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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다
룻 1:19~2:23
기억절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요지
우리가 의혹과 절망 가운데서 허덕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필요를 공급하시기 위해 일하신다.
개관: 룻 1:19~2:23
1:19~22 베들레헴으로 돌아옴 | 2:1-16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움 | 2:17-23 룻이 희소식을 가지고 돌아옴 |
하나님께 대한 나오미의 불평(1:20-22) | 룻이 이삭을 주우러 나감,(2:1~3). 보아스가 종들에게 룻에 대해 물음(2:4-7). 보아스와 룻의 대화. 룻을 위한 특별대책(2:15, 16). | 룻이 이삭을 주워 가지고 나오미에게 돌아옴 (2:17, 18). 룻이 어디서 이삭을 주웠는지 나오미가 물음 (2:19).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지시를 따르도록 권함 (2:20~23). |
서론
나오미가 룻에게 미친 영향에서도 불 수 있듯이 그녀가 하나님과 밀접한 생애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의혹으로 괴로워하며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생활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은 죽었고, 그로 인해 그 시대와 문화 속에서 그녀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의 귀중성을 인식시켜 주었던 관계들은 무참히 깨어져버렸다. 그녀가 모압으로 갈 때는 이스라엘의 여인으로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풍족히 가지고 갔었지만, 올 때는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왔다(룻 1:21).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생활 전반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일어난 모든 일은 그분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나오미는 그녀가 가족을 잃은 것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았다. “주께서 나를 괴롭히셨고 전능자가 내게 불행을 가져다 주셨느니라”(룻 1:21, NIV). 욥과 같이 그녀는 자신의 생애에 의미를 주고 생활을 보장해 주던 것들을 졸지에 잃어버렸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오미는, 고발과 증언도 듣지 못한 채 법정에서 유죄로 간주되고 이미 형을 받은 피고인으로 자신을 그리고 있다. 가장 나쁜 것은 그녀의 적대자가 하나님인 점이다”(에드워드 F. 캄벨, 룻기, 83).
나오미는 법정에서 고소하듯 번민에 찬 질문을 던진다. 룻기에는 법정 용어들이 많이 보이는데, 4장의 공판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벌써 나오미의 고소에 응답하기 시작하셨으며, 잠시 후 그녀가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면 분명해질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오미가(욥처럼)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할망정 그분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옴(룻 1:19~22)
※ 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성경절들을 주의 깊이 읽어라.
성읍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았을 때, 왜 그렇게 떠들고 야단이었었다고 생각하는가?(룻 1:19)
답:
NIV역의 19절엔 “이에 두 여인은 계속 걸어서 베들레헴까지 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온 읍내가 그들 때문에 야단법석이었다. 여인네들은 소리치며, ‘이 사람 나오미 아니야?’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고뇌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유쾌함’이란 뜻) 부르는 소리를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그녀에겐 조롱처럼 들렸다. 가슴이 메어지는 것을 참아가며 그녀는 말을 꺼낸다. “날 마라(괴로움)라고 불러줘 ! 전능자가 내 생애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드셨기 때문이야.”
고찰
예레미야 12장 1~13절과 하박국 1장 1~17절은 선악간의 대쟁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떻게 이 관계가 나오미의 의문을 풀어 주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숙고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행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믿음을 거절하게 되는가?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움(룻 2:1~16)
보아스의 등장(2:1~3)
룻기 2장 1절의 어떤 두 요소가 이 이야기 속에서 보아스를 부각시키는가?
답:
룻 당시의 사람들은 룻에 대해 어떻게 말하였는가?(룻 2:2,6,21)
답:
신명기 23장 3절에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10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는 큰 적개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심에 있어 사람을 보지 않으시며 그분의 진노하심마저도 조건적이다(호 11:9; 사 48:9; 겔 18:21~28).
룻은 어떻게 해서 자신과 나오미를 위해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는가?(룻 2:2,3)
답:
“하나님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에게 땅의 소산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자기 이웃의 밭이나 과수원, 포도원에 가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곡식이나 과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며 곡식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이런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 추수 때에 밭과 과수원과 포도원의 이삭들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다. 모세는 말하기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는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24:19~22; 레 19:9,10)고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182,183).
숙고
오늘날 불리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행동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참고
하나님의 섭리로, 룻은 그녀의 죽은 남편의 가까운 친척 중의 한 사람인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되었다. …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 삶의 경험들과 우리가 만나는 환경들 중 정말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본교 성경 주석 2권, 434). 룻이 솔선하여 이삭을 주운 것에 유의하라(2절).
보아스가 룻에게 감명을 받아 그녀에게 친절히 말함(룻 2:4~14)
밭 임자는 통상적으로 이삭 줍기를 원하는 자들이 마음 놓고 이삭을 줍도록 허용해 주었다. 룻은 분명히 보아스가 나타나기 전부터 책임 맡은 종들에게 청하여 이삭을 줍기 시작했었을 것이다. 룻으로 하여금 이삭을 줍도록 허용해 준 데 대한 변명으로 그 종은 그녀의 부지런함을 지적하였다. 영문 흠정역의 “집에서 잠깐 머물고는”보다 개역판(영문)의 “잠시도 쉬지 않고”가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된다.
보아스는 왜 룻을 축복하였는가?(룻 2:8~12)
답:
보아스가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 충성과 친절의 행위를 말하고 나서 즉시 그 모압 여인을 축복하였음에 유의하라. 우리는 여기서 룻기의 또 다른 주제를 본다. 모본적 생애를 산 나오미는 비극을 겪었다. 훌륭한 생애를 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끊임없는 축복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며, 눈에 보이는 축복들이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룻기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의 호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호의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헤세드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믿고 의지할 수는 있지만, 틀림없이 받을 것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축복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의 말은 사실 기도요 간청이지 어떤 원칙을 주장한 말은 아니었다”(캄벨, 룻기. 113).
룻은 나오미에게서 받은 사랑을 돌려줌으로써 사랑에 반응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반응은 축복의 허락을 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비결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여 순종한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십계명을 준수하라고 명하셨을 때. 그것은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이미 이루신 것들에 대해 응답하라는 요구였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미 구원하셨고, 이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 구원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셨으며, 그들의 반응에 따라 그분의 축복과 저주가 임할 것이었다.
계속되는 보아스와 룻 사이의 대화는 양편의 친절과 관대함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는가?(룻 2:13,14)
답:
보아스가 룻을 위해 특별한 대책을 마련함(룻 2:15,16)
보아스는 그의 일꾼들에게 룻에 관한 어떤 지시를 내렸는가?
답:
구약의 율법은 보아스에게, 그의 밭에서 룻이 이삭을 줍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구된 것을 넘어섰다. 그는 자기 일꾼들에게, 룻을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버려서 그로 줍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그녀의 신변 안전을 위해서도 몇 마디 덧붙였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곡식 단 사이에서 줍더라도 나무라지 말고 … 꾸짖지 말라”(룻 2:15,16, NIV)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의 사랑은 항상 요구된 표준치의 반응을 넘어선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돕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자기 가치를 보호하고 높이기 위해 정도를 넘어선다. 하늘에 의해 고무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정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주변 사람들과 맺으신 관계에서 자주 이것을 본다.
숙고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의 자아 존중심을 보호하고 높여 주는 방법으로 우리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겠는가?
고찰
예수께서 베드로와 유다를 어떻게 취급하셨는지 주의 깊이 연구하고, 특히 어떻게 예수께서 유다의 흉계를 폭로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위해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는지를 살펴보라. 요 13:21~30(특히 28,29절)
룻이 희소식을 가지고 돌아옴(룻 2:17~23)
룻은 밭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삭을 주웠는가?(7절과 17절 비교)
답:
“룻은 추수하는 소년들이 밭에 나오기 전에 또 다시 이삭을 주우러 갔다. 그녀는 그들보다 더 오래 일했다. 이삭 줍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 오후에 이삭을 줍는 것이 오전에 줍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룻은 그렇다고 해서 이삭 줍는 일을 더 일찍 끝내지 않았다. 단지 주운 것을 떨기 위해 잠시 멈출 뿐이었다”(본교 성경 주석 2권, 435,436).
뜻하지 않은 룻의 보고는 나오미에게 어떤 감화를 끼쳤는가?(룻 2:19,20)
답:
룻은 시어머니에게 그녀가 이삭을 주운 밭주인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내가 오늘 함께 일한 그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그녀가 말하자, 나오미는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자부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당신의 은혜 베푸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셨도다.” 그녀는 또 덧붙여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친족으로서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라”(룻 2 19,20, NIV)하였다.
나오미는 지금까지 불평을 제기해왔다. 이제 그녀는 그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펼쳐지는 것을 보기 시작한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 시작하신 것이다. 기업 무를 자(히브리어로 고엘)는 “구원자, 보호자, 개인이나 단체의 이익 옹호자였다”(홀랑 드 보, 고대 이스라엘 1권, 21).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려야 하는 이스라엘 인의 자유를 샀고, 가난 때문에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야 할 경우에는 고엘(기업 무를 자)이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해 그 토지를 살 수 있는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레 25:24~49 참조). 예레미야서 32장 6~9절에서 예레미야는 그의 조카 하나멜의 땅을 삼으로써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했었다.
결국 이 용어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성경 욥기 19장 25절, 시편 19편 14절, 78편 35절, 예레미야서 50장 34절 등에서는 하나님을 고엘이라 부르고 있다. 이 히브리 단어는 속량자와 속량된 자 사이의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언약의 하나님에 해당된다(R. 앨런 코울, 출애굽기 개론과 주석, 86). 그것은 자주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41:14, 43:14, 44:6,24, 49:7, 59:20, 63:16 참조).
숙고
기업 무를 자는 가족의 연분에 의해 그가 구해 준 사람들과 묶이었다. 이런 동일한 연분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묶어 주는가?
연구와 명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고아처럼 인생의 시련을 홀로 견디도록 방임되지 아니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늘 가족의 일원으로 받으시며 당신의 아버지를 그들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부드럽고 영속적인 끈으로 당신께 매인바 된 ‘소자’들이며, 하나님께 사랑스런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한없는 온정을 품고 계시는바 마치 신이 인간보다 높음같이 육친의 부모가 무력한 우리에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온정을 품고 계시다.
그리스도와 당신 백성의 관계에 대하여는,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 가운데에 아름다운 예증이 있다. 가난으로 인하여 한 히브리 사람이 부득불 자기의 기업을 내놓고 자신을 종으로 팔게 될 경우, 그와 그의 유업을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로 돌아갔다. 그와 같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우리와 우리의 유업을 속량하는 사업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 되시는 그리스도께 위탁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기업 무를 자 되신 것은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부모나 형제나 친구나 애인보다 더 친밀한 분이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 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라고 말씀하신다(사 43:1,4).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를 두른 천사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은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진실임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그분과 친족 관계를 갖는다면 우리 주님의 형제 자매가 되는 자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관계가 요구하는 바를 인정하는 데 빨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가족의 양자가 되었으면, 우리 하늘 아버지와 친족을 존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시대의 소망 2권, 50,51).
요약
나오미는 비극적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혹은 가졌지만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였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 그녀의 불평에 응답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적용
* 주희의 삶은 깊은 실망과 좌절의 삶이었다. 그 때, 그녀는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험하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해 하신 일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삶과 하나님이 너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가까운 누군가가 그녀의 생애를 또다시 산산 조각 내고 말았다.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한 창피감에 눌리어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복음을 증거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버리신 걸까?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심이 이 새로운 시련을 견뎌낼까?
* 우리들 각자는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우리가 이생에서 전연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고착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적 삶을 괴롭히는 의혹들과 부딪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라는 해답들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예수께서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관해 복음서들을 읽고, 그분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던(요 14:8,9)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안전하고 확신 있게 신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나오미의 생애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생애를 담당하시고 우리 생애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다.
* 나는 내 생애의 사건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 나의 개인적 증거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관계를 즐기도록 고무시켜 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