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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의 입장에서 본 민여운 의병대
민득기(민여운장군 선양회)
Ⅰ. 창의와 후원
1. 의병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 – (국가가 역할을 못해서)
한 마디로 말해서 나라가 무능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200여년 계속된 평화로운 시대에 훈련된 군대도 없었고, 전쟁에 대한 의식도 약했고, 전술전략을 가진 지휘관도 없는 상태에서, 분립된 군벌들이 지배하던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훈련되고 전술전략에 숙달된 왜적들이 들이닥치자 맞서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우왕좌왕하고 혹자들은 미리 도망을 가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왜적들이 부산포에 들어온 것이 4월 13일인데,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18일 만에 도성 한양을 점령하기에 이르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임금은 본인 하나 살자고 이보다 이틀 앞서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군대의 체제는 도성을 지키는 일부 수비대를 제외하고 지역 목민관을 지휘관으로 하는 병농통합체제로써 평상시에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다가 유사시에만 소집하여 활동하는 지역예비군 또는 민방위대 정도의 기능밖에 하지 못했다.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하는 제후국 입장에서 변방에 강대한 제후국이 존재하는 것을 꺼리는 황제의 의중에 맞추고 대국 이외에는 의식할 만한 외적이 없으므로 나라의 방비를 대국에 의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대적 사고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다급해지자 나라에서는 교서를 내려 향교 등을 방학케 하고 석전을 폐지하고 교훈에 참여하는 인원을 없애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으며 유생(儒生)들을 군대에 보내기에 이른다.
이에 뜻있는 인사들이 백성들을 모아 스스로를 지키기에 이르는데, 이들을 일컬어 바로 의병이라 한다.
의병을 주도한 인사들은 대부분 전현직 목민관이거나 지역에서 덕망 있던 유생들로써 태인고을에서는 민여운이 나서서 이 일을 하게 된다.
※ 의병을 일으킨 장수들의 전직 현황
직책 | 성명 | 지역 | 전직 | 비 고 |
창의사 | 김천일 | 나주 | 수원부사 | 일제 이항의 문인 |
전라좌도의병대장 | 고경명 | 담양 | 동래부사 | 아들 종후, 재후와 함께 창의 |
전라우도의병장 | 최경회 | 화순 | 담양부사 | 형 경장과 창의, 경상병사로 특채 |
전라좌도의병장 | 임계영 | 보성 | 진보현감 | |
의병장 | 변사정 | 남원 | 경기전참봉 | 일제 이항의 문인 |
의병장(비의장) | 민여운 | 태인 | 용담현령 | |
의병장(복수장) | 고종후 | 담양 | 현령 | 고경명의 장자 |
경상의병도원수 | 김 면 | 고령 | 공조좌랑 | 석현전투에서 민여운과 함께 참여 |
경상좌도의병장 | 정인홍 | 합천 | 황간현감 | 남명 조식의 적통제자 |
의병장 | 조 헌 | 옥천 | 보은현감 | 금산전투의 전사, 성혼의 문인 |
의병장 | 박이룡 | 영동 | 능성현령 | 이이의 문인, 우지령(민여운 거론) |
의병장 | 한명윤 | 영동 | 상주목사 | 우지령에서 민여운과 함께 진을 침 |
<亂中雜錄(난중잡록)> 壬辰下 萬曆二十年我宣廟壬辰 二十五年(임진하 만력20년 아선조 25년) ○ 敎八道放學(교팔도방학)。先是丙戌年間(선시병술년간)。 置提督于長官(치제독우장관)。使之巡督屬校(사지순독속교)。 日事修文(일사수문)。至是盡革敎訓之官(지시진혁교훈지관)。 廢春秋釋奠(폐춘추석전)。驅儒徒編於行伍(구유도편어행오)。 以校奴(이교노)。爲官奴(위관노)。 ○ 8도에 교서를 내려 방학(放學)하게 하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1586, 선조 19)년에 지방 장관 밑에 제독(提督)을 두어 부속된 향교를 순시하며 독려하여 날로 학문을 힘쓰게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교훈하는 관원을 모두 혁파하고 봄ㆍ가을의 석전(釋奠)을 폐하며, 유생을 몰아서 군대에 편입하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다. |
2. 창의(倡義)의 규모와 동지
이에 뜻있는 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동지들을 모으고 장비와 군량을 장만하여 왜적들에게 대항하게 되는데, 이때 태인 고을에서는 현령을 지낸 민여운이 고을의 유력가문 출신 정윤근과 더불어 작금 나라가 당하고 있는 부끄러움을 씻고자 인근 고을에 격문을 돌려서 병사와 군량을 모으고 장비를 정비하여 의병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동지 200여 명에 이르게 되는데, 동지들은 민여운을 대장으로 정윤근을 부장으로 추대한다.
대장으로 추대된 민여운은 단상에 올라 동지들과 삽혈동맹(歃血同盟) 하면서, 스스로를 비의장(飛衣將)이라 칭하고, 웅(熊)자를 장표(章表)로 삼는다고 공표하여 부대의 창설을 한다.
<호남절의록> -민여운 편 任辰與同縣鄭允謹募得鄕兵二百餘人(임진여동현정윤근모득향병이백여인) 傳檄列邑聚糧餉治戒械(전격열읍취양향치계) 倡起義旅誓雪國恥(창기의려서설국치) 衆推公爲大將鄭允謹爲副將(중추공위대장정윤근위부장) 公登壇歃血同盟(공등단삽혈동맹) 以熊字爲軍標自號飛衣將(이웅자위군표자호비의장) 임진년에 같은 현에 사는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고 고을마다 격문을 전하여 군량을 모으고 군율과 병기를 정비하여 나리의 수치를 씻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병사들은 공을 대장으로, 정윤근을 부장으로 추대하였다. 공은 단상에 올라 삽혈동맹(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모은 다음 나누어 마시는 의식맹세하는 의식)하고 웅(熊)자를 군표로 삼고 스스로 비의장이라 불렀다. |
<亂中雜錄(난중잡록)> 壬辰下 萬曆二十年我宣廟壬辰 二十五年 ○ 泰仁前主簿閔汝雲(태인전주부민여운)。募聚鄕兵二百餘名(모취향병이백여명)。 以熊字爲章標(이웅자위장표)。治械備粮(치계비량)。向嶺南(향영남)。 ○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
3. 창의의 시기
금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사한 고경명의 부장 유팽로(柳彭老)가 진군하여 태인을 지나다가 관사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는데, 그때 민여운이 정윤근과 더불어 의병을 창의하고 인사를 왔다고 그의 의병일기 월파집(月波集) 제3권에서 말하고 있다. 그 날짜가 6월 12일인 것으로 보아 이 이전에는 창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 월파집 제 3권 -임진(壬辰) ○ 6월 12일(경자) 진군(進軍)하여 태인에 당도하였다. 이 고을의 전현령 민여운이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왔다. |
4. 창의의 장소
창의 장소는 구체적으로 거론된 기록이 없다. 당시 태인 고을에서는 3가지 참전 경로가 있었는데, 하나는 정읍현감으로 있으면서 태인현감을 겸하다가 7계급을 승차하여 수군 전라좌수사로 옮겨 간 이순신을 따라 수군에 참여한 백성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지금의 칠보에 해당하는 고현내에서는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김경수. 이귀의 부대에 적극 참여하고 이 부대를 통하여 서쪽으로 파천한 임금에게 태인 백산에서 배를 따고 식량 등을 직접 가지고 갔으며, 나머지 하나는 민여운의 의병대이다.
따라서 민여운 의병대의 창의 장소는 현감을 따라 수군으로 대거 참여한 관아가 있는 읍치나 진상팀이 있었던 고현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면 창의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부장 정윤근(정언충의 당질이자 문인, 경주정씨 2천년사 참고)의 생거지가 산외일변면 원정마을이었고, 훗날 민여운의 유족들이 산외일번면 능암마을을 새거지로 삼았으며, 민여운 의병대를 적극 후원한 묵제 안의(安義)의 기거지가 고개(빗재) 하나 너머의 동촌면 수암마을인 것으로 보아 창의의 중심지는 지금의 산외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5. 의병대에 대한 후원
당시 전주사고를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냈던 안의와 손홍록은 이 일을 하기 전에 의곡계운장이라는 소임으로 의병들에 대한 군량을 수집하여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이 소임을 수행해 낸 기록이 어진과 사고를 지켜낸 수직 일지인 <임계기사>에 상세히 나와 있으며, 이 책자의 뒷부분에는 <태인민의병군량권유문>이라는 글이 실려 있고, 이들이 거출한 군량 등과 본인들이 부담한 물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본인들이 나이가 들어 직접 출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당시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임) 건장한 노복 8명을 군영에 보내는데, 고경명과 최경회 대장에게는 3명씩을 보내고 민여운 대장에게는 2명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고을에서 의병대에 대한 가장 큰 후원자는 안의와 손홍록이었다고 할 것이다.
● 태인민의병군량권유문(泰仁閔義兵軍糧勸諭文) -<임계기사>에 수록 (태인에서 일어난 민여운 의병대를 위한 군량(모집) 권유문) | |
都繼運將 (도계운장) 泰仁幼學安義孫弘錄(태인유학안의손홍록) 痛哭渾淚 再拜(통곡혼루 재배) 謹告大小人員(근고대소인원) | 도계운장인 태인에 사는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목놓아 소리쳐 울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번 절을 하고 삼가 높고 낮은 모든 백성(인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말씀을 올립니다.) |
伏惟(복유) 我朝禮儀之國(아조예의지국) 主上 聖明之君也(주상 성명지군야) 是以德治一國(시이덕치일국) 化及遠夷(화급원이) 遠夷之國感而服之者(원이지국감이복지자) 其來久矣(기래구의) | 삼가 공손히 엎드려 생각하오니, 우리나라는 예의 바르고 의리있는 나라로써 주상 전하는 성스럽고 총명하신 군주이십니다. 이 때문에 임금님의 성덕이 온 나라에 넘쳐나고 멀리 있는 오랑케 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랑케의 나라에서 이를 감격하여 복종한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
不意今者咄咄倭賊(불의금자돌돌왜적) 乘我昇平日久(승아승평일구) 大小恬嬉(대소념희) 侵陵我郊畿(침릉아교기) 魚肉我生靈(어육아생령) | 뜻하지 않게 지금 못된 왜적들이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이루고 크고 작은 백성들이 평안히 여기는 틈을 타서 우리나라 경기도지역까지 침범하여 우리 백성(생령)들을 도륙하였습니다. (물고기와 짐승고기로 만들었습니다.) |
使二百年祖宗(사이백년조종) 宗社盡蕩爲灰燹(종사진탕위회선) 使我堯舜之聖主(사아요순지성주) 播越於天西千里之外(파월어천서천리지외) | 200여년의 조종의 종묘사직이 다 사라져 잿더미가 되게 하였고, 우리의 요순임금 같이 성스러운 주상전하께서 하늘의 서쪽 천리 밖까지 도성을 벗어나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
嗚呼 爲臣民者(오호 위신민자) 孰不切齒腐心(숙부절치부심) 欲臠其肉哉(욕련기육재) 思之其罪(사지기죄) 其罪不容誅(기죄불용주) 曷勝痛哉(갈승통재) | 아, 신하와 백성된 자로써 누군들 절치부심하며 그 왜적을 죽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왜적의 그 죄는 죽음으로써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니 어찌 그 슬프고 가슴 아픔을 견디겠습니까? |
孔子曰(공자왈) 微管仲(미관중) 吾其爲披髮左袵(오기피발좌임) |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케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셨고, |
孟子曰(맹자왈) 夷狄不可與中國(이적불가여중국) 況君父之讐(황군부지수) 不可共戴一天也( 불가공대일천야) 則其可甘爲異類而同處一國乎 (칙기가감위이류이동처일국호) 嗚呼 値此危亂之日(오호 치차위란지일) 孰能仗忠奮義以雪其恥 (숙능장충분의이설기치) 以洗其辱乎(이세기욕호) | 맹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랑케는 중국에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임금님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기꺼이 오랑케가 되어 한 나라에 함께 있어서 야 되겠습니까? 아, 이러한 위급한 날을 당하여 누가 능히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의지하여 떨쳐 일어나 이 더럽게 욕됨을 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
前龍潭縣令 閔公汝雲(전용담현령 민공여운) 有仁有德之將也(유인유덕지장야) 其雄謀忠略(기웅모충략) 特出於湖南(특출어호남) 郭汾陽之受拜回紇(곽분양지수배회흘) 崔致遠之檄走黃巢(최치원지격주황소) 可復見於 今日矣(가부견어 금일의) | 용담현령을 지낸 민여운은 인자하고 덕스러운 장수입니다. 그의 뛰어난 계책과 충성스러운 전략은 호남에서 특별하게 드러났습니다. 회흘(回紇)을 복종시켰던 곽분양(郭汾陽)과 격문(檄文-적을 설복시키는 글)으로 황소(黃巢)를 달아나게 했던 최치원(崔致遠)을 오늘날에서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其爲大將不(기위대장부) <落三四字(낙삼사자)> 與敵愾同志之士(여적개동지지사) 倡義振旅人(창의진여인) 皆影從而響(개영종이향) <落三四字(낙삼사자)>千矣(천의) 勢如破竹 談笑可擊 (세여파죽 담소가격) 第凶荒連年 軍(제흉황연년 군) <落三四字(낙삼사자)> 嗟○難 可辦(차○난 가판) | 그는 대장이 되어 (원문 글자 서너 자 빠짐) 적을 의롭게 분별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같은 뜻을 가진 선비들과 주도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모두 그림자나 메아리 같이 따랐다. (서너 자 빠짐) 그 형세가 파죽지세로 몇 마디 주고 받는 사이에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다만 연이은 흉년에 군사가 (서너 자 빠짐)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
願有忠義慷慨之心者 (원유충의강개지심자) 毋惜數斛之穀 數疋之布 (무석수곡지곡 수필지포) 給我義兵 使之恢復(급아의병 사지회복) 雪一國之恥(설일국지치) 報君父之讐(보군부지수) 千萬幸甚(천만행심) | 원컨대, 충성스런 의리를 가진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몇 곡의 곡식과 몇 필의 베를 아끼지 마시고 우리 의병에게 보내 국토를 회복하고 나라의 더럽게 욕됨을 씻으며 임금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하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
慷慨作詩三節 詩曰(강개작시삼절 시왈)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심정으로 지은 시(3절) - 시에서 말하기를) | |
聖繼神承二百年(성계신승이백년) 那知金闕鎖腥烟(나지금궐쇄성연) 當時害物跳梁罪(당시해물도량죄) 直斬其頭祭彼天(直斬其頭祭彼天) | 성군들이 나라를 이어온 지 이백여 년 궁궐에 오랑케 연기가 가득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때 사람을 해치고 날뛰는 왜적의 죄를 곧장 머리를 베어 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리라. |
孔曰成仁孟曰義(공왈성인맹왈의) 臣民當死爲吾君(신민당사위오군) 臨危財寶何須惜(임위재보하수석) 恢復如今在義軍(회복여금재의군) | 공자님은 살신성인을, 맹자님은 의리를 말씀하셨지. 신하와 백성들은 당장 임금님을 위해서 죽어야 하리니 위태로울 때를 당하여 재물과 보화를 어찌 아끼리오. 지금 국가를 회복하는 것은 의병에 달렸다네. |
美人何處彼西方(미인하처피서방) 遙望天涯淚自滂(요망천애루자방) 一倡義兵能雪恥(일창의병능설치) 願君毋惜數升粮(원군무석수승량) | 아름다운 님이시여, 어찌 저 서쪽에 계시나이까?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니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구나. 의병을 한번 일으키면 치욕을 씻을 수 있으리니 원컨대 그대들이여, 몇 되 양식을 아끼지 마소서, |
Ⅱ. 진군로(경상도를 향하여-학봉일기, 호남절의록, 태인삼강록 등)
비의장 의병대는 이 고을 태인에서 창의하여 군량과 기계를 마련한 다음 지리산 팔랑치를 넘어 진주성 1차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가다가 전투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거창(居昌), 지례(知禮), 성주(星州) 등지에서 경상도ㆍ충청도 병력들과 합진하고, 때로는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면서 수많은 전과를 거양하였다. 그러나 이후 안타깝게도 성에 있던 모든 군관민이 전몰한 진주성 2차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함안 등지에서 작전을 폈다는 기록 외에는 찾을 길이 없다.
여기에서 최경회 장군과 민여운 장군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서 주목할 바가 있다.
1. 호남절의록 등의 기록
<호남절의록> <태인삼강록>등 전투 현장과 거리가 멀었던 호남지역에서 발간된 서책에서는 민여운 의병대가 ‘지리산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에 들어가서 함안 등지에서 전적을 쌓았고, 전주성 2차 전투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 고종후 등등> 제장들과 함께 참여하였다가 입성한 모두가 함께 전몰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湖南節義錄(호남절의록) - 광주향교본(光州鄕校本) ● 민여운(閔汝雲) 자(字)는 용종(龍從)이요, 본(本)은 여흥(驪興)이니, 문인공(文仁公) 영모(令謨)의 후(後)요, 찬성(贊成) 제인(濟仁)의 손(孫)으로 기절(氣節)이 강개(慷慨)하고 지략(智略)이 과인(過人)하였으며, 음사(蔭仕)로 용담현령(龍潭縣令)이 되어 크게 치적(治績)을 쌓았다. 임진(壬辰)에 동향인(同鄕人) 정윤근(鄭允根)으로 더불어 향병(鄕兵) 이백여인(二百餘人)을 모득(募得)하여 열읍(列邑)에 격문(檄文)을 발(發)하여 군량(軍糧)과 병기(兵器)를 정비(整備)한 후(後) 사중(士衆)에 의(依)하여 대장(大將)으로 추대(推戴)되자 공(公)은 개연(慨然) 등단(登壇)하여 삽혈동맹(歃血同盟)하고 웅자(熊字)로 군표(軍標)를 하여 비의장(飛衣將)이라 자호(自號)하고 팔랑치(八狼峙)를 넘어 함안 등지(咸安等地)에서 무수(無數)한 적(賊)을 참살(斬殺)하였다. 계사(癸巳) 6월(月)에 적장(賊將) 청정(淸正)이 전년(前年)의 진주(晉州)참패(慘敗)를 보복(報復)코자 합병(合兵) 수십만(數十萬)으로 진주(晉州)를 침공(侵攻)하려 하매, 공(公)은 휘하(麾下) 의사(義士) 삼백여인(三百餘人)과 혈서(血書)로써 순국(殉國)할 것을 맹세(盟誓)하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복수장(復讎將) 고종후(高從厚), 경상병사(慶尙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표의장(彪義將) 심우신(沈友信) 등(等) 제공(諸公)으로 더불어 진주(晉州)에 입성(入城)하여 항전(抗戰) 칠일(七日)동안에 십여처(十餘處)의 창상(槍傷)을 입고 좌우(左右) 손가락이 다 절단(切斷)되었으되, 그 아픔을 잊고 더욱 독전(督戰)하다가 이십칠일(二十七日) 순성중(巡城中) 적의 유시(流矢)에 맞아 순국(殉國)하니 정윤근(鄭允根)이 공(公)의 직(職)을 대섭(代攝)하고 공(公-정윤근)의 자(子) 창문(昌文)으로 하여금 공(公)의 시체(屍體)를 수렴(收斂)하여 귀장(歸葬)케 하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록(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贈)하였다., <태인(泰仁)> |
泰仁三剛錄(태인삼강록) 閔汝雲字龍從(민여운자용종) 驪興人贊成齊仁孫(여흥인찬성제인손) 慷慨有氣節志略過人(강개유기절지략과인) 陰除二縣令皆有治績(음제이현령개유치적) 민여운의 자는 용종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찬성을 지낸 제인의 손자이다. 기절이 강개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음서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내면서 치적을 남겼다. 任辰與同縣鄭允謹募得鄕兵二百餘人(임진여동현정윤근모득향병이백여인) 傳檄道內聚糧治戒倡起義旅(전격도내취양치계창기의려) 衆推公爲大將鄭允謹爲副將(중추공위대장정윤근위부장) 公登壇歃血同盟誓(공등단삽혈동맹서) 以熊字爲軍標自號飛衣將(이웅자위군표자호비의장) 같은 고을의 정윤근과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서 군량를 모으고 규율을 만들어서 의병대를 일으키니 병사들이 공을 대장으로 정윤근을 부장으로 추대하였다. 공은 등단하여 삽혈동맹(피를 같이 나누어 마시면서 같이 맹세함)하고는. 웅자를 군표로 삼고 스스로 비의장이라 불렀다. 率兵踰八狼峙至咸安所到邑(솔병유팔랑치지함안소도읍) 遇賊必克斬獲無數(우적필극참획무수) 병사들을 거느리고 팔랑치를 넘어서 함안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여 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무찌르고 수없이 죽이고 잡아들였다. 癸巳六月賊大至圍晋城時(계사유월적대지위진성시) 公斫指血誓以同死仍檄勵壯士(공작지혈서이동사잉격려장사) 衆皆效死(중개효사) 계사년 6월 적의 큰 부대가 진주성을 에워쌌을 적에 공은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다 함께 죽자고 맹세하며 장사병을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였다. 乃與倡義使金千鎰復讐將高從厚慶尙兵使崔慶會) (내여창의사김천일복수장고종후경상병사최경회) 忠淸兵使黃進彪義將深友信同入晋城 (충청병사황진표의장심우신언동입진성)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표의장 심우신과 같이 진주성에 들어가서 固守七日(고수칠일) 督戰不已斬獲甚衆(독전불이참획심중) 身被十餘創左手斷右手折(신피십여창좌수단우수 忽中賊矢而死(절홀중적시이사) 성을 지킨 지 7일째 되는 날 병사들이 많이 죽고 잡혀가서 싸움을 독려할 상황이 아니였다. 몸에는 10여 군데 창상을 입었고 왼손을 끊어지고 오른손을 부러졌는데 홀연히 날아 온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
2. 학봉일고 등의 기록
그러나 전투현장에 같이 있었던 이들의 문집 등에서는 민여운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기록들이 보인다.
경상도 지역의 모든 병권(兵權)을 조율하고 지원했던 초유사 학봉 김성일(金誠一)은 그의 문집에서 ’전 주부(主簿) 민여운(閔汝雲)도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의 기세가 자못 꺾어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호남에서 간과하고 있던 민여운 의병대의 작전지역을 밝히고 있으며, <일성록(日省錄)>에서는 이로의 일기를 빌어,’민여운과 최경회는 호남의 의병장이고, 한명윤과 박이룡은 호서의 의병장이다. 함께 우지령(牛旨嶺) 아래 진을 치고 김산(지금의 김천)과 지례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적을 막았는데, 호령이 엄숙하였고, 군대의 위용이 장엄하였다.‘라고 하여 거창과 무주와 지례의 경계선이었던 우지령을 거론하고 있다.
▣ 학봉일고(鶴峯逸稿) 부록(附錄) 제3권 /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26년 계사(1593) 1월 8일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장계하기를, “지난해 12월에 진주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工曹正郞) 박성(朴惺)을 나누어 보내어 호남의 좌도와 우도의 의병(義兵)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계영(任啓英), 최경회(崔慶會) 두 장수는 호남과 영남은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형세가 있어서 존망과 성패가 매우 긴밀하다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잇달아 달려와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주부(主簿) 민여운(閔汝雲)도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의 기세가 자못 꺾어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 후략 - 《後漢書 卷16 寇恂列傳》 |
▣ 日省錄(일성록) - 정조 23년 8월 22일 - 前略(전략) - 云李魯日記(운이로일기) 有曰閔汝雲崔慶會則湖南義兵將也(유왈민여운최경회즉호남의병장야) 韓明胤朴以龍則湖西義兵將也(한명윤박이룡즉호서의병장야) 同陣于牛旨嶺下(동진우우지령하) 以禦金山知禮留屯之賊(이어금산지례유둔지적) 號令嚴肅軍容克壯(호령엄숙군용극장) 또 이로의 일기에 ‘민여운(閔汝雲)과 최경회(崔慶會)는 호남의 의병장이고 한명윤과 박이룡은 호서의 의병장이다. 함께 우지령(牛旨嶺) 아래 진을 치고 김산과 지례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적을 막았는데, 호령이 엄숙하였고 군대의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後略(후략)- |
3. 최경회와 민여운의 관계
최경회 장군은 전라우도를 총괄하는 의병장으로써 의병을 총괄하는 지휘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석현전투를 비롯한 무수한 전과를 거양하였고, 특히 경상도에 있는 일곱 개의 읍을 독자적인 작전을 통해서 수복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우병사로 특별 임용된 뛰어난 장수이다.
최경회는 민여운이 용담현령(1578-1580,진안군지)으로 있을 무렵 인접 고을인 무장현(현재 장수군과 무주군 일부지역)에서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또 최경회의 둘째 부인이 민여운과 같은 여흥민씨이다.
그리고 태인 고을에서 안의와 손홍록이 모취한 군량과 병력을 최경회와 민여운에게 같이 제공했고, 석현전투에서도 민여운과 최경회는 같이 참여했으며, 전주성에서 민여운이 전사하자 부장인 정윤근이 병력을 이끌고 최경회 진영과 합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석현전투 이후 마지막 진주성에 입성하기까지 5개월 동안 (임진년 12월~ 계사년 5월)민여운의 구체적인 전적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돈독한 관계를 비추어 볼 때 민여운은 최경회와 합진 내지는 합동 작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Ⅲ. 석현(돌고개) 전투
1. 개황
석현(石峴, 돌고개) 전투에 관해서는 세상에 크게 알려진 바가 적다.
당시 경상도에 있는 왜적들은 후방사령부를 개령현(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에 두고 군정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상도 의병 총사령관 김면 장군을 비롯한 경상도 관군, 의병, 승병과 호남의 민여운, 최경회 의병, 그리고 호서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사방의 통로를 봉쇄한 가운데 왜적 사령부를 공격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따라 병력을 재배치가 끝나기도 전에 왜적들이 먼저 병력을 이동하여 지례와 우두령을 거쳐 호남에 진출하려고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산군(지금의 김천시)과 지례현의 경계에 있는 석현이라는 산능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이에 아군들은 김면의 본진군과 거창에서 웅현을 거쳐 개령으로 진군하다가 전투현장인 상좌원에 머물던 호남 의병들이 전투에 참가하는데, 김면의 본진군은 2천명, 호남 의병은 1천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호서 의병들은 우지령에 집결해 있었다.
2. 전투의 전개상황
왜적들이 우지령을 거쳐서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경로 중 김산군에서 지례현으로 가는 길목에 상좌원(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소재지)이 있고, 이 상좌원 조금 못미처 석현(돌고개)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다.
갑자기 왜적들이 지례를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호남 연합 의병과 고을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밤새워 감천(甘川-황악산에서 지례를 향해 흐르는 강)에서 강돌을 주워 올려 산능성이에 쌓아두고 있다가 산기슭을 기어오르는 왜적들을 향해 화살과 함께 돌팔매질을 하여 저지하였다. 이렇게 세 번이나 거듭되는 공방전 끝에 싸움은 멈추었는데, 왜적과 아군 중 누구 먼저 물러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때 군관 유사홍과 의병장 권응성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산등성이에 올라 호미로 땅을 걷어내면 주먹만한 강돌이 무수히 나온다. 돌무더기이다.
3. 민여운에 대한 기록
이 돌고개 전투는 전직공무원인 향토사학자에 이현돈 옹이 1983년 금릉군에서 발간한 [내고장 우리향토]라는 책자에서 처음 언급함으로써 부각되기 시작했다.
▣ 내고장 우리향토(금릉군 - P161∽162, 1983년 발간) 7. 돌로 싸운 석현 싸움터 상좌원(上佐院)전투는 지금의 구성면 하원리에서 구성중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돌고개:石峴)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임진왜란 때, 개령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 대군을 토벌하기 위해 경상우도 의병도대장으로 임명된 송암 김면(松庵 金沔)의 지휘하에 근읍(近邑) 의병들로 하여금 개령 가까운 곳에 포진키로한 것이 12월 24일이었다. 이날 작전계획에 따라 호남 출신 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와 역시 호남에서 기병한 의병대장 첨정 민여운(僉正 閔汝雲)이 그 휘하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상좌원에 진을 쳤다, 다음 날 25일 새벽에는 김면 자신이 2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에서 상좌원에 당도하니, 척후병의 연락이 와 김산(金山-지금의 김천)으로부터 적군이 대거출동, 지례(知禮) 쪽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적군이 돌고개에 다다랐을 때 산에 숨어 있던 3천여 명의 군사가 일시에 활을 쏘고 군졸들이 밤새 산더미처럼 모아 두었던 돌을 던지면서 공격하였다. 이 싸움은 우리 군사가 세 번이나 진퇴를 거듭하다가 적군의 조총에 견딜 수 없어 후퇴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유사홍은 말이 적탄을 맞고 쓰러져 그도 전사하였고, 의병대장 권응성도 전사했다. 유사홍은 변암복병장이었는데, 군기를 엄수하고 싸움마다 공이 컸었다고 송암유고에는 적고 있다. 지금은 김삼도로(김천 삼천포간 도로)가 나서 고개는 모양이 달라졌으나 고갯마루에는 지금도 돌무덤이 남아 있다. 참고자료 : 송암실기, 임진왜란 전란사, 감호문집 |
화순에 있는 최경회의 사당에는 대표적인 전적화(戰績畵)로 이 석현전투 장면을 개시하고 있다. 이 최경회의 문집인 일휴당일기에는 민여운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 - 최경회(崔慶會) 경상우순찰사(김성일)가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 10월 5일 이곳이 곧 함락되려 할 때에 신(臣)이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정랑(工曹正郎) 박성(朴惺)을 전라도 의병에게 보내 구원해주기를 청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의병장(최경회)이 호남과 영남은 서로 의재해 도와야 할 형세이므로 죽든 살든 이기고 지거나를 막론하고 함께 해야 한다면서 즉시 군사를 보내 응원해 주었습니다. 또 전에 주부(主簿)를 지낸 민여운(閔汝雲) 역시 태인(泰仁)에서 와 본도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쳐 적을 치니 고을 사람들이 거기를 의지하고 믿어서 거의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호남 사람이 서울 근처에서 와, [조정의 의논이 의병장을 불려다가 왕을 호위하게 하려 한다.l 하므로, 의병장이 그 기별을 듣고는 금방 서둘러 올라가려 하고 있습니다.] - 뒷 부분은 생략 - |
앞서 진군로에 대한 설명함과 같이 [학봉일고]나 [일성록]에서도 석현전투와 관련하여 민여운을 언급하고 있으며, [난중잡록]에서도 의병대가 창의하여 경상도에 들어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Ⅳ. 진주성 싸움
1. 개요
이순신에 의해서 해상이 봉쇄된 마당에 진주는 전국적인 식량기지인 호남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왜적들은 식량 확보와 조선군 세력 해체 차원에서 불가피하고 필수적으로 점령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임진년 10월 진주성 점령을 시도하던 왜적들은 3천명의 병사로 성을 지키던 부사 김시민에게 2~3만의 대군을 가지고 대패를 당하였다.
진주 대첩 이후에 전쟁에 개입하게 된 명나라는 복잡한 국내(명나라) 사정도 있는 관계로 전쟁이 오래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 전쟁의 승리에는 관심이 적었으므로 조선 조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적과 협상을 통해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협상의 진전에 따라 철군을 위해 전 병력이 후퇴하여 경상도 해안에 집결한 마당에 지난해 당한 치욕을 회복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진주성 공격을 꾀하면서 ‘성을 비우라’(空城論)고 요구한다.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1년여의 전쟁과 명군에 대한 군량조달 등으로 국력이 거의 소진되어 해결할 수 있는 여력을 잃은 상태에서 임금이 직접 명군에게 ‘일본군이 지구전으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진주성이 요새라 해도 답이 없다.’면서 여러 번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 장수들은 이를 무시하고 이 전투에 개입을 주저하며 왜적들의 공성론에 암암리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공성론(空城論) 선조실록 26년 계사 7월 10일 | |
我日本住晉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아일본주진주병마삼십만 공불능당) 修書密報(수서밀보). 今本府之民(금본부지민) 預避其銳鋒(예피기예봉) 皮見城空人盡(피견성공인진) 卽撤兵東回(즉철병동회) |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곧 철병할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 |
※ 이여송에게 서둘러 진격해주기를 청하는 계첩을 보내다. 선조실록 (26년 계사 7월 13일) |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 제독(李提督)에게 문안하는 일로 박승종(朴承宗)이 곧 떠나려 합니다. 지금 듣건대 변사(變詐)를 헤아릴 수 없는 흉적(凶賊)이 창을 되돌려 내지(內地)로 향해오고 또 군대를 나누어 전라도(全羅道)를 침범하려 한다 하니, 이 제독에게 서둘러 진격(進擊)해서 대은(大恩)을 마쳐 달라는 뜻으로 게첩(揭帖)을 만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게첩은 다음과 같다. “서늘함을 맞이하고 더위를 보내니 금기(金氣)가 제법 시원한데, 오랜 동안 전진(戰陣)에서 노고하시는 안부가 어떠합니까? 산천(山川)이 막혀 문안도 자주 드리지 못하였으나, 우러러 생각하는 마음은 깊어 항상 두렵고 걱정되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여름이 지나 절서(節序)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눈 내리는 겨울이나 버들잎 피는 봄에 편히 계시지 못한 것이 모두가 우리 나라의 일 때문이니, 감읍(感泣)할 성덕(盛德)을 잠시인들 어찌 잊겠습니까. 목하(目下) 잔구(殘寇)가 다시 모여 흉모(凶謀)를 자행하여 창을 되돌려 내지(內地)로 향해오는 기세가 매우 사납다 하니, 만약 지난해처럼 석권(席捲)의 기세로 북상(北上)하거나 군대를 나누어 호남(湖南)을 침범하여 전역을 유린한다면 병력(兵力)이 다하고 군흥(軍興)이 이미 고갈된 우리 나라가 어찌 자구(自救)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말로 위급 존망의 기틀이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고를 들은 뒤부터는 침식(寢食)을 전폐하고 새벽에 어찌될까 저녁에 어찌될까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고서 자위(自慰)하는 것은 오직 대인(大人)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인의 신묘하고 원대한 모략(謀略)은 반드시 앉아서 적(賊)의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넋이 빠지게 할 수 있으니, 서둘러 동로군(東路軍)을 지휘하시고 장령(將領)들을 독려하시어 적들이 도모하기 전에 잔구(殘寇)를 소탕하시어 재조(再造)의 공렬(功烈)을 이루신다면 중한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끝으로 장군의 천만 보중(保重)하심을 빌며 이만 줄입니다.” |
당시 우리 장수들의 분위기는 ‘도저히 성을 지킬 수 없다,’는 측과 ‘설령 못 지킨다 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견으로 달라져 있었다.
성을 지킬 수 없다는 측은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선거이, 영천군수 홍계남, 의병장 곽재우, 임계영 등이 있으며, 곽재우는 순찰사가 입성할 것을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면서 ‘차라리 자결하면 했지 저런 데서 개죽음을 못하겠다.’고 극언까지 서슴치 않았다.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 6월 1일 |
왜장(倭將)이 군사를 연합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청정ㆍ평의지(平義智)가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로 향했는데 30만으로 일컬었다. - 중략 - 유정(劉綎)이 청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맹약을 어긴 것을 꾸짖고 화복(禍福)의 이치로 타일렀으나 청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 중략 -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김천일이 항의하며 따르지 않았다. 선거이와 홍계남은 즉시 운봉(雲峯)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한효순(韓孝純)이 곽재우(郭再祐)로 하여금 진주에 달려가 함께 지키게 하니, 곽재우가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직 임기 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을 보건대,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 3리(里)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를 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하니,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그를 꾸짖기를, “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 하자, 곽재우가 말하기를,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아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 후 략 - |
이에 대해 창의사 김천일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은 잠시 점령한 후에 물러나겠다는 왜적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만약 진주가 점령되고 나면 호남을 지켜낼 수 없다는 급박한 사정을 인지하고 불 보듯 뻔한 죽음의 길을 택한다.
좋은 예로 부원수 선거이가 충청병사 황진에게 ‘장군의 관할지역도 아니고 지원 명령도 없으니 진주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자, 황진 장군은 ‘이미 창의사(倡義使)에게 승낙하였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식언(食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라고 대답하며 성에 들어갔다.
입성한 장수들은 병사들에게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살고 싶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일부가 입성을 포기한 사례도 있으나 민여운 휘하 장병들은 대장을 따라 모두 죽음의 성에 들어가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 성에 들어간 장수별 병력의 수(선조수정실록에 의거함)
구 분 | 장수명 | 병력수 | 비고 | 구 분 | 장수명 | 병력수 | 비고 |
창의사 | 김천일 | 300 | 충청병사 | 황 진 | 700 | ||
경상병사 | 최경회 | 500 | 복수장 | 고종후 | 400 | 고경명의 장남 | |
부 장 | 장 윤 | 300 | 의병장 | 이계련 | 100 | ||
부 장 | 이 잠 | 300 | 변사정의 부장 | 의병장 | 민여운 | 200 | 호남절의록에서 민여운은 300명이 입성하였다고함 |
의병장 | 강희열 | - | 의병장 | 고득뢰 | - | ||
의병장 | 강희보 | - | 의병장 | 오유웅 | - | ||
거제현령 | 김준민 | 김해부사 | 이종인 |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 6월 1일 |
- 전 략 -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은 군사 3백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성에 들어갔고, 충청 병사는 군사 7백을 거느리고,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5백을,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백을, 부장(副將) 장윤(張潤)은 군사 3백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1백여 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 이잠(李潜)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게 하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강희열(姜希悅)ㆍ고득뢰(高得賚)ㆍ강희보(姜希輔)ㆍ오유웅(吳宥熊) 등도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수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 후 략 - |
2. 전투 전개상황
전투는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전개되는 데 주요 전황은 다음과 같다.
일자별 | 주요 전황 |
전투 전야 | 15일, 일본군 출발, 함안 점령, 16일 반성 점령, 18일 의령 점령, 19일 명의 장수 유정의 부정 왕필적과 상주목사 정기룡이 입성하여 ‘유총병의 군사가 성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이 3가에 도착했으니 경들은 잘 방어하라’고 격려하고 돌아감 |
6월 21일 (1일차) | -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성의 동북쪽 순천산에 올라가 주변 정찰 성 주변에 있는 해자(수로)를 메우는 일 착수. 군대 분산 배치 |
6월 22일 (2일차) | - 왜적 본대 도착, 공격개시 - 낮에 1차 공격 –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 - 초저녁 재차 공격 – 밤 10시쯤 퇴각 - 밤 12시 3차 공격 – 수성군의 방어로 새벽 4시 퇴각 (황진 장군이 순성장으로써 맹활약) 김천일이 구원을 요구하는 전령을 파견했으나 붙잡혀 심리전 도구로 이용됨 |
6월 23일 (3일차) | 왜적들이 해자를 매립을 마치고 죽창 등 공성용(攻城用) 도구를 이용해 공격했으나 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퇴각 낮에 3번, 저녁에 1번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시킴 |
6월 24일 (4일차) | 왜적들이 잠시 휴식, 병력 재배치, 5~6백명 전진 배치 |
6월 25일 (5일차) | 성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언덕을 쌓고 거기에 정루(亭樓)를 설치하여 위에서 아래를 향해 사격을 가함 수성군도 같은 방법으로 언덕을 쌓고 더 높은 정루를 만들어 대응 (낮에 세 번, 밤에 한 번 공격해 오는 적을 격퇴시킴) |
6월 26일 (6일차) | 생가죽으로 만든 방패로 화살과 총탄을 막으면서 성을 허물기 시작 (성내에서는 바위와 나무를 아래로 굴려서 막아냄) - 화공(火攻)으로 성내에 있는 초가집 여러 채가 불에 탐 - 심리전을 전개하며 주야로 계속 공격하였으나 격퇴시킴 |
6월 27일 (7일차) | 민여운이 순찰중 전사 왜적들이 귀갑차(龜甲車)를 만들어 공격 동.서문에 언덕을 쌓고 누각을 만든 두 사격전을 벌임 (수성군 전사자가 3백명을 넘어서 큰 피해를 입음) - 왜적들이 북문의 성벽에 오르는데 성공했으나 격퇴시킴 |
6월 28일 (8일차) | 왜적들이 밤에 은밀히 북쪽 성벽에 접근하여 성벽을 붕괴시킴과 동시에 기습공격 감행(서예원의 경계지역으로 그는 겁이 많은 관계로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공격을 받아 성벽 자체가 심한 손상을 입음.) 황진장군 전사(장군의 전사로 전세가 급격히 악화됨) 정윤근 부장 전사(민여운 전사후 최경회와 합진하여 작전수행) |
6월 29일 (9일차) 전투종료 | 방어선 붕괴, 성이 함락되어 적에게 점령됨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이종인 등 자결, 장윤, 김준민 등 전사. |
3. 민여운의 죽음<호남절의록으로 으로 대체함>
-전 략- 癸巳六月賊復大至圍晋城時 (계사유월적부대지위진성시) 公麾下義士有三百餘人 (공휘하의사유삼백여인) 公斫指出血誓以同死仍檄勵忠義 (공작지출혈서이동잉격려충의사) 衆皆有效死之心(중개유효사지심) | - 앞 부분 생략 - 계사년 6월 적들이 다시 많이 몰려와서 진주성을 에워쌌을 적에 공에게는 휘하에 삼백여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공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다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충성스런 대의를 북돋아 주니 병사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였다. |
乃與倡義使金千鎰復讐將高從厚 (내여창의사김천일, 복수장고종후,) 慶尙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 경상병사최경회, 충청병사황진) 彪義將深友信諸公同入晋城 (의장심우신 제공동입진성) |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병사 최경회, 충정병사 황진, 표의장 심우신등 여러 제장들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갔다. |
固守七日督戰不已斬獲甚衆 (고수칠일독전불이참획심중) 身被十餘創褁創復戰左手斷右手折 (신피십여창척창부전좌수단우수절) 而督勵將士力戰愈急士皆奮力焉 (이독려장사력전유급사개분력언) | 성을 지킨지 7일째 되는 날 많은 병사들이 죽고 잡혀가서 전투를 독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몸에는 십여 군데 창상이 있고 또 왼손을 부러지고 오른 손을 꺾이었음에도 장사병에게 싸우기를 독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힘을 다해 나섰다. |
二十七日巡城時忽中賊矢而死 (이십칠일순성시홀중적시이사) 鄭允謹代領其衆(정윤근대령기중) 使子昌文收公屍歸葬鄭之先山事 (사자창문수공시귀장정지선산사) 聞贈左承旨綠宣武原從勳 (문증좌승지록선무원종훈) | 27일 성을 순시할 적에 홀연히 날아온 적의 화살을 맞아 순직하였다. 정윤근은 대신 그 병사들을 거느리며. 아들 창문으로 하여금 공의 시신을 거두어서 정씨의 선산에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좌승지로 증직되고 선무원종훈을 녹하였다고 들었다. |
○ 奴秋同亦勇健善射者 (노추동역용건선사자) 從公每戰斬獲甚多 (종공매전참획심다) 同入晋城射殺賊酋二于及亦死亦死於賊 (동입진성사살적추이우급역사역사어적) - 후 략 - | 가노 추동은 똑같이 또한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다. 공이 싸움에 나설 적마다 따라나서 참으로 많이 죽이고 잡아 들였다. 진주성에 같이 들어가서 적의 장수 두명을 쏘아 죽이고 공이 죽자 또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아래는 생략함 - |
4. 정윤근의 죽음(호남절의록으로 대체함)
○ 鄭允謹(정윤근) - 전략 - 受圍八日閔公中矢已死 (수위팔일민공중시이사) 公代領其兵與崔慶會合陣督戰 (공대령기병여최경회합진독전) 氣盡手折遇害于賊 (기진수절우해우적) 贈軍器寺主簿(증군기시주부) | - 앞 부분 생략 - 성이 포위당한 지 8일째 되는 날 민여운이 화살을 맞아 죽자 공이 대신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최경회와 합진하여 싸움을 독려하다가 기운이 다하고 손이 부러진 상황에서 적에게 해를 입었다.(죽었다) 군기시주부로 증직되었다. |
5. 전투 종료
이번 전투는 왜적 10만 대군과 성(城)에 들어간 관군과 의병 6~7천 명 그리고 주민 2~3만 명 해서 우리 측 3~4만명이 격돌한 전투로써 임금이 우려했듯이 전후좌우 길이가 1km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만 성을 두고 벌어진 싸움터에서 우리 측에서는 입성한 전원이 몰살을 당하는 참사를 겪게 되었고, 왜적 역시 1~2만 명이 죽어 나가 양측 모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우리 측에서는 입성한 장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전투가 끝난 지 10여 일이 지난 후에야 명군에게 왜적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부산에 있는 적의 진영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권율에게 진주성 구원에 나서도록 명을 하였다.
왜적들은 진주성 전투가 끝난 뒤 호남진출을 위해 하동과 사천에서 약탈행위를 감행하고 남원과 구례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나 우리측의 반격으로 퇴각하게 된다. 강화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마당에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 왜적들의 입장인 듯 하기도 하고, 이번 진주성 전투에 입은 커다란 내상으로 인하여 다른 전투를 치루기가 힘들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 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변사의 요청으로 권율에게 진주를 구원하라 명하다 선조실록 26년 계사 7월 13일 |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권율(權慄)의 장계를 보니 왜적이 온갖 방법으로 진주를 공격하고 있는데, 명군(明軍)은 아직까지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적과 대진(對陣)하고 있는 외원(外援)으로는 오직 선거이(宣居怡)ㆍ이천(李薦), 홍계남(洪季男) 뿐으로 그 형세가 매우 외롭고 약하다고 합니다. 품첩은 이미 정사(正寫)하였습니다. 권율의 생각은 다만 요해처(要害處)를 지켜 호남을 보전하고자 할 뿐, 군사를 보내어 진주를 구원할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진주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호남을 보전하는 길이니, 이런 뜻으로 급히 권율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6. 진주성 전투의 영향
왜적들이 진주성을 공략하려는 것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원한을 갚고, 본국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하며, 협상에 임하고 있는 명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어 강화 협상을 유리하게 꾸리기 위해 실질적으로 진주성 공격만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전라도 진출까지는 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쟁으로 전라 좌의병 지휘부가 전멸했고, 최경회가 중심이었던 전라 우의병도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해 전국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가졌던 호남의병대가 사실상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진주를 위시한 경상도 서남부 지역의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행정구역개편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
왜적들은 성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어서 분풀이를 하였다.
Ⅴ. 민여운은 누구인가?
이 고을에서 창의한 의병대를 이끌었던 민여운은 누구인가?
그의 증조부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써 선교랑(宣敎郎)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龜孫(구손)이고, 조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성교육 교재라 할 수 있는 童蒙先習(동몽선습)을 지었고, 중국 학사(사신)가 보고 감탄했다 하고 명기 성산월에 의해 널리 알려진 10대 때 지은 白馬江賦(백마강부)와 입암집 6권을 남긴 문호로써 좌찬성을 지낸 제인(濟仁)으로 파조(派祖)이며, 그의 아버지는 思寬(사관)으로 예빈봉사(禮賓奉事)라는 중앙관직을 지냈다.
그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司僕寺僉正(사복시첨정)을 거쳐서 앞에서도 거론한 바와 같이 최경회(崔慶會)가 무장현감으로 있을 당시, 龍潭縣令(용담현령)을 지냈다.
그의 생년이나 성장과정 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가 진주성에서 戰死(전사)한 이후로 그 가솔들이 산외일번면 능암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그 집안에서는 입향조로서 추앙을 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를 증직하고 원종훈에 록하였으며, 철종 무오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가 증직하였다.
Ⅵ. 정윤근 일가가 실천한 삼강(三剛)
정윤근 일가가 실천한 삼강(三剛)에 대해서는 호남절의록, 태인삼강록을 비롯하여 이재유고(履齋遺稿) 등 여러 곳에서 상세하게 나온다.
호남절의록에 나타난 그들의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서술을 대신하고자 한다.
<호남절의록> ◆ 鄭允謹(정윤근) 子昌文搜得公屍歸葬 (자창문수득공시귀장) 丁酉南原之役昌文欲復讐率家僮數十 (정유남원지역창문욕복수솔가동수십) 哭辭廟訣其母赴賊而死 (곡사묘결기모부적이사) | 아들 창문이 (민여운)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정유년 남원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창문은 복수를 하려고 가동 수십명을 거느리고서 사당에 울면서 (출전하게 된 사연을)말씀드리고 그의 어머니를 이별하고 적있는 데로 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
母洪氏妻鄭氏聞其死 (모홍씨처정씨간기사) 幻着男服赴南原俱死於賊 (유착남복부남원구사어적) | 어머니 홍씨와 부인 정씨는 그의 죽음을 듣고 남자의 복장으로 변장하여 남원에 함께 가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鄭氏子夢台生纔一歲 (정씨자몽태생재일세) 臨行屬婢莫禮以養兒繼嗣 之意諺書遣其子 (임행속비막례이양아계사 지의언서견기자) | 정씨의 아들 몽태는 태어난 지 겨우 한 살이었는데 남원에 가려할 적에 거느리던 여종 막례에게 아이를 잘 키워서 가문을 잇도록 하고 그 뜻을 그의 아들에게 언문의 글로써 남겼다. |
나라에 충성한 정윤근(鄭允謹), 대장과 부친에게 효를 다한 그의 아들 창문(昌文) 그리고 부군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간 열부(烈婦) 그들의 부인은 2대에 걸쳐 삼강(三剛)을 실천한 이 고을 사람들의 정신적 표상이었다고 할 것이다.
Ⅶ. 결어
유족의 입장에서 바라본 민여운 의병대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 민여운의 의병대는 이 고을 백성들에 의해 일어난 최초의 의병대이다.
당시 이 고을에서는 민여운 의병대 말고도 의병에 참여한 인사들이 있었다.
도학서원에 배향된 고부의 김제민 같은 경우에는 삼례에서 그리고 순창에서 지역주민들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자녀들과 함께 출전하고, 옹동 모충사에 배양된 권극평의 경우에는 최경회의 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 고현내 김후진은 장성 남문창의에 적극 참여하고 이 부대를 통해서 의주로 파천한 임금에게 식량과 무명과 솜과 종이를 전달하였다. 그 밖에도 모충사에는 백광언, 이지시 등 관군으로 출전하여 순절한 인사들을 배향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우리 고을 백성들만으로 창의하여 편제를 갖추고 장기간 여러 전투에 참여하고 역사에 남을 큰 전장에 전몰한 부대는 이 고을에서 민여운 의병대뿐이다.
둘째, 이 부대는 활동 기간이 1년이 넘는다.
당시 오랜 가뭄과 전쟁으로 기근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지방 수령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해 냈다. 그 책임이 오롯이 지휘관에게 있었다. 다행히도 민여운에게는 안의와 손홍록과 같은 적극적인 후원인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는 없다.
셋째, 이 부대에 대한 병사들과 백성들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단단하였다.
창설 당시 대원의 수가 2백 명이었는데, 진주성에 입성할 때 그 대원수가 중앙의 기록에는 2백 명으로, 호남절의록 등 이 지역의 자료들은 3백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전사하고 부상당해 감소한 숫자도 적지 않았고 다른 사정에 의해서 중간에 그만둔 경우도 많았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창설 당시 대원수를 끝까지 유지하고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은 장수와 병사들이 상호간 신뢰가 얼마나 강하고 단단하였는지를 말해준다. 또 이들이 진을 치고 작전을 수행한 고을마다 이들로 인하여 상당한 불편과 부담이 있었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믿을 것은 이 부대밖에 없다는 생각에 같이 의지하고 이 부대에 참여한 인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정윤근 부자와 그의 고부간에 실천한 삼강(三剛)은당시 태인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자세이자 정신이고 실천 덕목이었던 것이다.
넷째는 정윤근 가문에서 실천해낸 삼강(三剛)은 민여운 의병대 나아가서 이 고을 백성들의 곧고 의로운 삶의 진솔한 모습이었다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장사병이 하나가 되어 대의(大義)를 결단력 있게 실천해 낸 정읍의 정신과 의기야말로 훗날 동학혁명과 병오창의를 가능케 한 뿌리요 씨앗라고 할 것이다.
속설 같지만 영기(靈氣) 서린 상두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구장리와 만병리에는 아홉 장수가 만 병사를 훈련시키는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한다.
이 기상이 갊아있는 비의장 민여운의 의병대로부터 정읍의 정신이 움트기 시작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고 이러한 의롭고 곧은 정신과 자세야말로 다른 고장에서 또 다른 나라에서까지도 정읍의 정신이라 일컬어 질 수 있도록 새롭게 조명해보고 지키고 다져나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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