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수 X다. 양자역학을 넘어 시뮬레이션 우주론까지 가봐야 한다. 공간과 시간의 국소성을 뛰어넘어야 한다. 둘은 메커니즘의 연결이다. 부름과 응답을 연결하여 조절한다. 에너지를 주는 쪽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셋은 종교의 신이다. 이는 받는 쪽 입장을 강조하는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
1. 미지수 X.. 국소성을 부정하는 우주의 작동원리
2. 존재의 메커니즘.. 조절장치, 에너지를 주는 쪽 입장
3. 의인화 된 초월적 존재.. 인간의 본능, 에너지를 받는 쪽 입장
첫째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결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주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가 우리 눈앞에서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근원에서 국소성의 원리가 깨진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실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한다. 우주가 찌그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작동하는 것은 압력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물질 바깥의 존재가 있다.
폴리네시아 부족민은 작은 카누가 앞바다를 지나가는 것은 잘 보는데 큰 범선이 먼 바다를 지나가는 것은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을 봤다는 사람이 없다.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으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봐도 무시한다. 문제는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느냐다. 작은 카누를 잘 보는 이유는 전쟁의 위험 때문이다. 작은 카누는 삶에 개입하는데 큰 범선은 개입하지 않는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손을 뗐다면 없는 것과 같다.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 전에 정렬이 있다. 신과 인간은 끊임없이 정렬한다. 사슴이 움직이면 사냥꾼의 총구도 움직인다. 신은 인간을 조절하고 인간은 신을 조절한다. 정렬하는 방법으로 신은 인간의 삶에 보이지 않게 개입한다. 혹은 보이게 개입한다. 부족민처럼 맞대응을 못하므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를 믿는다. 종교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교적 본능에 충실히 응답하고 있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다. 식욕과 성욕처럼 인간에게는 종교욕이 있다. 종교인은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고 보상하거나 보복한다고 믿는다. 틀렸다. 부단히 정렬할 뿐 보복하거나 보상하지 않는다.