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은하철도 999, 어린왕자, 그리고
박 진 희
어린 왕자는 슬플 때 해 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하루는 작디작은 자신의 별에서 의자의 방향을 돌려가며 해 지는 모습을 마흔세 번이나 보았다고 했다. 얼마나 슬펐던 걸까. 도대체 그 하루가 어떠했기에 해 지는 모습을 마흔세 번이나…. 책에서 어린 왕자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문득문득, 어린 왕자의 ‘그 하루’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필자도 해가 지는 모습이 보고 싶은 날이기도 하다.
노혜숙 작가의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를 덮고 나서도 그랬다. 이미 해는 졌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건만 인적이 드문 곳,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아 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왜일까.
노혜숙 작가는 2006년 등단해 세 권의 수필집 조르바의 춤, 생생, 기척을 내다, 비밀번호와 한 권의 수필 선집 인연수첩을 발간했다. 창작집으로는 2015년 비밀번호 이후 칠 년 만이니 꽤 오랜만에 신간을 상재한 셈이다. 금번에 출간한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는 포토에세이집이다.
‘포토에세이’는 ‘포토’와 ‘에세이’, 곧 이미지와 글이 상호 보족하여 의미를 발현하게 된다. ‘포토’와 ‘에세이’는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다. 언어가 의미를 한정한다면 이미지는 원심적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이미지는 언어 이전의 형태로 무의식의 형식이라 할 수 있으며, 사물과의 보다 직접적인 관계성을 함의하고 있다.
포토에세이에서 독자는 보통 이미지를 먼저 대하게 된다. 이를 통해 즉자적인 혹은 직관적인 독자만의 정서와 의미를 내재하게 된다. 그 후에 작가가 한정한 이미지의 의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독자는 일반 수필을 읽을 때보다 훨씬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담보하게 된다.
독자가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를 갖게 되느냐는 작가의 역량에 달렸다. 어느 장르의 글이라고 그렇지 않으랴만 이미지의 함량에 따라, 이미지와 글의 조응에 따라 독자에게 전해지는 의미의 진폭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포토에세이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노혜숙 작가의 작품들은 이미지와 글의 조응으로 구현되는 의미의 다층성이나 문학적 긴장이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집 속에 펼쳐지는 ‘풍경’들과 글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기억, 나의 상처와 만나게 되고, 작가의 그것들과 공통분모를 이루는 지대에서 오래 서성이게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풍경 속에서 잊힌 채 잠들어 있던 내 안의 기억들을 만난다. 낡은 풍경 속에서 풀려나온 기억의 한 끄트머리가 풍화된 추억을 재현해낼 때 나는 오롯이 잃어버린 시간과 재회한다. 회억의 정서란 다분히 낭만 일색이기 쉽지만 외면하고 싶은 상처와의 대면이기도 하다. 마른 덤불에 숨어 삭히던 사춘기 적 외로움, 깊은 겨울 아버지의 잔기침 소리, 어느 저녁 늦도록 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때의 불안, 뒤울안 향나무 아래 묻어준 누렁이….
그리운 것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고 나는 이따금 슬픔의 그림자를 거느린 그 풍경 속을 뒤척인다.
- 「뒤척이다」
노혜숙 작가의 포토에세이에서 ‘풍경’, 곧 이미지는 “잊힌 채 잠들어 있던 내 안의 기억들”이라든가 “풍화된 추억”을 끄집어내는 기능을 한다. 그 ‘기억들’이란 낭만적이거나 낭만적으로 윤색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외면하고 싶은 상처”를 대면하게 되기도 한다. 작가의 의식을, 마음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후자 쪽이다. 아파본 자가 아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듯, 자신의 내면을, 상처를 올곧게 대면하는 자는 타자의 상처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일까.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 속 ‘풍경’은 “슬픔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슬픔의 그림자”는 대부분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드리워지고 있다. 그의 작품집에서 구현되고 있는 슬픔이 정서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 또한 함의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못 빼려면 벽이 무너져야겠다. 못이 벽을 붙잡고 있는 걸까, 벽이 못을 붙잡고 있는 걸까. 저렇게 부둥켜안고 살다보면 한통속이 되기도 할까. 내 속에도 박힌 적 없이 박힌 못 하나 있다. 아직 덜 삭았는지 가끔 생채기를 낸다. 생채기와 싸우느라 뭉텅 잃어버린 시간들이 얼마인가. 생각해보니 애초 박힌 적도 없는 못을 가지고 헛씨름하며 산 것 같다. 평생 걸려 저렇게 편안한 그림 한 장 갖는 것인 줄 비로소 알겠다.
-「못」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라는 표현이 있듯, 인간의 실존에는 불안과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그러한 불안과 시련 가운데서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나’라는 존재는 배제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못’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질료에 ‘못’이 있는 것이다. 저 ‘못’을 부정한다면 ‘지금 여기’의 ‘나’도 부정되어야 한다. “못이 벽을 붙잡고 있는 걸까, 벽이 못을 붙잡고 있는 걸까.”라거나 “저 못 빼려면 벽이 무너져야겠다”라는 언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생채기’는 ‘못’이 아니라 ‘내가’ 내는 것이다. “애초 박힌 적도 없는 못을 가지고 헛 씨름 하며” 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못이 박혀있는 벽이, “편안한 그림”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어르고 달랬을지. “생채기와 싸우느라 뭉텅 잃어버린 시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심지어 아직도 “가끔 생채기”를 내고 있다지 않은가. “저렇게 편안한 그림 한 장 갖는” 데에 평생이 걸린다는 작가의 통찰에, 이 ‘평생’이 주는 시간의 무게감에 숙연해질 뿐이다.
그는 내게 하나의 풍경이다. 일상이 흐리고 비가 내릴 때 가끔 그 풍경을 찾는다. 그는 풍경처럼 무심하고 나도 그 무심함에 익숙하다. 그런 채로 그는 늘 거기 있고 나도 늘 여기 있다. 무심함에도 세월의 켜는 앉아서 그리움이라는 유대의 기미가 어른거린다. 애초 풍경이란 관조의 대상일 뿐 소유의 대상이 아닌 것. 끝내 서로 풍경에 녹아들지 못한 채 풍경 바깥을 서성인다. 나 홀로 저 홀로 그렇게 저물고 있다.
-「풍경」
관계의 본질을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한 글이 있었던가. 인간은 모체와 한몸을 이루었던, 그 충만한 감각을 선험적 기억으로 포회하고 있는 존재다. 다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결핍의 존재이자,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다. 대상과의 동일화를 꿈꾸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욕망일 터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핍으로 인해 동일화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으며 강하게 욕망하면 할수록 외로움에 빠지게 되는 아이러니적 존재이기도 하다. 흔히 이 욕망을 사랑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서로에게 ‘풍경’이다. “관조의 대상일 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 쓰고 있는 ‘관조’, ‘무심’ 등의 표현으로 관계의 건조함을 환기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질은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는 자아의 태도에 있다. “나 홀로 저 홀로 그렇게 저물고 있다”라는 표현에서 더없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작품집 전체를 읽고 나면 인간은 본래 혼자이며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리움이라는 유대의 기미”에 기대어 잠시 잊고 지낼 뿐.
노혜숙 작가의 포토에세이는 이렇듯 사실 글만으로도 의미는 전달되고 있다. 짧지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니 여기에 이미지가 더해지면 어떠할지…. 기대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의미를 발현함에 있어 이미지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도 있다. 바로 「엄마」와 「소풍」이 그러하다.
어느 겨울 새벽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불을 들추더니 한동안 내 다리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곤 “우리 혜숙이 언제 이렇게 컸담….”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손길은 따뜻하고 목소리엔 한없는 애잔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뭉클해서 그냥 자는 척 누워 있었습니다. 사는 동안 한 번도 그 일을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혼자 생각하다 가슴이 그득해지곤 했습니다. 어린 손주를 곁에 뉘고 그때 어머니 마음을 헤아립니다. 엄마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
-「엄마」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인조대왕 능으로 가을 소풍을 갔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한껏 단장시킨 막내 남동생 손을 잡고 점심시간에 맞춰 오셨다. 여섯 살 여동생은 꽃신을 신고 따라왔다. 아버지는 바쁜 농사일 때문에 오시지 못했다. 네 식구는 잔디밭에 둘러앉아 짠지무침에 계란말이를 반찬으로 점심을 먹었다. 임금님 무덤 앞에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었다. 나는 까만 운동화 신은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여동생 옆에 섰다. 환한 가을날 찍은 그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울었다. 새파란 어머니, 새싹 같은 내 막냇동생…. 모두 떠나고 여동생과 나 둘만 남았다.
-「소풍」
노혜숙 작가의 글은 유려하면서 깊은 사유를 함의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에 비해 위 글들은 사진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작가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별한 의미라든가 문학적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엄마와 두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토에세이에선 이미지를 먼저 만나게 된다. 그 이미지라는 것이 이 작품들에선 빛바랜 흑백사진이었던 것이다. 구겨진 흔적조차 있는 흑백 사진 속엔 젊은 날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그리고 역시 어린 작가가 함께 앉아 있거나 서 있다. 이보다 더 핍진한 표현이 있을까.
사진을 보자마자 뭔가 울컥 올라온다. 여기에 세련된 표현이 따랐다면 오히려 겉도는 나사처럼 이물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런 꾸밈도 비유도 없는 담담한 문장이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가령 “엄마가 무척 보고 싶습니다.”와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새파란 어머니, 새싹 같은 내 막냇동생…. 모두 떠나고 여동생과 나 둘만 남았다.”라는 「소풍」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울음을 참기 힘들어진다. 슬픔이, 그리움이 그토록 직핍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노혜숙 작가의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를 읽다 보면 탄탄하고 유려한 문장과 깊은 사유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그런데 또 어느 장을 넘기다보면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더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이미지와 글로 작품을 이루는 포토에세이의 의의가 아닌가 한다. 노혜숙 작가의 특장이 잘 드러나는 형식적 의장이라는 생각도 든다. 포토에세이라고 모두 그런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노혜숙 작가의 웅숭깊은 감성과 사유, 여기에 이미지와 글을 운위하는 진정성과 노련함이 더해져 만든 결과다.
노혜숙 작가는 “상처의 기색”(「얼룩」)에 예민하다.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양지보다는 그늘, 빛보다는 그림자, 피는 것보다는 지는 것, 중심보다는 주변에 시선을, 마음을 둔다. 책을 덮고 나면 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友」라는 작품에서 “초승달, 은하철도 999, 그리고 어린왕자. 셋은 잘 어울린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도 되겠다. 그늘이 그늘의 손을 잡고도 이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