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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솥비빔밥
ⓒ 깊은나무
한식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 중에 돌솥비빔밥을 먹으며 감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양한 나물과 채소, 쇠고기와 달걀을 넣고 비벼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비빔밥도 외국인의 눈에는 독특해 보이는데 음식 담는 그릇까지 돌을 갈아 만든 것이라니 더욱 관심을 보인다.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특이하게 보이는 돌솥비빔밥은 기본적으로 돌솥과 비빔밥을 합쳐놓은 음식이다. 곱돌을 갈아 만든 개인용 솥에 밥을 짓고 거기에 갖은 재료를 넣어 비빈 것이니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고 궁금할 것도 없는 음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돌솥비빔밥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돌솥비빔밥의 유래를 알려면 먼저 돌솥밥의 기원부터 살펴야 한다. 곱돌을 갈아 만든 솥에 밥을 지으면 뜸이 골고루 들고 밥을 지을 때 잘 타지도 않을뿐더러 먹을 때 쉽게 식지도 않는다. 게다가 밥맛도 좋고 누룽지와 숭늉마저 구수하다. 밥은 무쇠 가마솥에 지은 밥이 으뜸이어서 옛날 사람들은 모두 가마솥 밥을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마솥 밥은 시골 사람들이나 서민들이 주로 먹었다. 궁궐에서 수라상을 따로 받는 임금이나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는 놋으로 만든 새옹이나 돌솥에다 따로 밥을 지어 올렸다. 그중에서도 밥 짓는 솥으로는 돌솥을 가장 선호했다. 영조 때의 실학자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서 밥 짓는 솥은 돌솥이 가장 좋고 다음은 무쇠솥, 그다음이 유기솥이라고 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돌솥을 최고로 여겼다. 11세기 말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돌솥(石銚)》이라는 시에서 구리솥은 비린내가 나고 무쇠솥은 떫어서 좋지 않으니 돌솥이 물을 끓이기에 가장 좋다고 읊었다. 9세기 초 당나라의 학자로 유명한 한유도 “누가 산의 뼈[山骨]를 깎아서 돌솥을 만들었나”라며 돌솥을 예찬하는 시를 지었으니 옛사람들의 돌솥밥 사랑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조선의 임금들은 돌솥으로 지은 수라를 들었다. 임금님의 수라는 새옹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곱돌로 만든 솥에 꼭 한 그릇씩만 짓는데 숯불을 담은 화로에 올려놓고 은근히 뜸을 들여 짓는다.
조선시대 관리들 역시 주로 돌솥밥을 먹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상으로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세종대왕이 후원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다 돌솥 한 벌을 상으로 내렸고, 성종은 승정원과 홍문관 관리에게 돌솥을 하사했다니 돌솥이 그만큼 널리 쓰였다는 이야기다. 돌솥은 가마솥과는 달리 혼자 쓰는 개인용 밥솥인 동시에 그릇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돌솥에 시를 적어 자신의 소유임을 밝혔는데 이 또한 조선 선비의 풍류였다.
돌솥에 밥을 비비면 무엇보다 잘 식지 않고, 재료를 익히며 먹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런데 돌솥비빔밥과 비슷한 음식 역시 옛날부터 존재했다. 비빔밥은 한자로 골동반(骨董飯)인데 《동국세시기》에서는 골동반은 젓갈, 포, 회, 구이 등 없는 것 없이 모두 밥 속에 넣어 먹는 음식으로 옛날부터 이런 음식이 있었다고 했다. 《동국세시기》에 나오는 골동반은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쓴 《구지필기》에 나오는 것이니 늦어도 11세기 무렵부터 비빔밥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골동반을 어떤 솥에다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동파 역시 무쇠솥은 떫고 구리솥은 비리다고 말한 장본인이었으니 돌솥을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론적으로 고려 때의 문헌에도 돌솥을 이용해 밥을 지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고, 역시 비슷한 시기 고려와 교류가 활발했던 송나라 문헌에도 갖가지 해산물과 고기 등을 넣어 밥을 지은 골동반이 보이니 진작부터 돌솥에 밥을 비비는 돌솥비빔밥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돌솥비빔밥이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발달한 음식이건, 혹은 송과의 교류를 통해 송에서 고려로 또는 고려에서 송으로 전해졌건 최소한 1천 년 이전부터 진화하고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새도 돌솥밥이 유행하고 있으니 역시 역사는 돌고 도는가 보다.
첫댓글 제가 아주 좋아하는 돌솥밥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