그저 이틀에 한 번씩은 충전하러 수고해 주는 재현 연구원을 위해, 돌아가는 길에 음료수라도 챙겨주려고 했던 여주가 있었다.
아, 귀찮게 됐네. 재현은 인상을 팍 쓰며 볼을 혀로 쭉쭉 밀었다. 일단 할 일이 우선이었다. 여주가 달려오든말든 재현은 두 번째 주사를 꽂았고, 더 큰 스파크가 튀며 마크는 고통스러워했다.
"지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큰 소리 내지 마요. 일 더 커지니까. 어어, 스파크 튀는 거 안 보이나. 감전될 일 있어요? 손대지 마요."
"이게... 무슨..."
여주는 마크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손이 떨리더니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마크, 마크가...
"왜, 왜 이래요? 고장 난 거예요? 아님 문제라도..."
그때 스파크가 잦아들고, 색색 숨을 내쉬던 마크는 여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 가지 마."
"...!"
"나랑, 나랑 있어. 여주야."
풀린 눈으로 여주를 부르는 마크의 목소리는 들끓는 것 같이 절절했다. 여주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재현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웃었다.
약효 제대로네. 명의네, 김정우.
그리고 그 약효에는 여주 씨 영향도 큰 것 같은데.
재현은 가방을 챙기고, 정신을 잃은 마크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그리곤 여전히 떨고 있는 여주에게 말했다.
"여주 씨가 이걸 다 본 이상 우리한테 협조할 수밖에 없는데."
"......"
"같이 가죠. 여주 씨도 계속 모르면 안 될 것 같고."
"어디, 어디를..."
"보안카메라를 해킹한 지금 가야 해요. 적어도 10분 안에는 출발해야 하고, "
"제발 대답 좀...! 이게 다 무슨 일이고, 어디를 가는지 설명을 해주세요...!"
"127-25 마을."
"......"
"가면 다 알게 될 거예요."
*****
내가 무슨 정신으로 차를 타고 향하는지 모르겠다. 차 문을 열자 룰루랄라 노트북을 조작하고 있던 정우 선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니, 여주가 왜 여기서 나와?!"
"정우 선배는 여기서 또 뭐 하시는데요!"
"아잉,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우리 다 들킨 거야?"
"둘 다 조용히 해. 시끄러워."
정우 선배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고 키보드만 타닥타닥 두드렸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 옆자리에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마크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왜 나에게는 아무 말도... 슬쩍 손을 뻗어 마크의 손등을 잡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기계처럼 차갑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진이 다 빠졌다. 이젠 속까지 울렁거렸다. 무거운 피로감이 내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어어, 여주 씨. 머리 아파? 두통약이라도 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럼 눈 좀 붙여. 시간 꽤 걸리니까~."
한밤의 외출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는데. 무단으로 외출한 걸 알면 센터에서 어떻게 나올까. 나 잘리나? 잘리기만 하면 다행일지도.. 이젠 다 모르겠다.
그래도 마크의 그 눈과 절절한 목소리를 그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분명 여기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걸 그냥 넘기면 안 될 것 같아.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정우 선배가 날 깨우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올렸다. 바깥에는 가로등 하나 없는, 폐허들만 가득한 동네였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나고 등이 오싹해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127-25 마을. 이 정도로 삭막한 마을일 줄은 몰랐는데...
재현은 마크를 둘러업고, 정우는 짐을 챙겨 나를 어느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있나?
재현은 다 낡아빠진 열쇠구멍에 열쇠를 쑤셔 넣고 돌렸다.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노란 장판이 깔린 집안. 거실에는 낡은 소파와 TV 하나, 작은 부엌 옆 모서리가 닳은 나무 식탁이 집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작은 침실이 있었는데, 옛날 할머니 집에서 보던 오래된 디자인의 옷장과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그 집안에는 다른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인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경계했고, 그중 한 명은 아예 대놓고 적대시했다.
"뭐야, 쟤는. 센터야?"
"동혁아, 내가 저번에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내 후배, "
동혁이라고 불린 남자는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와 특유의 삼백안으로 형형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살벌한 눈빛도 순식간에 꺾여버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뒤에 서 있는 재현 연구원, 정확히는 그가 들고 있는 마크를 보고.
"이, 이민형... 민형이 형..."
동혁 뒤에 서있던 다른 남자도 다가와 마크를 살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마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고, 동혁은 창문 쪽으로 뛰어가 헉헉거렸다.
재현은 마크를 침대에 눕혔고, 정우는 능숙하게 주사기를 꺼내어 마크에게 주사를 놓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스파크가 튀거나 마크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정우 선배는 이 상황 속에서도 넉살 좋게 나를 소개했다.
"이름은 정여주고, 나이는 동혁이랑 제노랑 동갑이네! 센터에 입사한 지 2주? 3주? 정도 됐어. 에헤이, 이동혁. 눈 그렇게 뜨지 마. 여주는 완전 신입이라 이 일에 가담한 적도, 아니 애초에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적도 없었어."
제노라고 불린 남자는 날 그렇게 적대시하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동혁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꼭 알고 싶었다.
"어떻게... 마크를 알아요? 아니, 애초에 왜 마크를 민형이라고..."
제노는 고개를 푹 숙였고, 동혁은 픽 웃었다.
"... 10년 넘게 알고 지냈으니까."
"....?"
"마크라고 하지 마. 저 형은 이민형인데."
"......"
"어떻게 아냐고? 이민형은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 뭐?"
짧지만 폭풍처럼 몰아친 동혁의 말에 온몸이 얼어버린 순간, 침대에 있던 마크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