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헤더로즈, 한겨레출판 2020>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행위 예술가이다.
1946년생으로 세르비아 출신의 마리나는 군 요직에 있던 부모님 덕에 가정환경은 유복했지만, 서로 각방을 쓰면서 머리맡에 총을 두고 잘 정도로 불화가 깊던 부모님과 학대에 가까운 경직된 가정교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상당히 과격한 기질을 가진 예술가로 자라났다.그래서인지 마리나의 작업들은 대부분이 굉장히 과격하다. 알몸상태에서 공업용 선풍기를 기절할 때까지 얼굴에 쐰다던지, 칼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쉴 새 없이 왕복하며 내리친다던지. 그중 가장 충격적인 퍼포먼스로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Rythem 0> 등이 있다.
마리나는 평생의 사랑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율라이(Frank Uwe Laysiepe 와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함께 했으며 (머리를 비녀로 틀어 올리는 방식, 생일을 싫어해서 다이어리의 생일날짜를 찢는 습관, 심지어 생일까지도 같았던) 이 둘은 장장 12년에 걸쳐 인생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작은 밴을 타고 돌아다니며 많은 유명한 행위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결혼마저 행위예술 작품으로 담아내고 싶었던 두 사람은 만리장성 끝과 끝에서 걸어 중간에서 만나 결혼식을 올리는 퍼포먼스를 기획하지만 중국 측의 허가가 나지 않아 8년동안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허가가 났을 때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졌고 기획 의도를 바꾸어 중간에서 만나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지기로 한다. 이 작품은 사랑으로의 여정이 아닌 이별로의 여정이 된다.
이 작품을 끝으로 두 사람은 영영 헤어지고, 그 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10년, 행위예술계에서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마리나는 뉴욕 MOMA에서 <The Artist is Present> 라는 전시를 하게 된다. 룰은 간단했다. 중앙에 배치된 테이블과 의자 2개. 그중 한 편에 마리나가 앉아 어떠한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은 관람객을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맞은편 관람객 역시 그녀를 바라봐야 한다.기획 큐레이터는 물론 마리나 자신도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확신하지 못했던 이 전시는 큰 관심을 받아 방문한 관람객만 850만명으로 뉴욕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무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관람객이 자리를 뜨고 다음 관람객이 오기 전까지 잠시 눈을 감고 정리를 하는 마리나. 그사이 관람객 사이에서 훤칠한 은발의 노신사가 걸어와 자리에 앉는다. 이윽고 눈을 뜬 마리나는 처음엔 놀라더니 이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맞은편에 앉은 관람객이 만리장성 이후로 헤어져 영영 보지 못했던 율라이였던 것이다. (마리나는 율라이가 이 전시에 올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22년만에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